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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철원, 김영규, 이승구 등등 4~50년대생 유명 장로교 신학자들이 죄다 음모론들에 빠져 침몰... 김세윤 같은 신학자는 조국기부대가 되어 침몰...



나도 저렇게 되지 않을까 공포감에 몸서리치는 인생....


한국 개혁주의 신앙의 선배들이 뿌리 뽑혀져 나는 고아가 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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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의 경우, 칸트 이후의 철학에 대한 이해를 폭넓게 수용해서 신정통주의적 강점으로 전환시켰는데, 그것은 그가 자연 이성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려 주지 않고, 하나님은 이성이 아니고 신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우연적 사건들 안에서만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근본적인 인식에 문을 열었다.

Milbank, Pickstock and Ward, eds. Radical Orthodoxy: A New Theology, 21.

반틸이 바르트를 비판하는 가장 핵심 지점이 칸트의 자율적 이성을 긍정하며 그의 본체계-현상계 구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바르트의 초월과 내재의 구분이 성경적인 초월과 내재가 아니라 칸트가 그어놓은 이성의 한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며, 그 점에서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밀뱅크도 이와 동일한 비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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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트 신학의 칸트적 요소와 밀뱅크의 비판


바르트 신학에 나타난 칸트적 요소: 초월론적 계시 신학과 자연신학 거부


칼 바르트(Karl Barth)는 20세기 신학에서 계시 중심의 신학을 구축하면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영향 아래 초월론적(transcendental) 접근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바르트는 인간 이성이 하나님을 스스로 알 수 있는 영역을 철저히 제한했고, 오직 하나님의 자기계시(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에 의해서만 참된 신 معرفة 이를 통해 바르트는 계시를 신학의 유일한 토대로 삼았는데, 이는 칸트의 인식론적 한계 설정과 맥을 같이합니다. 실제로 젊은 시절 바르트는 칸트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모든 신학은 칸트에서 시작해 칸트로 끝나야 한다”는 가르침까지 접했다고 합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으로 신과 영혼 같은 초월적 실재를 알 수 없다고 단언했는데, 바르트는 이러한 칸트의 비판을 신학적으로 수용하여 인간편에서 하나님께 도달하는 모든 시도에 철저히 회의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바르트 신학은 “위로부터” 주어진 계시를 전제로 하는 일종의 초월론적 방법론을 띠게 되는데, 학자들은 바르트의 초기 로마서 주석에서 드러난 이러한 칸트적 신학 방법론이 이후 교회교의학에까지 지속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이러한 계시 중심주의는 자연 신학의 단호한 거부로 이어졌습니다. 바르트는 계시 외에 자연이나 역사, 인간 이성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는 시도를 모두 부정하였는데, 이는 칸트가 신 존재 증명과 같은 “자연 신학”을 불가능하게 본 관점과 일맥상통합니다. 1934년 에밀 브루너와의 유명한 논쟁에서 바르트는 자연계시를 인정하자는 브루너의 입장에 단호히 “Nein!”으로 응답하며,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이를 수 있는 “접점”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 신학의 하나님 인식론마저 비판하여, 피조물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는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 개념을 **“적그리스도의 발명품”**이라고까지 일컬었습니다. 이러한 발언에서 드러나듯이, 바르트는 자연 신학이나 철학적 신 개념을 신학에 끌어들이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바르트에게 신학은 철저히 계시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철학이나 인간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으로 하나님을 “증명”하거나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르트 신학은 계시와 믿음의 영역을 절대화하고 이성적 사변이나 자연적 종교성을 배제하는데, 이는 칸트 이후 근대 신학이 설정한 한계를 신실하게 따른 모습이라고 평가됩니다. 실제로 칸트가 이성의 한계를 규정한 것은 바르트 자신이 구(舊) 정통주의와 피상적 계몽주의를 넘어서는 결정적 전환이라고 언급될 정도였습니다. 요컨대 바르트의 신학은 “계시는 계시로, 이성은 이성으로” 구분짓고, 신앙과 이성, 은총과 자연을 엄격히 분리함으로써 칸트적 비판철학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존 밀뱅크의 비판: 바르트의 칸트적 범주 유지와 신학의 한계


**존 밀뱅크(John Milbank)**는 이러한 바르트 신학이 근대 철학, 특히 칸트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합니다. 밀뱅크에 따르면, 바르트는 표면상으로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을 거부하고 계시의 우위를 세웠지만, 여전히 칸트가 설정한 인식론적 틀 안에서 사고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연 대 은총, 이성 대 계시”라는 이분법적 범주를 바르트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밀뱅크는 가톨릭 신학자 앙리 드 뤼박(Henri de Lubac)의 Surnaturel 논쟁을 언급하면서, 바르트의 신학이 혁신적처럼 보여도 결국 근대적인 자연/은총의 대비 속에 갇혀 있었다고 지적합니다. 바르트는 자연과 초자연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긋고 순전한 계시만을 신뢰했지만, 이는 칸트 이후 개신교 신학이 빠진 “세속/신성” 이원화의 틀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밀뱅크는 바르트가 **아날로기아 엔티스(존재의 유비)**나 드 뤼박이 강조한 “자연 속의 초자연(surnaturel)” 개념을 전혀 수용하지 않음으로써, 창조 세계와 하나님의 관계를 제대로 해명할 수 있는 신학적 도구들을 등한시했다고 봅니다. 그 결과 바르트의 신학은 신학과 철학의 건설적 대화가 차단되고, 신앙의 영역만을 절대화하여 다른 학문이나 문화 영역과의 소통이 어려워지는 한계를 지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밀뱅크는 바르트가 **칸트적 범주(이성과 계시의 이원화)**를 깨뜨리지 못하고 그대로 신학에 적용했기 때문에 신학의 지평이 불필요하게 축소되었다고 비판합니다. 바르트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계시만을 강조하여 창조 질서 내 이성의 역할을 무력화함으로써 신학이 세속 학문과 분리된 “자율 영역”에 머물게 되었고, 이는 결과적으로 근대 세속 이성에 도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한계를 받아들인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밀뱅크의 이러한 비판은 근대 이후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재검토하자는 급진정통주의(Radical Orthodoxy) 입장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바르트의 신학이 근대성을 극복하려 했지만 여전히 칸트적 초월/경험 구분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참된 극복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바르트는 철학적 사변을 이교적(idolatrous)이라고 우려하여 아날로기아 엔티스를 거부했지만, 밀뱅크는 오히려 **올바른 존재의 유비 개념을 통해서야 창조주-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밀뱅크는 바르트에게서 자연과 은총의 단절, 신학과 철학의 불통이라는 한계를 보고, 이것이 칸트 이후 잘못 형성된 신학적 패러다임의 산물이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밀뱅크의 대안: 플라톤주의적 참여, 자연신학 회복, 신학-철학의 새로운 관계


