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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 - 독서의 즐거움
정제원 지음 / 베이직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나는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내가 모르는 내 어린 시절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엄마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한글을 깨우치기 이전인 네다섯 살 무렵부터 엄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졸랐단다. 동생이 인형놀이를 할 때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서 전래동화집을 읽었고, 시험기간에 시험공부는 안 하고 사촌언니에게 물려받은 50권짜리 세계문학전집을 읽었다. (물론 이게 잘한 행동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그 후에는 셜록 홈즈를 발단으로 추리문학에 매료되어 해문출판사가 출간한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을 다섯 권 빼고 전부 모았다. 나머지 다섯 권은 헌책방을 뒤져 구판으로 구입할 계획이다. 언젠가는.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편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 몇 년간은 추리문학에 빠져서 다른 분야의 책을 거의 읽지 않았고,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아도 문학과 한국사 외에는 섭렵한 분야가 없다. 특히 인문분야의 독서는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입맛에 맞는 음식만 먹는 편식이 몸 건강에 해롭듯, 내 취향에 맞는 책만 골라 읽는 편독도 정신 건강에 해롭다. 이래서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텅 빈 '깡통 지성인'으로 한평생을 살겠다는 위기감에, 2008년부터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구입해 읽고 있다. 경제, 정치, 교양, 비평, 에세이 등등. 읽다가 중간에 덮어 버린 책도 있지만 대부분은 충분히 만족할만한 수준이어서, 내가 비록 편독은 했어도 책을 고르는 눈이 나쁘진 않구나, 혼자 생각 중이다.
그런데 지난 8월말에 구입한 다섯 권의 책 중 한 권인 이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를 읽고 나니 내가 갈 길이 얼마나 멀고 또 먼지, 새삼 뼛속까지 와 닿는다. 나름대로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하기 위해 노력하는데도 철학과 과학에는 눈도 돌리지 않다니! 일반 서점에서 '교양'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교양인이 되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내가 생각한 다양한 분야라는 것이 한 테두리 안의 또다른 테두리였음을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독자들이 철학과 과학처럼 훌륭한 작가와 작품이 넘치는 분야를 외면하는 현상을 저자 역시 우려 어린 목소리로 지적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은 서로 접촉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왔는데 학자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단단한 벽돌로 높은 담을 쌓고 그 안에 칩거하면서 일반 대중에게 '학문은 어렵고 복잡해서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분야가 철학, 과학, 의학, 법학 등으로 한국에서는 이 분야의 권위자를 사회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떠받든다. 머리 싸매고 죽도록 공부해서 정복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분야의 책을 일반 대중이 즐겨 읽을 리가 없다. 그리고 나도 그 우매한 대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저자는 의학이나 법학은 어떤지 몰라도 철학과 과학은 결코 사람이 외면해서는 안 되는 분야이며 알고 보면 그리 어렵지도 않고 복잡하지도 않다고 말한다. 물론 깊이 파고들려면 엄청난 노력을 요하는 분야지만 그것은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나 필요한 노력이다. 교양으로서의 철학과 과학에 단계별로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과 작가는 무궁무진하다. 안 찾아봤고 안 읽어봤기 때문에 모를 뿐이다. 일반교양 수준의 철학으로도 깊이 있는 사색과 사유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교양으로서의 과학은 인간의 끝없는 지적 탐구심과 지식욕을 채워주는 보물이다. 내가 책을 읽으면서, 또 살면서 항상 드는 궁금증이 '이 사람(혹은 저 사람)은 이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데 나는 왜 잘 모를까?'인데, 아마도 인문학 분야의 독서와 탐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역시 편독의 폐해다.
아무튼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는 꽤 훌륭한 독서 길잡이다. 저자는 이제부터 독서가로 성장하려고 하는 사람을 위해 쓴 책이라고 했지만 나처럼 책 좀 읽었다고 자부하는 사람에게도 유익하다.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자만해 있었는지 알게 해주니 말이다. 챕터마다 저자 본인이 독서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를 부여하고 그 주제에 알맞는 책을 골라서 소개한 형식이라, 책장 한켠에 꽂아두고서 생각날 때마다 또는 필요할 때마다 뽑아서 읽기에 좋다. 두께도 적당하고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할 필요도 없으니 문학작품에 비해 부담도 덜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저자가 선택한 책 설명에 따라붙는 '또 다른 책들'의 목록이다. 저자가 고른 책만 소개한 것이 아니라 그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은 또 다른 책에 대한 언급이 많다. 말 그대로 '책 속의 책'이다. 이처럼 책의 저자가 소개한 '책 속의 책'을 읽으면 내가 부러워한 저자의 지식과 교양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궁무진한 깊이와 넓이의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다.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의 저자인 정제원처럼 다독가로 유명한 사람들도 다 그렇게 해서 다독가가 된 것이리라.
하지만 책띠는 유심히 보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책띠에 인쇄된 저자의 약력 중 '일주일에 1권 이상 책 읽기'를 가장 혐오한다는 구절이 있는데, 정제원이라는 작가를 익히 아는 사람이라면 상관없겠으나 나처럼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로 정제원을 처음 접한 사람은 무슨 의미인지 얼른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짐작으로는 책을 너무 빨리 읽는 것을 경계한다는 뜻이 아닌가 싶은데, 일주일에 1권 이상 읽는 게 빠른 속도인가? 만화책 한 권을 한 시간 가까이 그림을 구석구석 살펴가며 보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데. 다양한 분야의 책을 많이 읽어 진정한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책을 쓴 사람이 일주일에 1권 이상 책 읽기를 '혐오'한다니, 나름 역설인 모양인데 배배 꼬이기만 했지 효과는 전혀 없다. 아무튼 이 책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랄 수 있는 저자 약력 소개는 전체적으로 뭔가 '쿨해 보이려고' 애쓴 인상이라 별로다. 정제원이라는 작가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의 다른 저작을 보거나 인터넷에서 검색하는 게 더 좋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