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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
후지와라 신야 지음, 강병혁 옮김 / 푸른숲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Y는 코스모스가 가득한 들판을 둘러본다. 서쪽 하늘의 구름이 흩어지고 석양에 물든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가 섬세하게 빛나고 있다. 사람의 키보다 더 큰 야생 코스모스 뒤에 뭔가 숨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주소를 속인 게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다.
'......여기에 있어!'
ㅡ 본문 중에서
후지와라 신야의 여행기《동양기행》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둡고 흐릿해서 다소 음침한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그의 사진들, 적당한 서정이 흐르는 문장이 좋았다. 인위적으로 조작된 밝고 화려한 세계에서 뜻밖에 마주친 자연스러움이었다. 그것은 나를 안심시켰다. 이제 소개할 그의 산문집 역시 마찬가지의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원제: 코스모스 그림자 뒤에는 늘 누군가 숨어 있다)》는 열네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편을 제외한 열세 편은 지하철에 놓이는 무가지(無價紙) <메트로 미니츠>에 6년 간 연재한 일흔한 편의 글 가운데 추려내 다듬은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지하철'에 주목한다. 가장 일상적인 서민의 교통수단이 바로 지하철이다. 하루에도 수백수천 명의 다양한 사람들이 스쳐지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후지와라 신야의 전작들에 비해 이번 산문집은 서민적이고 일상적이다.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고 있어서 누구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딱 한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편안하게 빠져들 수 있을 정도로 분량이나 내용에서도 부담이 없다.
생태통로라는 것이 있다. 짐승들은 종횡무진 야산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몇 개의 통로로 이동한다. 동물의 행동은 보수적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기본적으로는 보수적 행동을 반복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한다. (...) 역에서 집으로 가는 루트를 벗어나는 일은 거의 없다.
ㅡ <당신이 전철의 다른 방향을 보았을 때> 중에서
앞서 얘기한 일상성에 대해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일상성이라 하면 대개는 '보통'의 '평범함'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가 펼쳐내는 일상성은 조금 다르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날들에 숨어 있는 특별함. 너무 익숙하고 흔해서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그 길 이면의 진귀한 풍경을 펼쳐보여준다. 그러니까 일상성 속에 숨어 있는 비일상적인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 도로 공사로 인해 8년간 언제나 걸어다녔던 길에서 벗어나 한 번도 지나간 적 없는 길에 든 여성이 보았던 커다란 동백나무 같은 것 말이다. "겨우 몇 미터를 벗어나 다른 길을 걷는 것만으로 이런 정경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그곳에 살았던 8년간, 매년 그 동백은 소리 소문 없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는 사라져갔겠지요. 왠지 돈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손해를 봤다는 느낌입니다." 오래된 저택 옆의 공터에서 마주친 커다란 동백나무 앞에서 그녀는 '판에 박힌 인간의 행동', 일상성에 젖어있는 인간의 안일한 고집이 세계를 얼마나 보잘것없이 축소시키는가를 깨닫는 것이다. 여기 담긴 열네 편의 이야기를 통해 후지와라 신야는 우리가 모르는 길, 혹은 무심히 지나쳤던 길 구석구석에 숨어 있던 '동백나무'(들)을 보여주고 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종종 묘지에 들어가게 된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적막함 속에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바라본다. 이 세상과 저세상이 뒤집혀, 문득 이 세상이 저세상으로 보인다. 죽음이라는 영원의 세계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살아 있는 자들이 사는 세상이 한순간의 환상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들어온 나 자신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칠 때, 이상한 안도감이 생겨난다. 그런 안도감에 싸여,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온 죽은 자에게 바치는 다채로운 빛깔의 꽃들을 본다. 그 꽃들은 순식간에 퇴색할 것이다.
ㅡ <누가 바친 꽃입니까?> 중에서
그의 사진은 여전히 어둡고 흐릿하다. 그런데 암울하지는 않다. 그 풍경은 '안도감'을 선사한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다른 누군가 같이 보고 있다는 데에서 오는 일종의 감격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공감'을 찾아헤매는 동물이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고, 눈앞의 모든 것은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면서 스러져 간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을 나는 놓칠 수 있고,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은 못 볼 수 있다. 저마다 가는 길이 다르고 마음의 방향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가끔은 익숙한 길을 등지고 다른 길로 들어서 보아도 좋겠다. 거기 숨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들과 조우해 보자. 오래 전의 코스모스 들판에서 여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