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1초들 - 곽재구 산문집
곽재구 지음 / 톨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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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보니 세상이 한 척의 배 같군요.

두둥실 두리둥실 어디론가 흘러가는 것입니다.

당신과 우리 모두 기다리며 한세상을 살아왔지요.

기다림이 없는 시간이 바로 절망의 시간 아닌지요.



- 본문 중에서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리움을 부르는 냄새, 아니 향기다. 꽃향기 나는 연필심으로 종이를 꾹꾹 눌러 글씨를 쓰고 코를 대보던 기억이 난다. 내가 쓴 글씨에서 좋은 향이 난다고 기뻐했다. 오래 전 일이다. 지금도 내 주위를 감도는 이것은 그런 향기가 아니다. 책에서도 향기가 난다는 말은 은유인 줄만 알았다. 이제는 알겠다. 좋은 냄새를 뿜어내는 책이 있다는 것. 못 믿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이 책을 코앞에 펼쳐 보이겠다.





우리가 사랑한 1초들





곽재구 시인이 9년 만에 내놓은 이번 산문집은 산티니케탄에서 보낸 540일 간의 특별한 일상을 담고 있다. 산티니케탄은 인도 서벵골주(州) 북서쪽에 있는 대학도시이다. 1921년 타고르가 설립한 비스바바라티대학이 있다. 시인은 타고르의 시편들을 가까이에서 만나기 위해 그곳에 갔다. 거기, 타고르의 문장만큼이나 아름다운 생의 향기가 그득했다. 시인이 쓰는 문장, 행간마다 그 향기가 고스란하다.





꽃은 흰색과 노랑 두 색으로 피는군요.

아, 이런, 향기에 대해 먼저 적어야 할 것 같습니다. 꽃망울이 틔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처음 알았던 순간 나는 나무 아래 조용히 섰습니다. 온몸의 호흡을 고요히 모았지요. 냄새들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마와 팔, 어깨, 눈 코 손 가슴 발 발바닥 머리카락...... 내 몸의 모든 부위들이 자신이 지닌 지극至極의 문을 열고 이 신비한 꽃내음을 받아들이는군요.



ㅡ 본문에서





산티니케탄에 단 한 그루 있다는 조전건다 나무의 꽃에서는 달빛 냄새가 난다고 한다. “몸의 모든 부위들이 자신이 지닌 지극至極의 문을 열”게 만드는 냄새. 시인의 섬세한 문장은 호흡하는 책읽기를 가능케 한다. 한 문장, 문단마다 가만히 호흡을 모으게 만드는 부드러운 힘을 지녔다.





안녕, 오늘 더웠지?

52도까지 올랐는데 견딜 만했어?

나, 괜찮아. 다들 견디잖아.



ㅡ 본문에서





후각적 감각을 자극하는 것은 꽃냄새 뿐만이 아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페달을 밟는 릭샤꾼의 땀냄새, 뜨거운 볕 아래 말라가는 빨래 냄새와 팔팔 끓는 짜이 냄새, 한밤중 비에 젖은 대지의 냄새와 뜨거운 볕 아래 녹아내리는 고무 냄새. . . 생이 피워올리는 냄새들은 챔파꽃 향기보다도 강렬하다. 상상할 수 없는 폭염 속에서도 쾌활한 삶을 이어가는 인도인들이 피워내는 향기일 것이다. 인도의 흙과 바람과 햇살이 만든 성품, 때때로 참을 수 없는 그들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아름답다.





위에서 나는 이 책을 소개하면서 ‘여정’이 아니라 ‘일상’이라고 썼다. 산티니케탄의 작은 집에서 시인이 보낸 540일의 체류는 분명 일상에 가깝다. 한가로운 아침 산책과 짜이 한 잔의 여유, 오가는 사람들과의 한담, 소소한 사건들이 평화롭게 펼쳐진다. 타고르의 시편을 찾아 떠난 산티니케탄에서 얻은 선물 같은 일상이다.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에 지친 현대인에게 특별한 향기를 전해주는 책 『우리가 사랑한 1초들』. 책 사이사이 삽입된 타고르의 시들이 뜻밖의 울림을 준다. 산티니케탄의 햇빛과 바람과 정신이 깃든 탓이겠다. 살아 있는 타고르를 보내준 시인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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