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와 이발사
에트가 힐젠라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독일계 유대인인 작가 자신의 홀로코스트 경험을 토대로 씌여졌습니다.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다양한 예술작품이 많은데요. 대부분의 작품이 희생자에 초점을 맞추는 데 반해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 가해자 '막스 슐츠'의 관점을 통해 독일 나치 시기의 참극을 풀어냅니다. 주인공이자 화자로 등장하는 '막스 슐츠'는 나치 당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합니다. 그의 손에 목숨을 잃은 유대인 희생자 중에는 어린 시절 가깝게 지낸 이치히 핀켈슈타인도 끼어 있는데요. 독일이 패전하고 학살 전범자가 된 그는 이치히 핀켈슈타인으로 교묘하게 신분을 위장합니다. 이 시점부터 "나 이치히 핀켈슈타인, 한때는 대량 학살자 막스 슐츠였던......"이라는 멘트가 자주 등장합니다. 별로 진중한 말투는 아니죠. 대량 학살을 저지른 자의 죄책감 따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듯이 심상한 태도로 일관하는데요. 어느 순간 이치히 핀켈슈타인의 가면을 쓴 대량 학살자 막스 슐츠의 정체성이 불투명해집니다. 정확히 말하면, 독자 입장에서 조금 혼란을 느낀다고 할까요. 이치히로 변신한 막스는 유대 민족의 편에 서서 활동하기 시작하는데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서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해 지하 테러리스트 활동을 자처하고 나서기까지 합니다. 심근 경색으로 쓰러진 이후에는 유대인 랍비의 심장을 고집해서 이식받기도 하고요. 신분 위장을 위한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까지 자처하는 그에게서 유대인의 정신, 진심이 느껴지기까지 하니까요. 이같은 상호 정체성 혼동은 작가의 의도적인 장치라고 하는데요. 진중하지 못함, 그러니까 가해자와 희생자에 대한 희화화는 출간 당시 많은 논란을 낳았다고 합니다.

 

 

       상상을 해보라. 우리는 모두 살짝 취한 상태이다. 독실한 유대교인들이 웃고, 손가락을 튀기고, 수염을 간당거리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흥겹게 춤을 춘다. 나를 잡아끈다. 나도 그들과 어울려 춤을 춘다. 나는 약간 취기가 돈다.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나 자신도 다르게 보인다. 등에는 금니 자루를 둘러메고, 춤추는 내가 보인다. 내가 죽인 이들이 보인다. 그들도 함께 어울려 춤추고 있다. 망자들의 원무이다. 우리, 산 자들은 그 가운데에서 춤춘다. 음악이 우리를 위해서 울린다. (본문 중에서)

 

 

 

      역사적 참극을 다루는 이 소설은 심상한 어조와 경쾌한 리듬으로 진행되는데요. 암울한 진실을 굳이 암울하게만 이야기해야 할까요. 《나치와 이발사》에서 보여주는 익살과 풍자가 진실의 무게를 간과하지는 않습니다.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치히 핀켈슈타인, 한때는 대량 학살자 막스 슐츠였던" 주인공(나)의 이중적 정체성을 내세워 중립의 자세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짐짓 익살을 떨고 있지만 읽는 내내 불편함을 떨칠 수 없지요. 잔인한 학살 장면이나 폭력적이고 변태적 성(性) 묘사 부분이 특히 그렇습니다.

 

 

     나, 막스 슐츠, 미래의 대량 학살범이긴 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순결무구한 상태였는데, 그때 막 골수를 뒤흔드는 처절한 비명 소리를 내고 있었고, 사지를 버둥거리며 몸을 뻗대고, 터져 나온 이발 의자 쿠션의 대팻밥을 필사적으로 움켜쥐고, 머리를 최대한 위로 치켜세웠는데, 핏대 오른 내 머리통은 무섭도록 시뻘건 색깔로 변해 있었다. 나는 또다시 오줌을 쌌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는데도. 그리고 방귀도 뀌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떤 것이, 방귀 나오는 구멍이 꽉 막혀 있었으니. 내 몸은 움찔움찔 경련하기 시작했고, 내 귀에는 천사들의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본문 중에서)

 

 

 

      막스는 상처를 지닌 인물입니다. 유아기에 의붓아버지인 슬라비츠키에게 수차례 강간을 당하지요. 무기력하고 음탕하기만 한 어머니에 대한 혐오감에 더해져 그의 마음속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히틀러의 연설은 그의 안에 내재하고 있던 분노와 폭력성을 분출시키는 계기가 되는데요. 작가는 이 결정적인 장면, 히틀러의 연설에 고무하는 대중의 모습을 성서의 산상 수훈과 절묘하게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종교적 조롱이라는 비난을 사고 있지만, 좀 더 주의를 기울이면 숨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내가 받은 상처 하나당 한 명의 희생자를 원했다. 내가 받은 조롱 하나하나마다 한 명씩의 희생자가 필요했다. 그 조롱이 신으로부터 온 것이든지, 아니면 주변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오늘날 나는 그때 왜 우리 모두의 목구멍에서 튀어나온 가래 덩어리가 허공을 멀찍이 날아가 무고한 자들을 맞추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당시 우리는 특별히 그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숨통이 좀 트이라고 답답한 이물질을 뱉어 낸 것에 불과했다. 그때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본문 중에서)

 

 

 

       히틀러의 연설에 열광하는 대중 개개인은 저마다의 상처와 소심한 분노를 품고 있습니다. 그것을 뿜어낼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던 그들 앞에 히틀러가 나타나 지시를 하고 명령을 내려주었던 것뿐이라는 것이 이 장면이 주는 암시입니다.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막스의 일관적인 태도 역시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그들의 학살에는 확고한 목적의식 따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지요. 홀로코스트의 비극과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분노는 여기서 출발하는 것 아닐까요. 작가는 막스를 내세워 '무죄'를 말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막스 슐츠 (max. Schuld, '최대 유죄'라는 뜻)의 이름이 갖는 상징성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상재판의 내용은 의미심장합니다. 소설 원본에서는 막스가 죽은 이후 신과 대면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독일어판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었다고 합니다. 전쟁의 상흔은 그토록 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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