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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빛 ㅣ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5
이누이 루카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어릴 때 말도 안 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은 맑고 투명하고 눈부신 빛덩어리였다. 일반적인 빛과 다른 점이 있었는데, 무구(無垢)와 조롱이 동시에 느껴지는 미묘한 웃음이었다. 투명하고 창백한 빛무리는 웃음이 만드는 물결 같았다. 윤곽이 없는 얼굴처럼 보이는 그것은 목과 허리 팔 다리 없이 두 그루 밤나무 사이에 동그랗게 떠 있었다. 내가 앉거나 서거나 정확히 내 눈 앞에 떠서 미묘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그것을 가리키며 아빠에게 물었다. 저거 뭐야?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그것이 달이라고 말해주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었지만 달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저것이 아빠 눈에는 안 보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그것이 무서워졌고 그것을 보는 나 자신도 두려워졌다. 그날 이후 나는 그것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말이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눈 없이 입 없이 웃는 말도 안 되는 빛덩어리. 최초의 고독은 그런 형상으로 나를 찾아왔다.
상상으로 그린 아키코의 입술과 실제 입술은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었다. 기형이라고 차마 부를 수조차 없었다. 아키코의 입술은 새의 부리처럼 조그맣고 뾰족한 데다 윗입술에는 흰색과 갈색 줄무늬가 들어간 더듬이 같은 수염이 빼곡하게 났다. 쏙독새의 수염이다. 나는 무심코 뒷걸음질쳤다. 등에 문이 닿았다. 동요하는 나를 보고 아키코는 더 이상 입을 감추지 않았다. 아키코의 눈에서 또 눈물이 넘쳐흘렸다. ㅡ <쏙독새의 아침> 중에서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있으면서 없는, 부재의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소외된 무엇. 유령을 소재로 하는 공포물에는 그 밑바닥에 고독을 깔고 있다. 거의 모든 유령물에서 주인공은 유령이 아니라 유령을 보거나 느끼는 자이다. 눈에 안 보이는(보고 싶지도 않은) 세계를 감각하는 주인공 역시 유령 취급을 받게 된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고 들으려고도 않는다. 공포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 그것은 철저히 혼자되는 것, 즉 고독에 대한 공포이다. 최근에 본 공포물로는 <컨저링>이 기억에 남는다. 유령이 실린 사람이 스스로의 고독(공포)과 사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암흑이 녹아든 밤바다에 은하를 이루어 빛나는 갯반디는 정말로 예뻤다. 어째서 예쁠까, 예쁘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뭘까. 데쓰히코는 생각했다. 다카시가 보는 세상은 어떤 식일까, 다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어떨까? 내가 아무리 추해도 내가 보는 것까지 추하다고 할 수는 없잖아. 언젠가 다카시는 그렇게 말했다. ㅡ < 여름 빛 > 중에서
《여름 빛》은 매혹적인 방식으로 유령적인 존재들의 슬픔을 다룬다. 2부로 구성된 이 소설집은 인간의 감각 능력을 소재로 한 여섯 편의 작품을 싣고 있다. 표제작 <여름빛>은 2차 세계대전 말, 세토우치의 어촌으로 피난 온 데쓰히코와 그 마을에서 소외당하는 다카시의 우정을 그린다. 다카시의 얼굴 절반은 "먹물을 들이부은 듯한 새카맣고 큰 반점"이 뒤덮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불길한 반점이 상괭이(쇠돌고래)의 저주라고 생각한다. 다카시가 배 속에 있을 때, 배를 곯던 다카시의 어머니가 해안가에 떠밀려온 상괭이 고기를 먹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에게 상괭이는 "신령님의 사자"였다. 아무리 굶주려도 상괭이를 먹는 것은 금기(禁忌)였다. 그 금기를 깨고 태어난 다카시의 흉측한 반점은 그래서 공포의 대상이 된다. 다카시에게는 죽음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다. 곧 죽을 사람을 보면 다카시 눈동자 안에 숨겨진 갯반디들이 푸른빛을 깜박이며 반짝거리는 것이다. 다카시의 흉측한 얼굴과 초인적 능력을 마을 사람들은 저주의 확실한 징표로 여긴다. 갯반디의 반짝임처럼 아름답고 구슬픈 정서를 깔고 있는 <여름빛>은 '다름'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폭력을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땅을 차." 하나, 둘, 셋에서 마코토와 다쿠는 뛰어올랐다. 비행기 같은 활주도 없이 시트 등받이에 몸이 젖혀지는 압력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마코토는 다쿠와 함께 공중에 떠올랐다. (...) 다쿠가 묻는다. "무섭지 않아?" 마코토는 볼살이 흔들릴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무서울 리 없잖아." "그럼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가자." ㅡ < out of tiis world > 중에서
모든 작품들에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유령을 보거나(<쏙독새의 아침>), 저주를 내리거나(<백 개의 불꽃>), 타인의 감정이 풍기는 냄새를 맡거나(<바람, 레몬, 겨울의 끝>), 하늘을 날거나(<out of this world>), 무시무시한 식탐을 얻게 되기도(<이>) 한다. 보통 사람은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다다를 수 없는 세계에 발 디딘 자들의 고독이 앓음답게 형상화되어 있다. 이누이 루카가 보여주는 그 세계는 기괴하고 폭력적이지만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아름답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연민이 녹아 있어서 그렇다.
츠마는 여전히 내게 말을 거는 걸 멈추지 않았다. 말은 곧 노래가 되었다. 모르는 선율의 조용하고 종잡을 수 없는 노래였다. 그 나라 동요 같은 것이리라. 듣고 있으면 낯선 숲 속 오지로 가늘게 흐르는 시냇물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았다. 노래와 함께 녹차 향기가 부드럽게 퍼졌다. ㅡ < 바람, 레몬, 겨울의 끝 > 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바람, 레몬, 겨울의 끝>이다. 남다른 후각 능력을 가진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타인의 감정이 풍기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아야코와 동남아 어딘가에서 몸을 팔려온 소녀 츠마가 단단한 철문을 사이에 두고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폭력과 죽음 앞에 내던져진 츠마에게서 맡아졌던 희망의 냄새는 암울한 세계에 남겨진 아야코에게, 책을 읽는 모두에게 눈물겨운 위로를 전한다. “제가 쓰는 소설 마지막에는 늘 희망을 남기고자 합니다. 제게 희망이란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힘입니다. 오늘 하루는 힘들었지만 내일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니까 일단 내일까지는 열심히 살아보자. '이런 마음'으로 허구의 세계 속에서라도 위로와 구원을 그리고자 합니다.” 이누이 루카가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이다. 《여름 빛》은 '그런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