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내가 샤일로에서 본 것 - 미국 남북 전쟁 소설선 ㅣ 아모르문디 세계문학 2
앰브로즈 비어스 지음, 정탄 옮김 / 아모르문디 / 2013년 6월
평점 :
한없이 이어지는 꿈길을 헤맬 때가 있습니다. 와짝 눈을 떴는데 여전히 꿈속이고. 겨우 잠을 깨서 뒤척이다 잠들었을 때, 다시 그 꿈이 이어지고... 눈 감아도 잠들 수 없고 눈을 떠도 깨지 않는 막막하고 이상한 밤. 그런 밤처럼, 어떤 순간은 끝없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아침이 밝고 한낮이 되어도 밤은 계속되는 것이죠. 지금 소개하는 책은 바로 그런 밤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통증을 견딜 수 없었다. 끔찍한 고통을 잊기 위해 그는 찢어진 손으로 나무 조각들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 집도 처자식도 국가도 영광도 생각하지 않았다. 모든 기억이 지워졌다. 세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목재와 판자 더미 한복판, 그것만이 유일한 세상이다. 이 세상엔 언제나 새롭고 끝없는 불멸의 고통이 있다. 욱신거림의 시곗바늘이 째깍대며 영원의 시간을 알린다. ( 118쪽, 「실종자 중 하나」 중에서)
스물여섯 편의 단편을 싣고 있는 이 소설집은 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요. 불타버린 시체, 나뒹구는 머리통, 흘러내리는 뇌수, 찢긴 팔다리... 앰브로즈 비어스는 남북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매우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를 통해 전쟁의 현실감을 잘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한밤의 악몽처럼, 낱낱의 이야기들은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긴박한 숨소리로 연결됩니다. 적과 아군, 승리와 패배, 삶과 죽음. 전쟁터,라는 냉엄한 이분법의 세계를 그리면서 한편으로 그 세계를 이루는(혹은, 대립하는) 인간성, 즉 인간적인 고뇌와 물리적 고통, 두려움과 공포 같은 감정들이 매캐한 화약 연기처럼 행간을 떠다니고 있습니다.
나는 도망쳐야 했고, 그렇게 했다. (...) 나는 옥수수밭으로 돌아가 강을 찾은 뒤, 강둑을 따라 멀리까지 되돌아갔다가 작은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벽까지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새처럼 앉아 있었다. ( 87쪽, 「딕시에서의 나흘」 중에서)
분량이나 구성 면에서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단편보다는 삽화에 가깝습니다. 긴박하거나 의미있는 어떤 순간들을 섬세하게 포착해내고 있는데요. 뭐랄까. 한 사람의 꿈속을 훔쳐보는 기분이 듭니다. 기억,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겪어보지 않고는 쓸 수 없는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전쟁터의 이미지들... 생의 본능과 죽음의 공포 같은 생생한 감각들. 어떤 기억은 일생을 옭아매는 사슬이 되기도 하죠. 책을 읽는 동안, 정용준의 소설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를 떠올렸습니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고립된 섬에 남은 두 명의 생존 군인들의 시간은 여전히 전시(戰時)에 멈춰 있습니다. 죽여야 할 적도 지켜야 할 아군도 이제는 없지만, 그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무장을 해제하지 않지요. 그들이 싸워야 할 진짜 적은 참혹한 시간이 할퀴고 간 상처, 기억'입니다.
어렴풋하고 단속적이지만 마법과도 같은 힘으로 떠오르는 젊은 군인 시절의 기억! 나는 다시금 아득한 나팔 소리를 듣곤 한다. 이상한 나라의 희미한 계곡에서 솟구치던 높고 푸른 연기를 또다시 보곤 한다. 매복지의 소나무에서 풍기던 냄새가 유령처럼 감각 속에 스며든다. 알 수 없는 운명의 진지를 휘감던 아침 안개가 얼굴에 와 닿는 것을 느낀다. (34쪽, 「내가 샤일로에서 본 것」 중에서)
비어스는 남북전쟁이 발발한 지 닷새 만에 자원입대를 합니다. 당시 나이 열아홉이었는데요. 2, 3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 그에게 남긴 것은 두개골에 박힌 총알과 전쟁 후유증, 약혼녀의 배신이었습니다. 1912년, 일흔 살의 비어스는 오십 년 전 참전했던 남북 전쟁의 유적지를 찾아다닙니다. 그 이듬해 11월에는 멕시코에서 종군 기자로 군대에 합류하게 되는데요. 12월 말, 판초 비야의 군대를 따라 오히나가로 향한다는 편지를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집니다.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남은 일생 동안 비어스는 또 다른 전쟁'을 계속 치러야 했던 것 아닐까. 그리고 이 책은 바로 그 전쟁'의 상흔으로 읽어도 무방하지 않겠나. "언제나 새롭고 끝없는 불멸의 고통"을 견뎌야 했던 한 사람의 끝나지 않는 꿈속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