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 인문학자 8인의 절망을 이기는 인문학 명강의
강신주 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이 여잔 침묵으로 내 모가질 비틀어 꺾어 버리고 말아. 내가 컴컴한 채로 몇 시간이고 의자에 앉아 있어도, 이 여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면서도 홱 돌아누워 잠들어 버려. 둘 중에 하나는 돌았어. 그게 대체 누구야? 나야? 응? 나란 말이야? 그럼 저 여자야? 대체 어느 쪽이야? 언젠가 다시 돌아오고 싶을 때가 있을지도 몰라. 난 그날을 기다리고 있겠어. 당신 눈물로 이뤄진 연못 한가운데 서서 그 물을 찰싹찰싹 치면서 노래 부르고 싶어. 당신이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꼴을 보고 싶어. 진흙탕이 된 당신 얼굴을 보고 싶어. 내 소원은 그뿐이야. 그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     존 오스본(John James Osborne)의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Look Book in Anger>> 중 지미의 대사
    존 오스본이 써낸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Look Back in Anger, (1958년)>>는 50년대 영국의 암울한 시대상을 신랄하게 파헤친 작품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장에서 캔디를 파는 주인공 지미 포터는 기성세대의 위선과 사회 부조리에 분노를 품은 인물이다. 그는 상습적으로 아내를 학대하면서 마음속 분노를 표출한다. 오스본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 지미와 주변인물들의 갈등을 통해 정당한 방식으로 분노를 해소할 길이 막힌 시대의 절망을 잘 그려냈다. 주인공 지미는 이차대전 이후 박탈감을 느끼던 '성난 젊은이(angry young man)' 세대의 표상이 된다. 50년대 영국은 절망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청년 실업률이 치솟고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경제는 침체기에 빠져들고 민주주의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존 오스본을 위시한 젊은 작가들은 시대상을 날카롭게 꼬집는 작품들을 써 내면서 사회의 부조리에 저항했다. 그러고 보면 완전한 절망의 시대는 아니었던 것도 같다. 시대적 위기와 사회 불의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성난 젊은이들'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인간이 서로 투명인간으로 만든다면 아무리 많은 수가 모여 있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서는 책임감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책임은 서로에 대한 응답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낸 인간의 윤리이기 때문입니다. (308쪽, 그래도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노명우)
    마음은 새빨간 불길에 휩싸인지 오래이다. 불길은 잦아들 줄 모른다. 점점 거세지는 불길 속에 한 사람이 있다. 사람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거센 불길 속에.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불길을 어디 토해내야 하나. 사방이 벽이다. 모든 희망이 끊긴 상태. 화마에 집어삼켜진 사람들의 세상. 방향성을 잃은 분노의 불길은 애먼 희생자를 낳는다. 모두가 희생자인 세상. 너도 나도 억울한 세상. 제 울음에 눈 멀고 귀 먼 사람들이 깽판이나 치는 세상이다. 나도 이젠 달라질 거예요. 모두 내 잘못이에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힘도 없는 생명이 죽었다고요. 나도 죽고 싶어요. 존 오스본의 희곡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에서 아이를 사산한 앨리슨이 울부짖는 대목이다.​ 죄 없는 생명이 희생되고 나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단 걸 깨닫는다. 마음을 새까맣게 태우는 분노를 안고 펄쩍펄쩍 뛰는 지미와, 아이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앨리슨의 죄의식과 절망. 이들 부부의 절망과 분노는 반세기의 공백을 무색케 할 만큼 우리 얼굴과 닮아 있다.
   ​어떤 사람을 알 때, 여러분 자신을 알 때는 절망의 상태와 위기의 상태에 있을 때죠. 그래서 우리가 절망의 상황을 피하는지도 몰라요. 나를 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이 들면 왜 산에 안 가는지 아세요? 헐떡거리니까. 나이 들면 왜 종합검진을 피하는지 아세요? 나쁜 일을 알게 될까봐. (33쪽, 시대의 이름, 절망, 강신주 )
   여덟 명의 인문학자들이 뭉쳤다. 존 오스번의 희곡 제목에서 이름을 따 온 이 책에서 이들은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지혜를 이야기한다. 당장 사는 일이 캄캄한 이때에 문학이 뭐고 철학이 다 뭐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절망이다. 강신주는 '파르헤지아parrhesia'를 통해 인문학의 가치와 의미를 설명한다. '파르헤지아'는 '진실을 말하기'라는 뜻인데, 인문학이야말로 "진실을 직면하는 파르헤지아"라는 것이다. 말문이 막힌 위험한 사회에서 모든 인문학, 예술, 철학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을 '말하면서' 진실을 지향한다.
   천국에는 철학자가 없고 신은 철학자가 아니다. 철학은 지옥에서 도망치지 않고 또 거기서 낙담하지 않고, 지옥을 생존 조건으로 삼아 거기서도 좋은 삶을 꾸리려는 자의 것이다.1 (201쪽, 끝없는 불안과 싸우는 당신을 위한 노래, 정여울)
   지옥의 불길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에게 정여울이 보내는 노래를 들어보자. "철학은 지옥에서라도 삶을 가꾸려는 자의 것"이라는 정여울은 시대의 악惡에 직면했을 때 달아날 것이 아니라 악의 뿌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악의 뿌리라고 하니까 외부로 눈을 돌리는가. 사악한 세계를 구성하는 우리는 저마다 악의 실뿌리들이다. "바꾸기 어려운 외부의 상황에만 비난의 화살을 돌릴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나 자신의 실천을 모색하는 것, 이렇듯 나로부터 시작되는 자발적 윤리가 구원의 희망(정여울, 끝없는 불안과 싸우는 당신을 위한 노래)"이 될 것이다. ​  
  
