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 베이커 자서전 : 성장
러셀 베이커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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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서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자서전은 세상에서 알아주는, 알아줄 만한 위대한 업적을 쌓은 이들의 전유물 아닌가. 그러므로 그 위대한 사람들은 자서전을 쓴다. 대개 자서전의 내용도 위대하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는 남들과 다르다. 남들보다 월등하다. 그런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보통 사람들은 절망한다. 이런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남달랐구나. 나 같은 인간은 똥줄 빠지게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되겠구나. 이것이 자서전에 대해 내가 가진 편견이다. 그리고 편견은 깨어지라고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읽은 달리(Salvador Domingo Felipe 1904~1989) 자서전은 내 편견을 통쾌하게 박살내 주었다. '달리'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서전에서도 역시 '달리'였다. 젠체하지 않았다. 재미있고 매혹적인 자서전이었다. 자서전에 대한 내 편견이 조금 말랑해졌다.

 

 






   그래도 역시 대부분의 자서전은 거리감이 들고, 그래서 재미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내가 읽은 자서전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생각해 보니 정말 그랬다. 편견이란 참 무서운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을 펼쳤다. 달리와 달리 러셀 베이커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미국에서 꽤 알려진 언론인이라는 간단한 정보밖에 없었다.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자서전의 제목 때문이었다. 성장(Growing up). 반 고흐의 밤하늘과 같은 푸른 바탕에 새겨진 그 심상한 단어와 새 두 마리. 어미로 보이는 새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보다 작은 새를 바라보고 있다. 골똘한 표정이다. 작은 새와 큰 새가 서로를 쳐다보는 것을 쳐다보면서, 나는 그 두 마리의 새가 어쩌면 한 마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자서전을 펼쳤다.

 

 






   잘 자랄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이 있다. 잘 될 사람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장래성을 보인다는 말이다. 러셀은 남다른 "떡잎"은 아니었다. 소심하고 얌전한 아이. 공부만 잘하는 아이. 하긴 요즘 세상에서는 공부 잘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커야 했던 러셀은 어머니의 권유로 새벽 신문배달을 해야 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길, 그 적막 속에서 러셀은 세상을 읽고 자기 자신을 읽었다. 가난은 끝이 없었고 러셀의 신문배달도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 러셀은 장래를 고민했다. 러셀은 대학은 꿈도 못 꾸었다. 그런데 우연히 친구에게서 장학금 제도를 알게 되어 시험을 치른 러셀은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한다. 바야흐로 신문배달의 시기가 끝나고 언론인의 문턱에 슬쩍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러셀은 공군에 자원입대한다. 비행훈련학교 시절 연인 미미를 만난다. 미미는 좋은 여자였지만, 러셀의 어머니에게 미미는 '좋은 여자'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에게 아들의 연인은 "좋은 여자"일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홀로 아들을 키운, 그냥 키운 것도 아니고, 아들의 출세를 위해 온힘을 기울인 러셀의 어머니에게는 더욱 그랬다. 아들의 연인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어머니. 그러나 그 어머니도 한때는 누군가의 아들의 연인이었다. 할머니 역시 지금 러셀의 어머니처럼 어머니를 적대시했다. 러셀은 미미와 어머니의 관계, 그리고 먼 옛날 할머니와 어머니의 관계를 떠올리면서 생각한다. 인간의 삶은 이상하게도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라고.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간 '어머니'로부터 출발한다. 동맥경화로 쓰러진 여든의 어머니는 생의 폭풍에서 벗어나 그녀의 요람기로 돌아갔다. "검정색 긴 스타킹을 신고 봉긋한 소매가 달린 파란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나비 모양의 매듭을 묶은 소녀는 61년 전 어느 날의 설렘과 기쁨에 가득 차 있다. "오늘 기분 최고예요. 아빠가 나 오늘 배 타고 볼티모어에 데려 가신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어머니를 따라 희망 없는 과거 여행을 계속하며 나는 내 과거를 그토록 쉽게 내버린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가를 깨달았다. 우리 모두는 과거에서 왔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생겨나게 한 그 과거에 대해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인생이 아주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시간으로부터 현재에까지 뻗어 있는, 사람들로 엮어진 동아줄과도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며, 인생이란 결코 기저귀에서 수의壽衣를 입기까지의 한 뼘의 여정으로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22쪽)