밀뱅크는 바르트가 간과한 대안적 신학적 길로 “참여(participation)”의 신학을 제시합니다. 그의 신학 사상 전체의 중심에 플라톤주의적 참여 개념이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밀뱅크는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등의 전통 및 드 뤼박과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같은 **누벨 테올로지(nouvelle théologie)**의 영향을 받아, 피조세계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함으로써 존재하고 의미를 얻는다는 관점을 발전시킵니다. 이러한 “존재의 참여” 사상은 근대의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자연과 초자연, 이성과 계시를 이분법적으로 떼어놓지 않고 모두를 하나님의 창조적 존재 안에서 통합하려는 시도입니다. 밀뱅크에 따르면 창조 자체가 이미 은총의 사건이며, 자연 속에 초자연에 대한 열린 지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는 **“창조와 구원을 결코 분리하지 말라”**고 주장하면서, 창조 질서 자체를 초자연으로 재창안하는, 다시 말해 **“자연을 초자연화한다(supernaturalizes the natural)”**고까지 표현합니다. 이는 모든 피조 현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그 어떤 “순수 자연”도 없다는 뜻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밀뱅크는 일종의 자연신학을 복권시키는데, 다만 그것은 계시와 대립되는 독자적 영역으로서의 자연신학이 아니라, 창조 질서가 이미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다는 참여 신학적 자연신학입니다. 예를 들어 중세나 고대 교부들의 사상에서처럼 철학적 사유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에 봉사하도록 통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뱅크는 **근대가 잘못 가른 “내재와 초월”**의 벽을 허물고, 신학이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 영역과 대화하며 그 토대를 형성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성 활동조차 하나님의 마음에 참여(participation in the mind of God)하는 행위이므로, 어떤 학문이나 문화도 신학과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적 토대 위에서 밀뱅크는 신학과 철학의 새로운 관계를 정립하고자 합니다. 신학이 철학을 배척하는 바르트식 태도를 넘어, 신학이 철학적 개념(예: 존재, 선, 진리 등의 개념)을 변혁시켜 자기 언어로 받아들이는 상호 참여 관계를 모색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밀뱅크의 대안은 **“보다 포괄적인 기독교적 메타물리학”**으로서, 피조물의 존재 자체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하고 있음을 전제함으로 자연과 은총, 이성과 계시의 경계를 재설정하는 신학입니다. 이런 대안 속에서 자연 신학은 폐기될 것이 아니라, 참여의 논리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되고, 신학과 철학은 분리가 아니라 친밀한 대화 관계로 회복됩니다.


바르트와 밀뱅크의 근본적 차이와 신학적 논쟁의 의미


以上

바르트와 밀뱅크의 입장을 종합하면, 근본적인 차이는 신학과 철학(또는 자연) 사이의 관계 설정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계시의 절대적 우위를 세우기 위해 칸트적 한계 인식을 받아들이면서까지 자연적 이성과 철학을 신학에서 배제하려 했습니다. 이는 계시의 순수성을 지키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신학을 교회 내부 담론으로 한정하고 세속 학문이나 문화에 발언권을 잃게 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반면 밀뱅크는 계시와 창조의 연속성을 강조하여 모든 현실을 신학적으로 조망하려 합니다. 그는 근대의 세속 철학이 오히려 기독교 신학에서 파생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신학이 다시 세계관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적 담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구체적으로 아날로기아 엔티스 논쟁, 자연신학의 가능성, 교회와 세속 사회의 관계 등에서 드러납니다. 예컨대 바르트가 배격한 **“존재의 유비”**를 밀뱅크는 신학적으로 재활용하여 피조물이 하나님을 비추는 거울임을 말하고, 자연 속에서도 신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는 틀을 제공합니다. 바르트가 계시 밖에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길이 없다고 본 데 반해, 밀뱅크는 계시 자체가 창조 질서를 통해 광범위하게 스며든다고 봄으로써 보다 포괄적인 은총의 영역을 상정합니다.