​    근대 이전에는 동양 의학이든 히포크라테스 의학이든 지혜가 곧 몸의 기질을 바꾸고 몸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지혜의 결핍, 진리에 대한 무관심이야말로 병의 원인이었죠. 지혜가 부족하면 몸의 균형이 깨지고 기질과 충동이 제멋대로 날뛴다고 본 거죠. 충동의 기본 속성은 폭력과 이기심입니다. 그러면 인간관계가 나빠지죠. 그 나빠진 관계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요. 그러면 감정의 회로가 더더욱 어긋나게 되고 당연히 병이 생기죠. (107쪽, 욕망의 지도, 운명, 고미숙)
 ​   인기 드라마 <<시크릿 가든>>과 <<서유기>>, 사주명리학 등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인 고미숙의 욕망 계보학도 인상적이다. 고미숙은 몸의 생리와 동떨어진 욕망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를 우려한다. 자기 욕망에 대한 무지가 자기 소외를 낳는다는 것이다. 신체와 존재의 간극을 좁히는 해소책으로 고미숙이 제시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자연'이다. 고미숙의 해법은 문태준이 말하는 '생태적 사고'와도 맞닿아 있다. '내 안에 있는 자연'이란 무엇인가. 부처가 말하는 "모든 존재가 파괴되고 소멸하는 것임을 현재의 삶 속에서 폭넓게 꿰뚫어 아는 자"이다. 시인은 안에 있는 자연'을 언어로 풀어내는 자이다. 문태준은 직접 선별한 몇 편의 시를 통해 물질적 욕망을 이기는 생태적 상상력을 보여준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2
         이 시에서는 모든 존재를 고유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황새, 말, 거북이, 달팽이, 굼벵이는 이동하는 공간도 다르고 보폭도, 속도도 다 다르겠지요. 그런데 이 존재들은 존엄에 있어서 높고 낮음이 없고, 낫고 모자람이 없이 동일 선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고르고 가지런하단느 것입니다. 심지어 늘 묵중한 바위도 이들과 어깨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상력은 분별하지 않는 상상력, 차별하지 않는 상상력입니다. (222~223쪽, 물질적 욕망을 무화시키는 시적 상상력, 문태준)
   고유한 개체와 개체는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 이질적인 대상을 유사성으로 엮어주는 시적 상상력이 문태준이 얘기하는 생태적 상상력의 핵심 내용이다.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당신과 나는 불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노명우는 이 책에서 시대정서sentiment의 불안, 즉 당대를 살고 있는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불안의 정서를 다룬다. 그는 공동체에 대한 불신과 그에 따른 사회문제의 개인화, 냉소주의를 꼬집는 한편 불안의 시대에서 살아남는 강력한 무기는 '확실하고 분명한 지식'이라고 강조한다. 지식이야말로 "비非인간이 되는 가능성을 끊임없이 차단해내는" 길이라는 것이다.

   희망을 끊는다는 것은 동물이 되어가는 거예요. 인간다운 감정을 느낄 수 없을 때 절망에 빠집니다. 반대로 말해볼까요? 우리는 언제 안 죽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안 죽어요.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안 죽어요. (...) 희망은 사랑과 같습니다. (...) 우리는 든든하게 지탱하는 삶의 힘, 자살하지 않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사랑이에요. (...) 절망은 사랑이 없는 상태입니다. (25~26쪽, 시대의 이름, 절망, 강신주)
   캄캄한 세월이다. 그래도 우리 아직 살아 있다. 살아 있는 한 희망을 끊을 수 없다. 그게 사람의 길이다. '사람'이 뭉쳐 '삶'이 되고 '사람'이 둥글어져 '사랑'이 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지만, 이 책에서 여덟 명의 '성난' 지식인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다. 사람이 되자. 사랑하는 사람이 되자. 둥글게 뭉쳐야 산다.

 

 

 


 


  1. <<철학자와 하녀>>, 고병권 지음, 메디치미디어, 2014

  2. * 반칠환의 시 <새해의 첫 기적>
    <<웃음의 힘>>, 반칠환 지음, 지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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