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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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베라는 남자>로 전세계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프레드릭 배크만의 후속작이다. <오베라는 남자>는 사회성이 부족한 중년 남성 오베가 이웃과 융화되어 가는 과정을 작가 특유의 유머 감각과 온정적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이다. 이번 작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저마다의 상처를 보듬고 살던 소외된 사람들이 특별한 계기를 통해 마음의 빗장을 여는 과정을 일곱 살 소녀의 시점에서 풀어낸다.

 

      잠시 후에 교장선생님이 남자아이와 엘사에게 서로 악수하고 사과하라고 하자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 “엘사는 도대체 뭣 때문에 사과해야 되는 거요?” 교장선생님은 엘사가 남자애를 도발했으니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남자애는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는 아이라고 했다. 바로 그때 할머니가 지구본을 집어서 교장선생님에게 던지려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엄마가 할머니의 팔을 붙잡는 바람에 지구본이 컴퓨터에 부딪쳐서 모니터가 박살 났다. “당신이 날 도발했잖아!” 할머니는 엄마에게 잡혀 복도로 끌려 나가면서 교장선생님에게 고함을 질렀다. “나는 감정 조절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99)

 

     주인공 소녀 엘사는 여느 일곱 살 아이와는 조금 다르다. 어른들의 말을 자르고 맞춤법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것도 모자라 빨간펜을 들고 다니면서 도로 간판이나 식당 메뉴판의 언어적 오류를 직접 수정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엘사의 마음속에도 보이지 않는 빨간펜 같은 것이 있어서 엘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일정한 규칙을 부여한다. 엘사와는 반대로 일흔일곱의 외할머니는 마치 세상의 규칙을 깨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할머니는 모노폴리 게임을 할 때 속임수를 쓰고> <르노 승용차로 버스 전용 차로를 달리며> <이케아에 가면 노란색 쇼핑백을 슬쩍하고> <공항에서 수하물을 찾을 때 안전선 밖으로 나와 서 있지 않>으며 <일을 볼 땐 화장실 문을 닫지 않는다>. 청결과 질서에 집착하는 이웃의 현관문에 피자 조각을 걸어놓는가 하면 한껏 치장한 이웃의 고급 원피스에 페인트총을 쏘면서 즐거워한다. 자기만의 틀에 갇힌 외톨이 소녀 엘사에게 그런 할머니는 천하무적 <슈퍼 히어로>이다. 이 멋진 할머니는 엘사에게 상상 속 동화 나라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세계의 다양성과 열린 마음으로 이웃을 포용하는 지혜를 일깨워 준다.

 

    현실 세계 속 사람들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면 슬픔과 상실감과 심장이 아리는 고통이 시간이 지나면 차츰 가시겠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슬픔과 상실감은 변함이 없는데, 그걸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느 누가 버틸 수 있을까. 슬픔으로 마비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결국 슬픔을 가방에 넣어서 두고 올 만한 장소를 찾아 나선다. 그런 장소가 바로 미플로리스다. 슬픔으로 가득한 큼지막한 짐을 질질 끌며 사방에서 나그네들이 한 명씩 천천히 걸어오는 곳. 가져온 짐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곳. (330~331)

 

     죽음을 앞둔 할머니가 세상과 불화하는 손녀에게 남기는 특별하고 가슴 찡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은 <오베라는 남자>의 동화 버전이라고 봐도 되겠다. 현실 세계(어른의 세계)와 동화 속 세계(아이의 세계)의 이야기가 대립하거나 포개지면서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이야기의 명암을 부각시킨다. <깰락말락나라> <미플로리스> <미아우다카스><미레바스><미모바스><미바탈로스><미아마스> <워스> <울프하트> 같은 재미있고 이상한 이름들이 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쏟아지는데 처음에는 혼란스럽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다. 엘사의 표현에 따르면 <고품격 문학작품을 충분히 읽은 사람에겐 복잡한 문제도 아니지만> 말이다.

 

    “왜 전기면도기를 엉뚱한 서랍에 넣었어요?”“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엘사가 보기에 무슨 소리인지 빤히 아는 눈치인데도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켄트 아저씨가 원래 첫 번째 서랍에 두지 않느냐고 하니까 아줌마는 원래 두 번째 서랍에 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저씨가 나가니까 이번에는 세 번째 서랍에 넣었잖아요.” “그래, 그래. 내가 아마 그랬을 거야. 아마도 그랬겠지.”“ 왜 그랬어요?”“그이가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면 좋으니까.” (440)

 

    또 다른 버전의 <오베>들이 이 소설에는 여럿 등장한다. 이웃의 원성에도 아랑곳없이 자기만의 원칙을 내세우는 브릿마리, 전쟁에서 얻은 끔찍한 상흔 때문에 강박적이고 페쇄적인 삶을 사는 울프 하트,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고 단절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생활을 하는 여자 등 오랜 슬픔의 그림자가 점령한 <미플로리스>(슬퍼하다라는 뜻) 주민들에 대한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프레드릭 배크만이 전작에서 보여준 오베식 까칠한 유머 감각과 가독성 좋은 간결체 문장도 다시 한 번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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