이 논쟁의 신학적 의미는 현대 신학이 근대 철학과 맺는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와 직결됩니다. 바르트의 노선은 **“신학의 자율성”**을 지켜내어 계몽주의 이성에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정통 신앙을 수호했지만, 그 여파로 신학과 철학이 단절되고 세속 학문 영역을 사실상 신학이 포기한 면이 있습니다. 밀뱅크의 노선은 이러한 단절을 비판하며 신학이 다시금 철학과 문화 담론의 중심에 설 것을 요구합니다. 이는 신학의 메타담론화, 즉 신학이 다른 학문을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세계관적 역할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으로, 근대 세속주의에 대한 도전의 성격을 띱니다. 동시에 이 논쟁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전통적 견해 차이도 반영합니다. 바르트는 종교개혁 전통에서 자연신학을 불신한 극단을 대표하고, 밀뱅크는 가톨릭의 자연과 은총의 조화 전통을 탈근대적으로 재해석한 셈입니다. 따라서 두 사람의 논쟁은 20세기 에큐메니컬 대화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되었고,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같은 이는 바르트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그리스도론과 창조론의 균형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르트와 밀뱅크의 입장 차이는 신학이 철학적 범주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상반된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르트는 칸트의 도움으로 신학의 초월적 순수성을 사수했지만, 밀뱅크는 플라톤적 참여 사상을 통해 신학과 철학의 재결합을 추구합니다. 이 논쟁은 오늘날 신학자들에게도 계시와 이성의 관계, 교회와 문화의 관계를 재검토하게 하면서, 신학의 임무가 단순한 교리 해설을 넘어 세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를 제공하는 것인지에 대한 심도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결국 밀뱅크의 비판은 바르트 신학이 근대 철학의 한계를 넘어서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일깨우며, 신학과 철학의 새로운 만남을 모색하는 현대 신학의 과제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바르트와 칸트의 관계 및 밀뱅크의 비판에 대해서는 Oakes, McCormack 등의 바르트 연구와 Milbank 본인의 저술 및 해설서를 참조하였습니다. 이러한 문헌들은 바르트 신학에 내재한 칸트적 요소를 지적하고, 밀뱅크가 주장하는 참여적 메타피직스의 의미를 상세히 논하고 있습니다. 특히 Milbank의 The Suspended Middle과 Radical Orthodoxy 운동의 문헌들은 바르트 이후 신학이 나아갈 또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데 중요한 대안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본 고찰은 이들 연구에 기초하여 바르트와 밀뱅크의 신학적 차이를 조명하고 그 함의를 분석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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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생각: 17세기 네덜란드의 대표적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인 프란키스쿠스 유니우스 Franciscus Junius 의 A treatise on true theology 중 자연신학에 대한 부분을 발췌번역한 것이다. 개혁주의 전통이 자연신학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다는 J.V.Fesko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테제 18: 그러나 이 본성이 타락한 이후에도, 그 최초의 원리들은 여전히 개인들 안에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공유되었으며, 가려져 있고 불완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 자체로 완전히 손상되었고, 상호 간에 극도로 혼란스러워졌으며, 마치 타락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진 우리의 본성의 파편들처럼 되어버렸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 본성의 타락, 혹은 그 타락의 기원과 방식에 대해 자세히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비참하게 죄에 빠지기 전,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의 상태와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다. 더욱이, 정통 교부들과 그들의 발자취를 따른 스콜라 학자들이 잘 전수한 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자연적 은사(natural gifts)는 타락하였고, 초자연적 은사(supernatural gifts)는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초자연적 신학(supernatural theology)은 인간의 죄로 인해 마치 거부되고 불공평하게 경멸당한 것처럼 보였고, 이 땅에서 사라지고 하늘로 물러났다. 자연 신학은 다른 모든 자연적 것들과 마찬가지로 타락하였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타락한 주체(subject) 안에서 그것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우리는 이 타락의 방식이 두 가지로 나타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는 주체 자체(subject itself)와 그 개별적인 부분들의 구성(constitution)에 관한 것이며, 두 번째는 주체와 그 부분들이 서로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과 맺는 관계(arrangement)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주체 안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존재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지성(intellect)에는 원리(principles)들이 있었으며, 마음(mind)에는 이성(reason)이 있었다. 이로 인해 자연적 인간(the natural man)은 어느 정도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인간의 타락 이전 상태에서도 이러한 원리들은 이미 고유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며, 인간의 이성 또한 변할 수 있는 속성(mutability)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이러한 한계를 인간의 타락이 결코 해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타락은 이 원리들이 동일한 상태로 유지되도록 할 수도 없었으며, 궁극적으로 그 원리들이 쇠퇴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이전에 원리(principles)가 개별 사물들 속에서 공유되었을 때, 그것들은 여전히 공유되었으나, 악덕(vice)의 공격을 받았다. 만일 그것들이 가려져 있었던(veiled) 상태였다면, 이제는 훨씬 더 가려지게 되었다. 만일 그것들이 불완전(imperfect)했다면, 이제는 훨씬 더 심각한 불완전성 속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인간의 이성(human reason)은 더 나빠질 수 없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졌으며, 가장 심각하고 수치스러운 타격을 입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본성에 대해 가장 참되게 말할 수 있는 진술은 다음과 같다. 온전한 본성이 타락하였으며, 그 본성의 모든 원리들 또한 완전히 부패하였다. 특히 신학과 관련된 원리들이 더욱 심각하게 타락하였다. 왜냐하면 신학의 대상은 모든 피조물의 본성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락하지 않은 본성(unspoiled nature)조차도 신학적 대상을 본성의 한계 내에서만 파악할 수 있었으며, 그 이상의 접근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원리들은 자체적으로 가장 심각하게 타락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것들이 적절한 질서(proper order)와 올바른 관계(suitable relationship)로부터 극도로 멀어졌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보다 더 혼란스럽고(chaotic) 무질서한(disorderly) 상태일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전체 인격(whole person)에서조차도 필수적인 질서(necessary order)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또한 그의 부분들(parts of that whole) 사이에서도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며, 나아가 자신의 전체 존재를 둘러싼 외부 사물들과도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극심한 혼돈과 무질서의 상태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 원리들(principles) 자체는 타락한 인간(fallen man) 안에서도 본질적으로 동일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왜냐하면, 이 원리들은 그 기초(foundation)에서는 동일하게 유지되었으나, 그 방식(manner)에서는 극도로 흩어지고 혼란스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원래의 방식(mode)을 스스로 유지할 수도 없었으며,서로 간에도, 그리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서도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원리들은 극도로 혼란스럽게 변하였으며, 마치 그 근거의 본성(underlying nature)의 부서진 파편들처럼 되어버렸다. 그 본성은 우리의 무거운 타락(weighty fall)으로 인해 비참하게 쓰러졌다. 마치 우아한 집(graceful house)이 강력한 충격(heavy blow)을 받고 한순간에 처참하게 무너질 때, 그 집을 구성하던 모든 부분들이, 비록 정교하게 제작되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할지라도, 이제는 산산이 부서지고, 폐허 속에 뒤엉켜 무너져 내리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본성(human nature) 안에 있던 모든 우아함(graceful quality)도 사라져 버렸으며, 이제는 우리의 악(viciousness) 속에서 무질서하게 뒤엉킨 혼돈의 덩어리로 묻혀버렸다.

