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피플 북스토리 재팬 클래식 플러스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201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 

    하루키 소설은 묘한 기시감을 선사한다. 한참 이야기에 몰두하고 있을 때 갑자기 누가 스윽 지나간다. 어딘가 낯이 익는 모습이다. 어디서 봤더라? 곰곰 생각해 보면 하루키의 다른 소설에도 등장한 인물이다. 그들은 꼭 닮았으면서 어딘가 전혀 다른 존재 같이 보이기도 한다. 각각의 세계에서 조금씩 다른 삶을 살아가는 쌍둥이들처럼 말이다. 하루키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세계의 외피를 ​섬세하게 걷어낸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든, 그런 일 따위 별 상관이 없"(TV 피플)게 되어버린다. 뒤집어진 세계에도 우리와 꼭 닮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것이 'TV 피플'. "그들은 원근법의 모델처럼 보인다고도 할 수 있다. 바로 코앞에 있는데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 마치 속임수 그림처럼 평면이 뒤틀리고 파도친다. 닿아야 마땅한 장소에 손이 닿지 않는다. 닿지 않아야 할 물건에 손이 닿는다. 그것이 TV 피플"(TV피플) 하루키는 두려움 없이 계속 나아간다.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잊어버릴 때까지. 하루키식 판타지가 발생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밑도 끝도 없다. 껍질을 계속 벗겨내도 알맹이는 없는 이상한 세계. 껍질이 곧 알맹이이기도 한 세계가 하루키의 세계이다. 이 세계에 닿기 위해서는 "극단적인 각성상태"(잠)에 빠져들어야 한다. ​"잠자고 싶어하는 육체"(잠)를 벗고 "각성하려 하는 의식"(잠)을 입어야 한다. 당신의 몸은 "다른 세계의 끝으로 휘날려 갈 것"(잠)이다. "세계의 끝에 있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땅으로."(잠) 당신이 세계의 끝으로 걸어갈 때, 반대편에서 "세계의 끝자락을 쥐고, 그것을 조금씩 풀고 있는"(비행기) 또 다른 당신이 있다. "세계가 조금씩 뒤틀리기 시작"(TV피플)하고, "들고나는 바닷물처럼 예감이 기억을 잡아당기고, 기억이 예감을 잡아당긴다. 하늘에는 날카롭게 날이 선 면도칼 같은 달이 떠 있고, 의문의 뿌리가 어두운 땅속을 긴다."(TV피플) 저편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이 들으란 듯이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복도를 걷는다. "카 ㅡ르스파무쿠  다부  카ㅡ르스파무쿠  다부쿠  카ㅡ르스파무쿠  쿠부"(TV 피플).

​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진 지점에서 하나의 세계가 깨어난다. 현실이라고도 비현실이라고도 할 수 없다. 목이 잘린 유령과 좀비, 리틀 피플들이 걸어다니는 세계는 그러나 "아주 리얼한 감촉"을 전해준다. "마치 인생 그 자체인 것처럼, 딱딱하고 매끈하고, 그리고 멀리에"(비행기)서. 구름처럼 흘러와서 그들은 우리 "머리 위를 뒤덮었다가는"(잠)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러면 또 저쪽에서 누가 "세계의 끝자락을 쥐고, 그것을 조금씩 풀"기 시작한다. "사무적으로, 그리고 아주 무감각하게."(비행기)

   ​ 끈덕지게 따라붙는 검은 악몽처럼 무의식이 의식을 입는다. "아무리 그런 일을 피하려 해도 소용이 없다."(가노 크레타) "껍질을 벗은 살덩어리"(좀비)가 우리를 쫓아온다. 목을 자르고 피를 다 빼고 "뒤뜰에 묻어버"(가노 크레타)려도 그것들은 계속 살아난다. "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경보장치를 부착하고, 각 방에는 전자 열쇠를 달고, 고릴라 같은 게이 보디가드를 고용"(가노 크레타)해도 그들은 간단히 방문을 부수고 쳐들어온다. 우리 "옷을 북북 찢"고 "있는 힘을 다해" 우리를 "범하고" 우리"목을 나이프로 잘"(가노 크레타)라 버린다. 목이 잘린 우리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살아 있고, 깨어 있을 때보다 더 깨어서 우리 안에 갇혀 있던 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게 된다. "래롯프  래롯프  리롯프"(가노 크레타)

    하루키식 판타지에 교훈이랄 만한 것은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 그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우리들 모두에게 일어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야기를 다 듣고도 폭소를 터뜨릴 수는 없었고, 지금 또한 그렇다."(우리들 시대의 포크로어) 한바탕 리얼한 꿈을 꾼 것도 같다. 귓가에서 어떤 속삭임처럼, TV 피플이 복도를 걸어다니는 소리가 들린다. 당신은 자고 있다. "마치 의식을 잃은 사람처럼, 잠꼬대 한 번 하지 않고."(잠) 당신은 모를 것이다. 이런 꿈에서 깨고 나면, "잠보다 깨어 있는 편이 덜 리얼한 느낌이 든다"(TV 피플)는 것을. 크고 무거운 시간이 온 방을 울리면서 지나고 있다. "타르푸  쿠  샤우스  타르푸  쿠  샤우스"(TV 피플). 당신은 계속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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