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
노바이올렛 불라와요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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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짐바브웨 출신의 젊은 작가가 쓴 이 소설에는 과연 <새 이름>이 필요해 보이는 아이들이 등장한다. 배스터드Bastard 갓노즈Godknows 심지어는 그 의미조차 모호한 치포Chipo 스브호Sbho 같은 이름들은 영국 식민지 시대의 잔재를 그대로 보여준다. 졸지에 나라를 잃고 어리둥절해진 부모들이 잠꼬대처럼 이상한 영국식 이름들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갓노즈, 배스터드 같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독립 이전에 태어난 열 살 소녀 달링Darling​의 특별한 성장담으로 읽히는 이 소설에는 짐바브웨의 역사와 참담한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해방이다 자유다 기쁨도 잠시 무가베 정권의 장기 독재로 다시금 혼란과 절망의 시절을 겪는 짐바브웨 사람들의 목소리가 살아 있다.

    그들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기억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 자신의 기억,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기억. 한 나라의 기억. (본문 중에서)

   ​   정권 탄압과 내란으로 쫓기듯 떠나온 사람들이 모여드는 작은 마을 패러다이스paradise는 그 이름과는 달리 가난과 근친상간, 에이즈, 크고 작은 내란이 끊이지 않는 지옥 같은 곳이다. 폭력과 부조리, 극심한 굶주림 속에서 아이들은 어른의 폭력과 전쟁의 역사를 놀이로써 답습한다. 여러 개로 나눈 땅바닥에 나라 이름을 써놓고 이긴 사람이 나라들을 차지해 나가는 짐바브웨식 땅따먹기, 상상의 트럭과 미국 총으로 서로를 쏴 죽이는 전쟁 놀이, 점점 배가 부풀어오르는 임신부 소녀 치포를 살리기 위한 병원 놀이 같은 걸 하면서 무의식적 분노와 공포를 배출하는 것이다. 달링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모습은 부조리하고 무력하다. 변화를 부르짖다 한순간 죽어나가는 혁명가, 고통을 잠재울 유일한 약이라도 된다는 듯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마을 어른들, 타국에서 돈 대신 병만 얻어 돌아온 아버지, 슬픔과 절망에 빠진 마을 사람들을 이상한 힘으로 현혹하는 사이비 교주, 패러다이스와 대비되는 부유하고 평온한 부다페스트 사람들의 삶. 달링과 그 친구들에게 마지막 희망은 저주 받은 이 나라를 떠나 희망의 땅으로 가는 것뿐이다. 노래처럼 매순간 읊조리던 그 땅. 아메리카.

     어머나, 세상에! 너희들 나라 봤어! 뉴스에 나오더라! 사람들의 입에서 부서진 벽돌처럼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올 때면 우리는 다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결국엔 눈물보가 터졌다. 우리의 미소가 스러져가는 그림자처럼 녹아내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흐느껴 울었다. 우리의 소중하고 가엾은 국가를 위해.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동정하며 말했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 이제 너희는 미국에 있잖아. (본문 중에서)

     크게 이 부로 나뉘는 이 소설은 짐바브웨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낸 달링이 마침내 꿈꾸던 아메리카에서 새로운 슬픔과 고난의 시절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나라를 등지고 떠나온 불법 체류자들의 불안한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그 수많은 이민자들이 그러했듯, 달링이 희망의 땅이라 믿어온 미국 역시 부조리와 편견에 찬 모습을 보여준다. 언제라도 바꿔 쓸 수 있는 가면이라도 되는 듯 눈 코 입을 고치는가 하면,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식사를 제한하는 알 수 없는 행동. 아프리카를 하나의 국가라고 착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의 무례한 질문들.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미국은 패러다이스가 되어주지 못한다. 힘든 노동, 저임금, 차별과 멸시, 언제 내쫓길지 모르는 불안한 나날 뿐이다. 무엇보다 이들의 가슴을 짓누르는 것은 고국을 등졌다는 죄의식과 고국을 영영 잃고 말았다는 상실감이다. 모국에 대한 향수와 죄의식 때문에 정신을 놓아버린 샤카 줄루의 모습과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개 은컨쿠의 죽음이 비탄에 사로잡힌 이들의 심정을 극단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로벨스 빵 냄새!

     네 나라도 아닌 데서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왜 미국으로 도망갔어, 달링 논쿨루레코 느칼라? 여기가 네 조국이면 떠나지 말고 여기 남아서 사랑했어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잡으면서 살았어야지. 집에 불이 나면 집을 버려? 아니면 물을 길어다가 불을 꺼? 불난 집을 떠나놓고 불이 저절로 물이 되어서 꺼지길 바라는 거야? 달링, 넌 조국을 떠났어. 불난 집을 두고 떠났다고. 그런데 네가 갖고 태어나지도 않은 그 한심한 억양으로, 너한테 어울리지도 않는 그 억양으로, 여기가 네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본문 중에서)

​     노바이올렛 블라와요는 이 작품으로 각종 문학상을 휩쓸면서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맨 부커상 최종 후보에까지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노바이올렛 블라와요가 보여준 구성력과 함축적이고 힘 있는 문장은 독자를 매혹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한 장면 한 장면이 강렬하게 각인된다.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충격적이고 압도적인 마지막 장면은 그만 책을 덮으려는 독자의 마음을 덥석 물고 늘어질 것이다. 재치 있는 언변과 블랙 유머가 무거운 분위기를 몰아내면서 가독성을 높이고 있다.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녹아 있는 자전 소설이라는 점에서 그 울림이 더 깊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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