이제 마지막으로, 타락한 본성(fallen nature)과 그 안에 남아 있는 자연적 원리(natural principles)의 작용과 그 영향(effects)을 살펴보아야 한다. 분명히, 이러한 원리들의 기능(function)과 인간 본성 전체의 기능이 지금 이토록 쇠약해졌다면, 비록 자연이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서도 그 기능이 미약한 상태라면,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에서 본성과 그 원리들이 지닌 연약함과 불완전함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학(theology)의 대상(subject)은 이 타락한 본성으로는 결코 온전히 파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한(infinite)하며, 모든 자연(nature)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개별 인간의 본성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신학에 대해, 그 기능(function)과 영향(effects)을 고려해본다면, 우리는 앞서 언급한 내용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테제 19: 따라서,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은 어떠한 것도 완전하게 이끌어 갈 수 없으며, 또한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는, 은혜(grace)에 의해 더해지는 완전성(perfection)을 담아낼 능력조차 없다.

이 글에서 우리는 자연 신학(natural theology)에 대해 세 가지 사항을 간략히 표현하였다. 이는 마치 과학(sciences)에 능통한 자들이, 자신들이 논의하는 사물들의 본질(essence)에 대해 세 가지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과 같다. 즉, δύναμιν, ἔργον, καὶ πάθος—즉, 잠재성(potency), 현실태(actuality), 지속성(persistence) 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 신학에 대해 주장하는 세 번째 주제는, 일부 사람들에게 더 무겁고 믿기 어려운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 본성(nature)의 모든 것이 철저히 제거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glorious grace)만이 더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자연 신학은 그 자체로는 은혜에 의해 더해지는 완전성(perfection)을 담아낼 수 없다. 즉, 자연 신학은 그 본성(nature)이나 성격(character) 자체로는, 질서 있는 관계(ordered relation)나 성향(disposition)으로도, (철학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어떠한 준비된 상태(prepared state)로도하늘의 은혜(heavenly grace)가 부어질 완전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성향을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자연이 잠재성(potency)이라는 범주에 따라 본성과 자연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 본성이 지닌 적성(aptitude)과 성향(disposition)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special revelation)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하늘의 영적 은사(heavenly and spiritual gifts)를 누리고 인식하는 문제에 이르면, 자연 신학은 그 자체로 수동적 잠재성(passive potency)을 지니지 않으며, 수용적(receptive)이지도 않고 (스콜라 학자들이 말하는 바대로) ‘순종적 잠재성(obediential potency)’을 지니지도 않는다. 결국, 자연 신학과 초자연 신학(supernatural theology)은 어떠한 공통된 성향(disposition)도 공유하지 않는다. 분명히, 두 신학이 다루는 대상(subject)은 동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각각의 지혜(wisdom)는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동일한 대상을 공유한다고 해서, 동일한 범주의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각각의 방식(mode)이 지식의 차이를 만든다. 예를 들어, 음악(music)과 산술(arithmetic)은 모두 숫자(numbers)를 다루지만, 그 접근 방식(mode of treatment)은 다르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단 하나의 논증으로도 증명될 수 있다. 자연은 항상 선재하는 질료(preexisting matter)로부터 성향(disposition)을 형성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만물 안에서 모든 것을 역사하신다(works all things in all). 따라서, 자연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자연은 이해(understanding)를 적용하고, 원리의 씨앗(seeds of the principles)을 받아들여 성향을 형성한다. 하지만, 초자연 신학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 모든 부분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초자연 신학은 완전히 정의롭게 ‘초자연적’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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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생각: 네덜란드 신학은 망했다. 교회 제도 외에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가 차이가 없고, 실제적으로는 칼빈이 화체설을 지지했다고 하고, 칼빈이 교회의 계층적 구조를 지지했다고 하다니! 이런 사람이 카이퍼와 바빙크가 역임했던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교의학 교수였다니!>

WHY NOT JOIN THE ROMAN CATHOLIC CHURCH? (2022)

Cornelis van der Kooi

ESAA/EURAC of Erasmus University Rotterdam

Korespondensi: cornelisvanderkooi@gmail.com

초록(Abstract):

이 기고문의 제목은 의도적으로 다의적이다. 이는 수사적 질문으로 읽힐 수 있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에 가입할 만한 수많은 정당한 이유가 있는데, 왜 개신교인들은 이 결정을 보류해야 하는가?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이유는 교회의 상태였다. 교직과 주교직의 권위가 권력 남용으로 인해 훼손되었으며,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었다. 이러한 비판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가?

최근 몇 년 동안 개혁주의 및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이는 개신교와의 접근을 이루었고 많은 개신교인들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제목은 또 다른 방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에 가입하는 것에 대한 반론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두 가지 가능성을 상세히 논의하고, 이러한 선택에 대해 몇 가지 논평을 제시할 것이다.

키워드(Keywords): 종교개혁, 복음주의, 로마 가톨릭, 교회.

