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가 된 인간 - 나는 어떻게 인간의 삶으로부터 자유로워졌는가
토머스 트웨이츠 지음, 황성원 옮김 / 책세상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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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하루>였으면 좋겠어. 어느 날인가 어린 조카가 대뜸 말했다. 하루는 학원 안 가도 되고 누나 심부름 안 해도 되고 똥을 싸도 칭찬 받고... 하루는 내 반려견이다. 개가 되고 싶다는 아이는 개집 안에 몸을 옹그리고 있어도 보고 개 짖는 소리를 흉내내기도 했지만 끝내 개가 될 수는 없었다.

  

   사람이 사자 인간이나 들소 인간, 새 인간(내 경우에는 염소인간)이 된다는 상상을 처음으로 했던 때가 실제로 언제였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지만 동굴 그림과 작은 조각상들은 유사 시대 이전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품었던 믿음(‘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나’, ‘나는 어디

로 가고 있나같은 영원한 질문에 답하기 위한 인류 최초의 시도들)을 상징하므로, 어쩌면 사람들은 아테네의 말처럼 항상은 아닐지라도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인간과 다른 동물 간의 차이를 메우려고 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정말 염소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수준인 거다. 사실 역사적으로 말해서 염소가 되고 싶지 않은 게 더 이상할 정도다. (51)

 

   우리는 이미 인간이고, 인간의 삶은 여러 모로 고단해서 막연히 다른 삶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그 <다른 삶>에 대한 상상이란 것도 대개 인간적 조건을 넘어서지 못한다. 학원 안 가도 되고 누나 심부름 안 해도 되는, 지금과는 다른 생활을 꿈꿨을 뿐 진짜 개의 삶(사료를 먹고 배변판에 똥을 싸고 말하는 대신 컹컹 짖으면서 맨발로 흙길을 뛰어다니는)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바라지도 않았을 어린 조카처럼 말이다. 설령 인간적 조건을 내던지고 숫제 개(물고기나 새 코끼리 아니면 염소... 인간 아닌 무엇이라도)의 삶을 희구하더라도 그게 가능하기나 할까. 가능성이 있더라도 실제로 그런 삶에 뛰어들 사람이……,

 

   아테네는 코끼리가 되려는 내 노력은 그녀의 직설적인 표현에 따르면 멍청한짓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이었다. 멍청한 짓이라. 나는 맥이 빠졌다. “, 왜요?” 내가 물었다. “, 코끼리로 뭘 하려고요? 아무것도 못해요. 코끼리는 당신이 관계 맺고 있는 환경과는 완전히 이질적이에요. 당신이 아프리카 부시먼이면 상관없어요. 코끼리가 가능할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부시먼이 아니라 런던 사람이잖아요. 당신은 당신과 환경을, 그러니까 살고 있는 장소와 지나다니는 장소들을 당신과 공유하고 있는, 친숙한 동물에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요.” “그렇지만 영국에도 코끼리가 있어요. 동물원에 말이에요.” 난 이렇게 항변했다. 그녀는 내가 잡은 코투리를 묵살했다. “거기에 있는 코끼리들은 다 미쳤잖아요.” (36)

 

   그런 사람이, 여기 있다.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 토머스 트웨이츠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미 5년 전에 <토스터 프로젝트>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그가 이번에는 염소가 되기로 결심했다. 염소 떼에 섞여 풀을 뜯고 네 다리로 알프스를 넘겠다는 것이다. 황당하고 장난스러워 보이지만 연구 목표는 매우 심오하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일종의 <휴가>라고 표현한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인간으로서의 삶을 떠나 근심 걱정 없는 초식동물의 삶을 잠시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한데, 하고 많은 동물 중에 염소일까. 애초에 그는 코끼리가 되려고 했다. 거대하지만 단순해 보이는 코끼리의 몸 구조와 풀이나 뜯으면서 어슬렁거리는 생태적 특성 같은 것이 프로젝트를 시도하는 데 수월할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코끼리의 거대한 몸통과 움직이는 코를 인간의 몸으로 구현하는 데 여러 제약이 있었다. 그보다도 근원적인 문제는 또 있었다. 가족을 이루어 생활하고 동족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픔과 우울, 성격 장애에 시달리기도 하는 코끼리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인간의 실존적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프로젝트의 목표에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주술사를 찾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저는 당신이 제 내면의 동물을 만날 수 있도록 저를 영혼의 세계로 보내주셨으면 해요.> (...) 그렇게 그는 염소가 되기로 했다.

 

   아아아, 염소의 삶. 그것은 풀밭으로 걸어가 5분 정도 먹는 행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 다음 다른 풀밭으로 가서 먹고, 다시 다른 데로 가서 먹고. 나는 여러 풀 종류의 미묘한 차이를 배우기 시작했다. 청록색 풀은 쓴 맛이 났지만 짙은 초록색 풀은 달고 훨씬 먹을 만했다. 씹고, 씹고, 씹고. 그런 다음에 씹은 풀을 내 몸통에 끈으로 매달아놓은 인공 반추위 가방에 달린 관에 뱉어 넣는다. 그러고 새 풀밭으로 걸어간다. (257)

 

   염소가 된다는 건 어떤 것일까. 평범한(?) 인간이 염소가 되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예상 외로 전문적이고 심도 있게 염소의 삶에 접근하고 있다.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해 염소의 정신 상태를 체험해보겠다고 할 때는 경탄했다. 보통 일이 아니다 싶었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정말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동물행동학자, 수의사, 신경과학자, 의수족 제작자 등 프로젝트에 동원된 인력만 해도 엄청나다. 염소 사체를 해부하고 염소의 외골격을 장착하고 네 다리로 걷는 연습을 하는 등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 마침내 염소가 되어 알프스를 넘는 염소인간의 모습은 마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애처로움을 자아내는 한편 인간 조건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지고 있다.

 

   세프와 리타는 이날 벌어진 일들의 목적에 대해 당연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하면서 이 일이 인간으로서의 근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이야기했다. “당신은 도시 출신이잖아요.” 세프가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미친 거예요. 여기 산 위에선 그런 미친 생각이 필요하지 않을걸요.” (272)

 

   책에는 프로젝트 과정을 담은 적나라한 사진이 여러 장 실려 있다. 염소 가죽을 벗기고 울퉁불퉁한 내장을 움켜쥘 때나 염소목장주가 염소방울을 목에 채워줄 때, 네 다리로 서서 풀을 뜯을 때조차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염소인간의 진지한 태도는 정말 장난이 아니다. 장난 아니게 웃기다. 어디서 이런 기이한 광경을 구경이나 하겠나. 남이야 웃든 말든 자못 심각한 염소인간은 네 다리로 서서 풀을 뜯으며 (참으로 힘겹게) 묻고 있다. 인간적인 환경을 벗어난다면 우리를 괴롭히는 실존적 괴로움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을까. 염소농장주의 말처럼 염소인간 프로젝트는 도시적인 삶에 지친 한 인간의 미친 짓으로만 비춰질까. 누구나 상상에 그쳤던 그 미친 짓을 몸소 실행해 보인 염소인간이 내심 부러운 건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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