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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의 인문학 - 같은 길을 걸어도 다른 세상을 보는 법
알렉산드라 호로비츠 지음, 박다솜 옮김 / 시드페이퍼 / 2015년 2월
평점 :
품절
단 하나의 진정한 여행은
낯선 땅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눈을 갖는 것,
다른 사람의 눈으로,
그것도 백 명이나 되는 다른 사람의 눈으로 우주를 보는 것,
그들이 저마다 보고 있으며 그들 자신이기도 한
백 가지 우주를 보는 것이리라.
. 마르셀 프루스트 Marcel Proust .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사이먼스Daniel Simons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Chirstopher Chabris는 1999년 매우 흥미로운 실험 결과를 세상에 내놓는다. 일명 '보이지 않는 고릴라'로 칭하는 이 실험에서 피험자들은 두 팀으로 나뉜 학생들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을 주시한다. 팀별로 흰색 유니폼과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서로 농구공을 패스하고 있다. 피험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흰색 유니폼을 입은 팀의 패스 수를 세는 것이다. 간단하지만 주의를 요하는 작업이다. 이 영상 중간에는 특이한 장면이 들어 있다. 고릴라 복장을 한 연기자가 패스하는 학생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장면이다. 놀랍게도 영상을 다 본 실험 참가자 중 절반 이상이 고릴라의 등장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 흥미로운 실험 결과는 선택적 집중 능력이 야기하는 시각적 맹점을 입증한다.
집중력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활용된다. 아주 복잡한 행동뿐 아니라 대수롭지 않은 행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딘가로 오가는 일, 예컨대 길을 걸어 출근하거나 가게에 가거나 학교에 가는 일은 놀라울 정도로 기억에 남지 않는다. 관심을 쏟을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애초에 집중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잊히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집중력'은 주의를 기울인 대상을 제외한 나머지 정보를 차단한다. 선택적으로 시야를 축소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보고 싶거나, 보게 될 거라 기대하는 것만 보게 된다. 심리학 용어로는 '부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부주의 맹시는 매우 일상적인 현상이다. 그 특성상 우리가 알아채지 못할 뿐이다. 살면서 우리가 간과하고 지나친 '고릴라'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다른 생각(또는 행동)에 골몰하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특정 현상 같은 것들을 알아채지 못하는 일은 다반사 아닌가.
사람은 정상적으로 발달하는 동안 집중할 수 있는 대상 전체에 집중하지 않는 법을 익힌다. 세상에는 색깔, 형태, 소리가 넘쳐나기 때문에 우리 몸의 기능을 제대로 쓰려면 그 일부를 무시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시한 세부 요소들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 (본문 중에서)
이 책에서는 일상에서 우리가 무심코 놓치고 있는 '고릴라'들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개의 사생활》의 저자이기도 한 알렉산드라 호로비츠는 개와 나선 산책길에서 이 책의 착상을 떠올린다. (생후 19개월 된 아이, 곤충박사, 지질학자,타이포그라퍼, 음향 엔지니어, 시각 장애인 등) 저마다의 관점으로 세계를 지각하는 이들을 동반한 이례적인 산책을 시도해 보자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라는 '선택적 강화selective enhancement'에 주목했다. 앞서 언급한 부주의 맹시 또는 주의력 착각, 직업적 왜곡("모든 상황을 자신의 직업적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경향", 쉽게 말해 '직업병'이다) 같은 "지각에서 어던 분야를 강화시키고 나머지를 억누르는" 현상이 모두 '선택적 강화' 에 속한다. 각자의 관점과 방식을 지닌 산책 동반자들은 보통 사람의 시선을 비껴난 삶의 또 다른 부분을 드러내 보여주는(강화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서 동물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동물을 보지 못한다. 단지 기대하는 것만으로 무언가를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면, 세상에 우리를 위한 '단서'가 숨어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시야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 책은 또 다른 버전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 같다. 흥미롭고 경이롭다. 우리의 제한된 시야가 밀어낸 세계의 반쪽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고생대의 돌들과 야생동물들, 눈앞을 스쳐가는 사람들의 병적 징후, 다양한 형태의 문자들, 크고 작은 소리, 다양한 냄새들.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보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한' 이것들, '보이지 않는 고릴라(들)'은 실로 사소해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잎사귀에 남은 특정 곤충의 흔적이나 발부리에 채이는 돌멩이의에 담긴 역사, 길바닥에 들러붙은 껌딱지 같은 것들을 유심히 지켜볼 가치가 있나 의문도 들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진짜 '고릴라'를 코앞에서 놓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서 있던 길모퉁이에서 누군가 가래를 퉤 뱉었다. 절로 표정이 일그러질 정도로 불쾌한 소리였다. 우리는 그에게서 충분히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결한 가래 덩이를 피하려고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따. 청각은 그네에 대한 향수 같은 감정적 기억 외에도 시각적이거나 촉각적인 기억들을 떠오르게 한다. 도시에서 일정하게 '뚜, 뚜' 하고 울리는 신호음을 들으면 후미등을 켜고 천천히 후진하는 트럭이 생생히 떠오른다. 나는 거리를 걷다가 독특하게도 시각이나 촉각 등의 감각과 관련되는 소리들을 발견했다.무거운 짐을 끌고 분투하는 남자를 봤을 때는 허리가 아프겠다는 느낌이 들었고, 발랄하게 껌을 씹으며 지나가는 여자아이를 보니 내 입과 입술에 터진 풍선껌이 붙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본문 중에서)
다른 사람의 눈(관점)으로 보는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가장 원초적이고 오래된 이 질문이야말로 인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나와 다른 타인의 편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려는 노력은 생존에도 필수적이었을 것이다.이 책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고생대의 돌멩이나 독특한 방식으로 뚫린 잎사귀 같은 것이 아니다. 알렉산드라와 동행한 각각의 전문가들은 우리에게 '제대로 보는 법'을 일깨운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순간 수많은 것들을 간과해 버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이 책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각성을 촉구하고 나아가 제대로 본다는 것의 의미를 묻고 있다. 제대로 본다는 것은 무얼까. 매순간 깨어 있는 것이다. 보고 있어도 보이지 않는가. 깨어 있어라. 그리고,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