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을 보았다 바다로 간 달팽이 11
구경미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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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시작은 물이 새는 하수구에서부터였다. 완공된 지 채 일 년도 안 된 신축 빌라​의 벽과 천장에서 줄줄 물이 새는 것이었다. 부동산도 시공업체도 책임을 회피한다. 문제가 있으면 분양업자를 찾아가라는 식이다. 그들이 지목한 분양업자 '장 노인'은 "괴도, 유령, 마귀, 괴물 등으로 불리는, 참으로 별명도 다양한,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입주민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안고 노인의 집 초인종을 누른다. 여러 번 눌러도 답이 없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답이 없다.

    "초인종 누르기 전에 심호흡을 세 번이나 했다." 나중에 인호 아버지는 그렇게 술회했다. 새들의 지저귐이 허공을 갈랐다. 인호 아버지는 얼른 초인종에서 손을 뗐다. 지저귐이 멎었다. 기다렸다. (...) 일요일 오전답지 않게 골목에는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었다. 텔레비전 소리도, 피아노 치는 소리도, 아이를 혼내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 삶의 소리가 거세된 공간에 새의 울부짖음만이 가득했다. (본문 중에서)  

    기다리고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때까지 한 편이었던 입주민들은 쉽게 체념하고 돌아선다. 한순간 낯빛을 싹 바꾸고 하수구가 막힌 인호네 집에 책임을 떠넘긴다. 손해 배상을 청구할 수도 없게 돼버린 인호네는 불편한 일상을 이어간다. 인호의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친구들은 인호를 돕자는 데 의기투합한다. 인호와 만하, 한음, 달이는 인적이 뜸한 밤에 장 노인의 집에 무단 침입한다. 합법적인 방식이 불가하다면 불법적으로라도 손해 배상금을 받아내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이 귀한 음반을 한 짐씩 짊어지고 돌아간 바로 그 밤, 장 노인의 죽음이 보도된다.

   경찰은 도대체 뭐하니, 이런 거 조사 안 하고. 경찰이 할 일 우리가 다 하고 있네. 이렇게 무능해서야 어디 선량한 시민이 발 뻗고 자겠나. (본문 중에서)

 

​    한음과 세 친구들이 의문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이 작품은 추리소설의 옷을 입은 성장소설이라고 보면 되겠다. 본격 추리소설의 정교한 추리 과정은 부족하지만, 이야기 전체를 놓고 봤을 때 크게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은 아니다. 부실 공사, 책임 회피, 어른의 부재, 무능, 인간의 탐욕, 전쟁 중 살인, 죄책감, 단절... 묵직한 사회 문제들을 깔고 있으면서도 이 소설은 씩씩하고 발랄하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이 되는 '나(한음)'의 성장담 덕분이다.

   방과후 수업도, 학원도 다니지 않는 내가 밤 열 시가 되도록 귀가하지 않았는데 걱정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엄마는 오늘도 야근이겠지. 아빠는 오늘도 외박이겠지. 집구석 참 잘 돌아간다. (...)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카톡이 날아왔다. 밤이가 아닐까? 설마 하면서도 꼭 밤이일 것만 같았다. (본문 중에서)

    한음의 "집구석"은 정서적 유대가 단절된 오늘날의 가족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가족 뿐이겠는가. 외로운 소년 한음이 짝사랑하는 대상은 또 하필 말수가 없다. 산 너머 산, 아니, 닫힌 문 뒤에 또 다른 닫힌 문들이 소년을 기다리고 있다. 소년은 그러나 좌절하지 않는다. 체념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소년의 '만능열쇠'이다. 소년은 만능열쇠를 쥐고 닫힌 문들을 하나씩 열어보기 시작한다. 어른의 이기심과 무능이 지은 허술한 세계의 문을 박차고 나가 문 뒤의 세계를 적극적으로 탐사한다.

​   그런데 왜 문들이 꼭꼭 닫혀 있는 것일까. 닫힌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정말 아무도 없는 게 맞는 걸까. (...) 닫힌 문들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또 한 발, 그리고 또 한 발. (본문 중에서)

    억울한 일이 차고 넘친다. 세계의 뚜껑을 쾅 닫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비겁하게 입을 꾹 닫고 있는 때도 많다. 괜히 건드려서 다치기 싫은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한다. 어쩔 수 없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인가 보다. 하나의 닫힌 문 또는 단단한 벽이 되어가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닫힌 문들이고 동시에 닫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바깥에서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들이 있다. 문을 향해 발을 내디디자. 한 발, 또 한 발. 마침내 문이 열리면 아이들은 즐거운 숙제를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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