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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내가 좋아하는 것은 여기 있는 것이고, 글을 쓰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언어와 민족과 문화 혹은 국가를 바꾸는 작가들이 없지 않아요. 그러나 나는 항상 여기 있었고, 여기서 넋이 나간 채 풍경을 쳐다보았고, 바다 위를 지나가는 배들의 수를 세었어요. 나는 모든 것을 이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고 있어요. 그러다가 문득문득 나는 행복한 존재라고, 더는 필요한 게 없다고 생각해요."
ㅡ 오르한 파묵 인터뷰 중에서
16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이 특별한 인터뷰집은 작은 소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스페인 출신의 두 기자(문학전문기자 사비 아옌Xavi Ayen과 사진기자 킴 만레사kim Manresa)는 개인 사진집에 어울리는 단 한 줄의 헌사를 구하기 위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을 섭외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터뷰를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가장 일상적이면서 예외적인 인터뷰를 원했습니다. 일상적인 작가들의 모습을 담아내는 것 자체가 기존의 이미지나 관념을 벗어난 가장 예외적인 시도였던 셈입니다. 작가가 사는 도시의 길거리, 그의 거실, 서재, 주방, 작품의 배경지에서 자유롭게 진행되는 인터뷰는 짧게는 여섯 시간, 길게는 여덟 날이 걸리기도 했습니다. 공항에서 한 시간 이상의 조사를 받기도 하고, 작가가 보낸 경호원의 안내를 받기도 하는 등 인터뷰 과정도 녹록하지만은 않았습니다. 그 경이와 감격의 시간들을 이 책은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벨상을 로또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액의 상금 때문입니다. 일확천금이면 삶이 완전히 뒤바뀔까요. 노벨상 수상 작가들의 삶은 수상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자신이 정한 규칙을 엄수하는 작가들의 삶은 물질적인 풍요나 그밖의 어떤 것도 뒤흔들 수 없을 만큼 확고합니다. 일상의 세세한 것부터 문학관이나 세계관까지가 그렇습니다. 각 작가들의 형편이나 삶의 방식은 다양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30년 전 프랑스로 망명해 지금은 완전히 정착한 중국작가 가오싱젠, 극우민족주의자들의 공격과 협박에도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지 않는 오르한 파묵,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운명>의 작가 케르테스, 젊은 시절 나치 친위대 소속이었던 전력 때문에 끔찍한 비난을 받고 있는 권터 그라스 등 서로 다른 처지에 있는 이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자기자신에 대한 확신입니다. 지금까지 글을 쓰게 한 힘도 다름 아닌 그것입니다. "어떤 '이즘'없이 산다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저항의 형태이다." 16인의 반란자들을 대변하는 가오싱젠의 말이 감명적입니다.
노벨문학상. 일반인에게는 넘지 못할 산 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작품을 읽을 때에도 자유롭지 못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세세한 부분까지 의미를 찾느라 순수한 감상이 배제된 책읽기는 길고 지난한 악몽으로 전락합니다. '노벨문학상'이라는 타이틀에 대한 긴장이나 부담감 등 부자유한 감정, 그러니까 일종의 거리감 같은 것에 공감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일상과 솔직한 내면의 풍경을 포착한 이 인터뷰집은 그 거리감을 좁히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인터뷰는 작품 이야기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작가의 가족사나 개인적 경험, 아픈 치부, 사회문제나 정치적인 입장까지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각각의 인터뷰는 10페이지 내외로 많지 않은 분량인데요. 편집이 매우 뛰어납니다. 핵심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그러나 인상 깊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능력은 저자들의 기자 경력이 큰 몫을 한 것 같습니다. 10페이지 정도면 적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겠는데요. 인터뷰 내용 중간 중간 작가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검은 배경 위에 하나의 차분한 빛처럼, 또 하나의 배경처럼. 사진들은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인터뷰 내용을 읽는 것보다 사진을 바라보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킴 만레사의 사진들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특히 작가들의 손을 찍은 사진이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담배를 쥔 손, 깍지 낀 손, 입에 물린 손, 생각하는 손, 머뭇거리는 손, 침묵하는 손, 손, 손들.
결국은 모두 작품 이야기겠지요. 작가에게는 그의 과거든 일상이든 미래든 모두 작품으로 귀결되니까요. 그러니까 작가의 과거나 일상이나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작품을 읽는 일의 확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매혹적인 방식으로 독자의 욕구를 충족하고 있습니다. *(갈피끈이 짧아서 제 구실을 못한다는 것이 작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