비상 조치(Emergency Measure)

역사적으로 개신교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려는 의도를 가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개신교는 교회를 개혁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되돌리려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로마 가톨릭 상대자들 모두 교회는 하나이어야 하며, 서로 다른 신앙고백으로 인해 분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동의했다. 이는 초기 종교 논쟁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1518년 하이델베르크에서 루터가 에크(Eck)와 논쟁을 벌였을 때, 그리고 1536년 로잔(Lausanne)에서 존 칼빈이 논쟁에 나섰을 때, 모든 당사자는 논의의 핵심이 단일한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관한 것이며, 교회의 통일성이 공통된 전제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칼빈이 자신의 저술 서문을 당대의 통치자들에게 헌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교회의 통일성과 참된 예배의 수호 및 회복이 중요한 문제였으며, 따라서 통치자들과 왕들에게 이를 호소해야 했다. 칼빈에게 참된 종교의 상태는 사회 전체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으며, 따라서 이는 통치자와 왕에게도 중대한 관심사가 되었다.간단히 말해, 종교개혁을 옹호하는 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교회의 개혁은 비상 조치(emergency measure)였다. 개신교는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존재이며, 본래 이전과 본질적으로 다른 토대를 가진 새로운 신앙고백을 세우려는 의도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역사적 판단은 오늘날 개혁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한 의미를 함축한다. 즉, 개혁 교회 역시 자신을 비상 조치로 간주해야 한다.

이러한 비상 조치의 한 가지 특징은 그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필요한 조치라는 점이다. 그 자체의 일시성은 언젠가 비상 조치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 때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킨다.

전환과 개종(Transitions and Conversions)

역사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로의 회귀가 빈번했던 시기가 있었다. 존 칼빈의 가장 가까운 지인들 중 일부도 결국 가톨릭 교회로 돌아갔으며, 그중에는 그의 친구 루이 뒤 틸레(Louis du Tillet)와 후에 칼빈과 파렐을 삼위일체에 대한 견해로 비판했던 피에르 카롤리(Pierre Caroli)도 포함되었다. 당시에는 종교적 경계선이 아직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로마 가톨릭과 개혁 교회 사이의 경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었으며, 때로는 정치적 결정, 권력 문제, 개인적 실망 등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기도 했다. 이러한 경계선이 확고해진 것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Peace of Westphalia) 또는 뮌스터 조약(Peace of Münster) 이후였다. 이 조약은 결국 80년 전쟁(Eighty Years' War)을 종식시키고, 분열된 유럽의 종교적 경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은 로마 가톨릭으로의 전환(transitions) 또는 개종(conversions)의 역사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시기를 형성했다. 당시 나폴레옹은 교황의 권력을 약화시켰으며, 바티칸은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동안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과 도덕적 영향력은 급속히 성장했다. 이 맥락에서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 1801-1890)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성공회 성직자였던 뉴먼은 점진적으로 가톨릭 교회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특히 교리 발전의 연속성(continuity of the development of doctrine)이라는 개념이 그를 설득하여 이 전통에 합류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개종의 물결, 혹은 보다 정확히 말해 로마 가톨릭 교회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역사학자 H. 반 데르 린데(H. van der Linde, 1915-2008)는 그 대표적인 예 중 하나다. 또 다른 예는 로널드 베어(Ronald Bär, 1928)이다. 그는 네덜란드 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 소속으로 위트레흐트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 1959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사제가 되었다. 그는 한때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주교가 필요했다." 이후 필립 베어(Philip Bär) 자신이 주교가 되었다. 또한 철학자이자 플라톤 철학 전문가였던 코르넬리아 데 보겔(Cornelia de Vogel, 1905-1986)도 유명한 사례 중 하나다. 그녀는 비교적 자유주의적 개신교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플라톤주의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를 자신의 신앙적 본향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 맥락에서 나의 스승이자 친구였던 요하네스 코르넬리스(한스) 샤우턴(Johannes Cornelis (Hans) Schouten, 1929-2016)도 언급할 만하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신앙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나의 결혼식을 주례하였고, 나를 목회자로 서임하였으며, 우리 자녀 중 한 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 그가 몇 년 전, 80세가 되던 해에 오랜 숙고 끝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두 번째 삶을 사제로서 시작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북미에서도 유명한 개종자(converts)들의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정치인 뉴트 깅리치(Newt Gingrich, 1943년생), 작가 그레이엄 그린(Graham Greene, 1904-1991), 그리고 복음주의 가톨릭 신자로 불릴 수 있는 그룹에 속하는 리처드 존 노이하우스(Richard John Neuhaus, 1936-2009)와 에두아르도 에체베리아(Eduardo Echeverria)가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에체베리아는 살아 있는 사례이자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를 옹호하는 인물이다.

역사적 전개(Historical Developments)

로마 가톨릭 교회에 가입해야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오늘날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결코 르네상스 교황 시대와 비교할 수 없다. 당시 교황은 강력한 세속적 권력을 휘둘렀으며, 성 베드로 대성당과 같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에 소요된 비용은 막대했다. 모든 대리석 기둥은 면죄부(indulgences)의 판매를 통해 조달되었다. 당시 교회는 죄인의 구원에 대한 권한을 자신이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상황이 결국 종교개혁을 초래했으며, 교회는 큰 혼란에 휩싸였고, 그로 인해 개신교 내부에서도 수많은 분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제기한 핵심 비판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인간 사이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단지 신자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모든 보화가 담긴 거울을 발견하도록 도울 수 있을 뿐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곧잘못된 관행과 부패를 정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는 종교개혁에 대한 첫 번째이자 중요한 대응이었다. 이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 1962-1965)는 개신교 측에서 제기해 온 일부 비판을 인정하는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이에 반해, 개신교의 시각에서 볼 때 제1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 1869-1870)는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권력 상실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 공의회에서 교황이 ‘엑스 카테드라(ex cathedra, 교황좌에서)’ 발언할 때 무류성(infallibility)을 지닌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19세기 말 개혁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인 예로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가 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이를 로마 가톨릭이 삶 전체를 통제하려는 또 다른 시도로 보았다. 그들은 자연(nature)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결국 교회의 권위 아래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불신을 갖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많은 개신교인들은 다시금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는 이전과 달랐다. 이는 새로운 교리를 선포하기 위한 공의회가 아니라,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현대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 헤릿 코르넬리스 베르카우어(Gerrit Cornelis Berkouwer, 1903-1996)와, 당시 젊은 역사학자였던 하이코 아우구스티누스 오버만(Heiko Augustinus Oberman, 1930-2001)이 참관인으로 초청되었다. 공의회에서 개혁적인 조치들이 상당히 이루어졌다. 그중 중요한 변화로는 미사의 자국어(vernacular) 사용 허용이 있다. 또한, 교회가 더 이상 국가(state)로 간주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the people of God)으로서의 교회 공동체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었다. 이는 교회의 역할에 있어 중요한 변화였으며, 평신도(laity)들에게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다. 이로 인해 카리스마틱 운동(Charismatic Movement), 포콜라레(Focolare), 산 에지디오(San Egidio)와 같은 갱신 운동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성경에 대한 관심과 성경 읽기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계시에 관한 한 중요한 변화는 전통(tradition)과 성경(Bible)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함께 이해되었으며, 전통과 성경을 대립적으로 보는 관점이 명확히 배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계승(successio apostolorum) 개념의 연속성은 정통 교리의 본질적 요소로 유지되었다. 교회와 은총(grace)은 여전히 사제직(priestly office) 중심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위치는 무류성(infallibility)을 지닌 교황에게 할당되었다. 교황은 완전한 권위(plenitude of power)를 가지며, 교회의 머리로서의 위치를 유지하고 있다.

