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처 다 하지 못한 - 김광석 에세이
김광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2월
평점 :
이제는 말을 해야지 말을 해야지 가릴 것 하나 없이 말을 해야지
김광석의 노래를 맨 처음 들은 것이 언제였나. 타지에 나와 낯선 사람들과 어설프게 관계를 맺어가던 스무 살 무렵이었던 것도 같고. 초등학생 때 학원 가던 버스 안에서였던 것도 같고. 아니, 어쩌면 대여섯 살 때 엄마 자주 듣던 라디오에서 나오던 노래를 흘려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즤지지익 끊기고 늘어지던 노래 테잎처럼 아슴아슴한 기억이지만, 그 노래들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경쾌한 듯 단조로운 선율을 타고 흐르는 낮고 힘있는 음색. 김광석, 하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노래가 <그녀가 처음 울던 날>입니다. 이렇게나 경쾌한 리듬 속에 슬픔이 흐르는구나. 그 노래를 들으면 마냥 좋고 외롭고 슬프고 미안한 마음이 복합적으로 피어오르다 스러졌습니다. 그 석연치 않은 감정이 저는 좋아서 몇 번을 연하여 들은 기억도 나네요. 노래의 힘'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온몸으로 느끼면서요. 사실 저는 서태지와 에쵸티 세대... 이른바 응사~ 응칠세대'입니다. 중학생 때까지는 가요를 많이 들었습니다. 서태지나 에쵸티도 듣고 신승훈 이장우 공일오비도 들었는데요. 대부분의 노래가 그 시절을 지나오면서 잊혀졌습니다. 초등학생 중학생 때 입던 옷들처럼 이제는 입을 수 없는 옷 같은 노래들 사이에서 김광석의 노래는... 고향집 같아요. 진부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 못하겠습니다. 크고 작은 삶의 모퉁이를 돌아나올 때마다 그의 노래를 찾게 되네요. 고마운 일입니다. 다행이에요. 잃어버린 수많은 노래들 속에 잊히지 않는 노래가 있다는 것.
부르고 또 불러도 아쉬운 노래들을 다시 불러봅니다. - 서(序) 일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되었군요.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가 남기고 간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으니까요. 요즘 큰 화제를 낳고 있는 히든싱어'에서 올 한 해의 마지막을 장식할 주인공도 김광석'입니다. 산 사람보다 더 살아있는 가수 김광석. 그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나 티븨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요. 그가 부르는 노래와 꼭 닮은 바로 그 모습이었습니다. 언죽번죽 말을 이어가면서 간간이 웃고 농담도 던지는 그는 그저 내 나이 또래 젊은이였습니다. 내가 사십 오십이 되어도 그는 그 나이에 머물러 있겠지요.
스물아홉. 열 손가락을 모두 오므렸다 폈다 다시 오므려야 할 내 나이가 조금 한심스러운 밤. - <다짐> 일부
그는 어떤 사람이었나. 노래하는 김광석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궁금했습니다. 의문의 죽음, 그를 둘러싼 수많은 루머들만이 유령처럼 떠돌아 다니더군요. 그러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그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오래 전 그의 노래를 처음 들은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그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익숙한 사람 같다는 느낌. 그러므로 지금 소개하는 이 책은...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난 옛친구에게서 받은 때늦은 편지 같이 여겨집니다. 반갑고 설레는 한편 두렵기도 했고요. 편지를 열기도 전부터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에서 훌훌 풀려나가는 듯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서연이가 날 무서워한다. 난 그 아이의 애비다. 무조건, 그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하든, 비록 날 상심하게 할지라도, 심지어 날 배신하더라도 난 그 아이를 사랑한다, 사랑할 것이다, 사랑할 수밖에 없다. 허나, 아이는 날 무서워하고 아이답게 솔직히 나를 싫어한다. 난 무척 상심한다. (...) 서연이와 친해지고 싶다. 마음으로.
- <사랑의 꼭짓점> 일부
김광석이 남긴 육필 원고( 짧은 메모, 일기, 편지, 노랫말 )들을 모아 엮은 이 책은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와는 또 다른 감동을 전해줄 것 같은데요.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외로운 인간 김광석의 목소리가 녹아 있습니다. 이제 나도 그의 나이가 되고 보니 공감 가는 부분이 많네요. 오래 들어온 그의 노래에 실린 정서와 크게 어긋나지도 않고요. 책 전반을 휘감는 정서는 그리움'입니다. 그의 문장을 따라가면서 생각했어요. 우리를 흐르게 하는 것은... 그리움'이구나. 절망도 희망도 사랑도 미움도 그 뿌리는 그리움'이구나. 그리고 어떤 사람은 그리움 때문에 죽기도 하는구나.
금이가 날 기다리듯 나 또한 금이를 기다립니다. - <깊이> 일부
일견 사색적이고 감상적인 문장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생활'이 보입니다. 아내와 딸 서연에 대한 애정, 군에서 죽은 형과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마음, 동료 가수들과의 우정, 길에서 마주친 사람들과의 에피소드... 돈 걱정. 한편 김광석은 생활의 익숙함'을 경계해야 한다고 거듭 다짐하는데요. 생활과 이상 사이에서 불안하게 줄타기하는 가장 김광석의 면모가 엿보입니다.
보고 싶은 아내에게. 당신이 떠나는 날부터 지방이다 서울이다 정신없이 바빴다. 당신 없으면 잘돼가는 일이 정말 없다. 뭘 해도 재미없고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신경 쓸 것투성이고 여러 모로 당신이 필요하다. 객지에서 몸 아픈 것처럼 힘든 게 없는데 연락도 자주 못해 미안하다.문득문득 생각나서 전화해보면 잘 연결이 안 되더라고. 서연이는 키도 컸고 더 건강해져서 할머니가 따라다니기 바쁘다. 엄마 어딨니 하면 양손을 하늘로 쭉 뻗으면서 어! 어! 해. 처음엔 마음이 아파서 눈물이 핑 돌더라고. 그동안 충실하지 못한 내가 밉기도 했고.
- <아내에게> 일부
젊었을 때 많이 사랑하고 많이 이별하세요. 언젠가 티븨에 나온 김광석이 말했습니다. 아무 말도 아닌데 울컥했던 기억이 나네요. 김광석은 역시 책에서도 같은 말을 다르게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인의 특별한 사랑담도 몇 번 언급되고요. 책의 마지막 장은 미공개 노랫말들이 실렸는데, 꽤 많습니다. 몇몇 노래들은 노래 작업 중에 있다고 하는데요. 노랫말 중에도 사랑을 다루는 것들이 많습니다. 김광석은 책에서 이야기합니다. 아프지 않은 사랑 없고 아프지 않은 생이 없다고. 아파서 이별하지만 아프니까 또 사랑하게도 된다고. 그리고 김광석은 인사합니다. 행복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