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참으로 눈물을 짓지않고 이 책을 끝까지 읽기는 어려울 것 같다.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소설이라는 것이 더욱 가슴 아팠다.  내가 7살 이후 끊임없이 던져온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내 가슴에 큰 구멍을 만들었다.

결국은 조연의 죄없음, 아니 사형까지 이끌고 갈 만한 죄가 아님이 밝혀지는 전통적인 신파가 조금은 아쉬운 부분이었으나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정말 살인마라 할 인간이 최대의 선을 보여주며 삶을 마감하는 것은 더욱 완성도를 떨어뜨렸을 것이다.

윤수의 가식과 고뇌로 점철된 삶이 경솔함과 분노의 삭힘과정의 연속인 문유정의 삶과 나란히 투영되면서 내가 한 번 쯤은 느꼈고 생각했던 삶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렇다.  윤수의 말처럼 그냥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큼 어려운 것이 없다.

만일 문유정이 윤수를 어떻게든 만들려고 했다면......

정말 죽음이란 것이 다가오면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 것인가?  나날이 쇠약해지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부쩍 커진 아이들을 보면서 불안하고 무서워진다.  죽음?  그것은 이별의 완성일까?  어릴적 성당의 교리 선생님은 죽으면 천국에 가서 행복하게 영원히 산다고 했는데, 그 행복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죽었다 살아온 사람들의 묘사 중에 천국을 그린 것이 많다.  하얀 성모님과 천사, 성인들이 끝도 없이 펼쳐진 잔디를 밟으며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다.  그럼 성모님, 천사, 성인들과 푸른 잔디를 걷는 것이 행복인가?  이 생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누렸던 그 많은 행복은 행복이 아니란 말인가?  이 생에서 사랑했던 사람들과 헤어져도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죽음이 슬픈 진정한 이유는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이별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문모니카 수녀님의 죽음과 그 죽음을 기도로 완성하는 대목은 마지막 남은 눈물마저 끌어올리고 있다.  문유정에게 빨리 가도록 기도해 달라는 모니카 수녀님의 부탁과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주신 적이 없는 문유정의 기도.  불교의 인신공양처럼 모니카 수녀님의 죽음으로 문유정의 기도에 힘이 실리는 예정된 귀결.  결국 윤수의 죽음을 통해 새로이 빛을 볼 수 있는 수혜자가 나오듯이 모니카 수녀님의 죽음으로 향상된 기도력을 보여주는 문유정은 누군가 말했던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책은 항상 나의 망각과 무책임을 돌아보게 한다.  나의 어린시절 꿈은 이미 퇴색하고 낙엽으로 땅에서 지고 말았다.  너무나 쉽게 성을 사고 파는 현대, 사고 파는 것이 지나쳐서 이제는 나눠갖는 시대까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현대의 성의식이 엄연히 존재를 함에도 역시 강간과 윤간을 당한 여성에게 있어서 성은 극복해야 하는 죽음과도 같은 과제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문유정의 사형선고는 15세 소녀 때 이미 이뤄졌다.  그리고 그 '형집행'은 20년이나 미뤄졌다가 윤수의 집행과 함께 이뤄진 것이다.  15세의 성숙해 가는 몸으로 겪은 짓밟힘은 결국 한 인간이 죽음에 이른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죽음을 화려하게 맞이하는 윤수의 마지막 위에 15세 문유정의 죽은 영혼도 함께 침잠시켜 버렸다.

결국 윤수의 사형집행이 있기 전까지 문유정과 모니카 수녀님, 그리고 이주임은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이 아닐까?

죽음은 숭고하지도 않고, 그 어떤 것보다도 높은 완성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죽음을 맞는 개인의 반성과 용서, 그리고 솔직한 이해로부터 진정 죽음의 의미는 정의되는 것이다.

아름다운 죽음도, 행복한 시간도 한 자연인의 순수한 아름다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카타르시스와 척박한 가슴에 따사로운 훈기를 불어넣어 준 공지영 작가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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