교황과 이미지

오늘날 사람들이 이 교회에 가입하도록 이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년 동안 우리는 사제들에 의한 학대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들어왔고, 이는 가톨릭 교회의 대중적 이미지가 점점 더 실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로 인해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 프란치스코의 재위가 시작된 이후 변화의 조짐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는 민중의 교황이며, 가난한 자들과 장애인들의 교황이다. 그가 대중 앞에서 연설하는 모습을 보면, 그리고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태도를 살펴보면, 그가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들, 곧 가난한 자들, 사회의 가장자리에서 살아가는 자들, 그리고 현대 사회의 병폐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의 전임자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와는 달리, 그는 학자로서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 않다. 베네딕토 16세는 경건한 학자로서 그리스도와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깊었지만, 여전히 엘리트적인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미지와는 별개로, 최근의 교황들은 모두 분명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과 실천을 견지해 왔다.

교회의 일치

로마 가톨릭교회에 가입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주교제(episcopal system)에서 주교의 역할이 교회의 일치를 공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다는 점이다. 지역적으로나 어쩌면 보편적으로도, 교회를 대표하여 발언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존재한다. 사역의 문제, 특히 주교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1982년 리마 보고서(Lima Report on Baptism, Eucharist and Ministry) 이후 개신교 신학 내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된 바 있다. 그러나 교회의 일치라는 문제에 있어서, 종교개혁으로부터 비롯된 교회들은 분명한 불리함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분파되어 있으며, 경우에 따라 완전히 분리되어 있기도 하다. 더욱이, 이러한 교단들은 종종 국가별로 조직되어 있다. 분열의 지속은 다름 아닌 하나의 병폐이다. 여기에서 질문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본질적으로 국가, 민족적 배경, 또는 언어의 경계를 따라 조직되어야 하는가? 오직 하나의 교회만이 진정한 초국가적(transnational) 교회인데, 그것이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이다. 이는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각자의 언어로 찬양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그들은 보이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하나가 된다. 개신교 교단들과 비교해보라. 심지어 복음주의와 오순절 교회들의 분열과는 더욱 비교할 수도 없다! 복음주의 교회의 분열을 풍자하는 말이 있다. “…그리고 나는 내 교회를 시작했다.” 많은 복음주의 신자들이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한 이유가 바로 이 병폐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이 병폐는 신앙과 교회 소속이 약화되고 결국 소멸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언급된 한스 샤우텐(Hans Schouten)에게 있어서도, 복음주의 세계의 이러한 분열과 왜곡된 주관주의는 그가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는 마치 넘치기 직전의 물이 마지막 한 방울로 인해 넘쳐흐르는 것과 같은 결정적 순간이었다.

권위

우리가 알다시피, 교회의 일치는 특별히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교황에게 자리하고 있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의 뤼멘 젠티움(Lumen Gentium, 1964)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자주 언급하며, 이 백성의 순례에 대해 강조한 점이나, 주교단이 교회에 대한 최고이자 완전한 권위를 가진 주체로 언급된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최종적 권위는 여전히 교황직을 정점이자 초석으로 삼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는 파스토르 에테르누스(Pastor Aeternus, 1870)라는 교황직에 관한 교의 헌장이 확증한 바와 같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가 교황직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직무'(office) 개념을 중심으로 구축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이러한 구조는 명확한 질서를 가지며, 바로 이 점에서 독특한 매력을 지닌다. 이는 대부분의 개혁교회에서 볼 수 있는 방식과는 확연히 다르다. 개혁교회에서는 직무 개념이 훨씬 덜 분명하며,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개혁교회의 권위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공식적으로는 장로들과 집사들로 이루어진 당회(consistory)에 권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그러한가? 과거에는 교회의 신앙 고백을 잘 알고 성경에 깊이 몰두한 장로들이 존재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 당시에는 당회가 실제로 권위를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 이제는 일부 교회에서만 그러하다. 실제로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많은 자유교회(free churches)와 신오순절교회(neo-Pentecostal churches)처럼 한 명의 카리스마적 목사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교회의 재정을 관리하는 위원회에 있는 것인가?

일부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주교제(episcopal model)에 대해 더 우호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아브라함 반 더 베이크(Abraham van de Beek)는 그의 교회론 저서에서 성경적으로 볼 때, 직무(office)의 개념은 신조(credo)나 신앙 고백(creed)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이미 존재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한다. 이는 심지어 성경이 정경(canon)으로 확립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즉, 교회가 존재했고, 신조와 정경이 정립되기 오래전에 이미 주교들이 있었다. 사도 교부들의 저술에서도 신자들은 자신들의 주교에게 귀를 기울이도록 권고받고 있다. 개혁교회에서도 직무는 하나님께서 회중(congregation)의 대면자(Gegenüber, '대조되는 존재' 또는 '마주 선 존재')로서 부여하신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핵심적인 논점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대리성(representation of Christ)이다. 목회자가 설교를 전할 때나 성만찬(Holy Supper)을 집례할 때, 그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가? 바르트주의 신학자들(Barthian theologians)은 이에 대해 대체로 강하게 반대한다. 그러나 반 더 베이크(Van de Beek)는 직무(office)의 핵심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성에 있다고 보는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그의 견해에 따르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직무를 맡은 개인이 아니라, 말씀 사역과 성례전(Sacrament)의 사역이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에서도 이러한 권위는 교회의 권징(discipline)과 성찬에 대한 접근(access to the eucharist)과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반 더 베이크는 주교직(office of the bishop)의 회복과 재평가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다른 장로(elder)들과 집사(deacon)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개혁 전통에서 장로와 집사는 변화하는 근대 초기 문화 속에서 코르푸스 크리스티아눔(corpus Christianum, ‘기독교 공동체’)을 유지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장로직이 점점 공허해지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공의회적-장로적-주교적(conciliar-presbyterial-episcopal) 모델을 제안한다. 즉, 개인적인 책임을 지니면서도, 다른 이들과 협력하여 교회를 그리스도 가까이 유지하는 지도체제를 주장하는 것이다.

은혜의 객관성

물론, 앞서 언급된 로마 가톨릭교회에 가입하는 이유들은 본질적인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심각한 논점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즉, 종교개혁이 단지 하나의 긴급 조치(emergency measure)였으며, 그것이 필요했던 시대는 지나갔다는 것을 설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심도 있게 재고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교회의 고백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의 성취로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완성하신 최종적이고 마지막 말씀이시다. 그는 제2의 아담이시며,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선물이며, 우리가 신앙으로 고백하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다. 그는 그의 인성(humanity) 안에서 객관적인 선물(the objective Gift)이며, 하나님의 모든 은혜의 보화가 저장된 분이시다. 바로 이 선물을 그리스도께서는 성찬(Holy Communion, Holy Supper, Eucharist)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그는 이 예식 안에서 참으로 현존하신다(praesentia realis, 실재적 현존). 여기에서 중요한 논점은,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실재적 현존을 믿는가, 아니면 단순한 상징적 개념을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 개혁주의 신학자들 간에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다.

19세기 미국의 존 W. 네빈(John W. Nevin)뿐만 아니라, 현대의 여러 학자들과 함께 우리는 칼뱅(Calvin)이 이 문제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입장을 표현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논의하는 상대에 따라 다르게 설명했으며, 때로는 취리히(스빙글리 전통) 쪽으로, 때로는 비텐베르크(루터 전통) 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 다소 불확실한 입장을 취했으며, 그 점에서 오히려 보다 가톨릭적인 경험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흘러나오는 영원한 생명의 능력(virtus) 안에 자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거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소한 그가 주장한 바는, 성령께서 이 간극을 메우신다는 점이었다. 여기에서 은혜는 감각으로 체험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성령을 통해 매개되며 영적으로(spiritualiter) 체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객관성을 통해 드러나는 실재적 체험이다. 최근 프랑크 에베르숨로데(Frank Ewerszumrode)는 신중한 평가를 통해, 칼뱅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화체설(transubstantiation)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다른 개념적 틀 안에서 변호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은혜의 객관성(objectivity)에 대한 질문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그 객관성이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마주하게 된다. 칼뱅의 사상에서 은혜는 믿음을 통해(received by faith) 받아들여진다. 만일 믿음이 없다면, 즉 겸손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어 받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성찬 후에 남겨진 빵과 포도주는 아무 의미가 없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몸을 보존하는 것(reservatio)도 없으며, 거룩한 빵과 포도주를 보관하는 성합(tabernacle)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혁주의 입장은 결국 주관적(subjective)으로 치우쳐 있으며, 은혜의 객관성을 훼손하고 있는 것인가? 즉, 주관주의(subjectivism)가 개입되어, 은혜의 수용이 인간 주체(human subject)에 의존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이러한 비판은 많은 가톨릭 신학자들이 제기하는 우려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객관성이란 무엇인가? 로마 가톨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가시성(visibility of God’s grace)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 종교적 실천에서 나타나는 매력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이러한 강조점은 가톨릭 교회의 교리 속에서도 반영되고 개념화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가시성이 오히려 가톨릭교회에 가입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하나님의 신적 충만(the fullness of God’s divinity)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살아 역사하신다. 이에 대해, 레오 13세(Leo XIII)가 1897년에 발표한 회칙 Divinum Illud Munus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명확한 언어로 정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마지막 약속이 성취되었으니, 곧 그의 숨결로 성령을 보내어 완성된 교리를 받아들이게 하고, 다시 말해 그 진리의 보고(寶庫, deposit)를 인봉(印封)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령의 이러한 부어주심(outpouring of the Spirit)의 결과로, 교회는 "어떠한 오류에도 빠지지 않게 될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신적 사역(divine work), 즉 ‘완전한 신적 작품’(opus plane divinum)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Head of the Church)이시며, 성령께서는 교회의 영혼(the soul of the Church)이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에서는 교회 제도(institution of the Church)와의 강한 연관성이 약간의 변화를 겪었다. 이는 뤼멘 젠티움(Lumen Gentium)의 원문 일부가 수정되면서 나타났다. 원래 문구에서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곧 가톨릭교회이다(est)”라고 명확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종 판에서는 이 문장이 유명한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변경되었다. "Haec ecclesia … subsistit in Ecclesia catholica." (이 교회는 가톨릭교회 안에 존속한다.) 이것은 적어도 차별화(differentiation)를 의미하지만, 두 개념이 완전히 분리(separation)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하여 몸(body)과 영혼(soul)의 비유가 사용된다. 개혁주의 신학자 G.C. 베르카우어(Berkouwer)는 이에 대해, 이와 같은 표현이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 안에서도 성령의 은사를 인정할 여지를 제공한다고 언급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뤼멘 젠티움에 따르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지상에서의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완전한 실현(most perfect realization)이며, 개신교 교회들은 결코 그 완전한 실현에 도달할 수 없는 불완전한 형태(imperfect realizations)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뤼멘 젠티움(Lumen Gentium)은 다시 한 번 교황이 지상에서의 그리스도 교회의 머리(Head of the Church of Christ on earth)로서 지닌 가시적인 위치를 강조하며, 이를 구체화한다. 이 문서는 주교단(order of bishops)이 권위를 갖지만, 이는 로마의 주교(bishop of Rome)와 함께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즉, 교황은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로서, 최고 보편적 권위(supreme and universal authority)를 가지며, 이를 언제든지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 또한, 제1차 바티칸 공의회(First Vatican Council)에서 교황의 수위권(primacy of the pope)이 무류성(infallibility)의 개념으로 명확히 규정되었던 결정들이 이 문서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왜 로마 가톨릭교회에 참여하지 않는가?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반 더 베이크(Van de Beek)는 개혁교회가 교회의 직무(ecclesiastical office)에 대한 관점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가 그리스도와의 공동체를 유지할 책임을 지닌 직무를 필요로 하며, 이는 필연적으로 계층적 구조(hierarchical structure)를 포함할 것이라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이는 칼뱅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결국, 목회자(minister)는 본래 주교(episcopus)이다. 그러나 제네바에서 주교와 사보이 공작(duke of Savoy)의 세속적 권력을 제거함으로써, 기존의 군주적 모델(monarchical model)은 장로와 목사들의 공동체가 책임을 맡고 주교를 대체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반 더 베이크는 성경이나 초대교회 어디에서도 베드로가 로마좌(See of Rome)의 수위권(primacy) 개념처럼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한 적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교황제도(papacy) 자체가 교회의 일치(unity of the church)를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결론짓는다. 즉, 교회의 공식적 구조는 신앙고백의 본질적 기준(status confessionis)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세계 교회(the worldwide church)가 로마의 지도력과 교회의 일치를 포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주교제(episcopal structure)의 회복을 주장하면서, 그렇게 한다면 로마 교회(Church of Rome)가 조정 기능(coordinating function)을 맡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러한 변화는 교회 전체가 함께 이루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강조한다.

왜 로마 가톨릭교회에 참여하지 않는가?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이유는 당시 교회의 상태였다. 직무(authority of the office)와 주교직(episcopacy)이 권력 남용으로 인해 타락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와 그의 은혜에 대한 접근(access to Christ and his grace)이 차단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특히 바르트 신학(Barthian theology)의 영향권 내에서는, 성령(Holy Spirit)이 직무 수행자(office bearer)나 교회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는 신학에 대한 경고가 자주 제기된다. 이러한 신학은 권위와 권력의 남용을 초래할 위험이 있으며, 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애물이 된다. 교회 직무를 높게 평가하는(high view of the office) 태도는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이 교회의 종(servants of the church)들의 행동으로 인해 오염되고 조롱거리가 될 위험을 수반한다. 그러나 교회의 종들은 여전히 인간일 뿐이다. 성령은 결코 직무 수행자들이나 교회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르게 된다. 목회자들은 안수를 받을 때 축복(blessing)을 받으며, 이는 그들이 성령의 약속 아래에서 살아가고 사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객관성(objectivity)은 바로 성령의 약속과 사역의 객관성이다. 그러나 이 성령은 결코 사제나 목회자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 이 약속은 그 자체로 남아 있으며, 그 성취는 언제나 교회의 유일한 머리이신(real Head of the Church) 그리스도께 순종하라는 명령 아래에 있다. 지상에서 그의 종(servants)들은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편견을 지니고 있으며, 불순종과 죄의 유혹에 쉽게 노출될 수 있다.

우리는 약속을 가지고 있으며, 축복을 받으며, 또한 특별한 명령과 임무를 받은 사람들(따라서 특별한 권위를 지닌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의 약속 아래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들이 아니다. 이 점은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당회(consistory)가 일종의 주교직(episcopacy) 역할을 해야 한다면, 도덕 검증(censura morum)과 교회 간 상호 방문(mutual visitation)을 실질적인 상담(real counseling)의 형태로 도입해야 한다. 더 나아가, 개별 교회들이 종종 문제를 은폐한 채 뒤늦게 표면화되는 상황에서 고통받는 현실을 고려할 때, 주교제(episcopal model)를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직무(view on office)에 대해 가진 관점처럼, 우리가 성령(Holy Spirit)을 특정한 위치에 두고 객관화(objectify)할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에 초청받았을 때 칼 바르트가 던진 한 가지 질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그는 여러 고위 성직자들과 만남을 가졌고, 훗날 교황이 된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가 교회에 대해 길고도 놀라운 방식으로 연설했다. 라칭거가 오랫동안 교회에 대해 설명한 후, 바르트는 다음과 같이 반응했다. "우리는 개신교인으로서, 이 풍요로움과 비교할 때 너무도 빈약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적어도 명확하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가톨릭 전통에서는 교회의 역할이 그렇게 압도적으로 강조됩니까? 혹시, 이는 성령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닙니까? 나의 친애하는 라칭거 교수님, 어쩌면 당신의 교회는 실상 성령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에버하르트 부쉬(Eberhard Busch)에 따르면, 이 질문은 동시에 당혹스러우면서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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