 












   기억이란 참으로 이상하다. 몇십 년이 지난 일도 바로 조금 전의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가 하면 어제 겪은 일이 감감하여 잡히지 않기도 한다. 나이들수록 인간의 기억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임사체험자들은 자신이 죽음에 빠져 있었을 때, 마치 영사기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눈부신 흰 빛 속에서 과거의 경험이 차르륵 빠르게 재생되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사람이 죽었을 때, 남은 자들은 말한다. 그가 돌아갔다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오른다. 할머니는 죽기 몇해 전부터 말言을 잃었다. 숟가락이나 주걱, 빗자루, 내 이름까지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애써 뭔가를 말했지만 내가 들을 수 있던 것은 옹알이를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웅얼거림이 전부였다. 할머니는 똥 싸는 법도 잊어버렸다. 숟가락으로 밥 먹는 것도, 얼굴을 씻는 것도 다 잊어버렸다. 그러다 어느 날, 돌아갔다. 더이상 잊어버릴 것도, 잃어버릴 것도 없이, 끝없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시간마저 잃어버린 그때, 할머니는 영원히 돌아갔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 닿으면 사람은 뒷걸음질을 시작하는 것일까.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가는 것 아닐까. 자신의 뿌리를 향해, 그림자를 향해, 요람을 향해.

 










   내 기억 속의 고모부는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고모부는 그 얘기를 어느 날 저녁, 애기 고모가 부엌에서 코코아를 준비하고 있는 동안 내게 들려주었다. 고모부는 당신이 태어나던 순간, 당신의 어머니는 기뻐 어쩔 줄 몰라 했고 의사는 "아들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고모부는 특히 그 의사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방 안에는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당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냈다. 고모부는 그 사람들의 얼굴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고모부는 그분들에게 미소로 답했다. (236쪽)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은 특별하다.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는 여타 자서전과 달리 러셀의 자서전에는 주변 인물들 모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러셀은 자기 삶의 무대를 독차지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지 않은가? 인간은 홀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니까. 누구나 사람들 속에서 성장하니까. 주변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묘사는 이 책을 읽는 매력 중 하나이다.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이리저리 친척집을 전전했던 러셀은 거기서 만났던 이웃과 친척들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책 치고 이렇게 평온하고 재미있기도 힘들 것 같다. 가난하고 무지한 노동자들에게는 대공황이나 2차 세계대전이 또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러셀 베이커의 문장은, 역자의 공력도 크겠지만, 문법에 크게 어긋나지 않고 간결해서 좋다. 읽기에 거슬리지 않는다. 러셀의 '위대한' 삶이 엉성한 문장 때문에 어그러지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다.

 







   나는 세상의 혼란상을 주로 '전쟁 카드놀이'에서 배웠다. 야구 카드놀이처럼 그것도 풍선껌 안에 들어 있었다. 그 카드에서 일본인들은 중국에서, 이탈리아인들은 에티오피아에서 잔학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부녀자와 아동에 대한 살육이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었다. 나는 이 카드놀이를 통해 일본은 나쁜 놈, 중국은 좋은 놈 그리고 이탈리아는 나쁜 놈, 에티오피아는 좋은 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313~314쪽)

 










   러셀 자서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삶에 순응한다. 양치기가 이끄는 대로 따르고 그 안에서 조용히 풀을 뜯는 것으로 만족하는 순한 양과 같은 삶. 이렇게 말하면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수많은 욕망이 출렁이는 이 세계에서 '순응'은 별로 매력적인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순응하는 삶'은 비겁하고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에 실패한 낙오자가 마지못해, 겨우 붙들고 비트적거리는 비루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그 안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 자기 안의 숨겨진 빛을 틔워올리는 일. 그것이야말로 순응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실로 요즘 사람들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삶 속에서 허덕이는지!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도 마음이 갑갑하고 불편해진다. 러셀 자서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연스럽다. 그 자연스러움이 나를 감동시킨다.

 









1933년 4월 30일 :


"엘리자베스에게,


당신의 편지 고맙게 받았습니다. 아니요, 당신이 저에게 잘못한 일은 없습니다. 저에게 잘못한 건 공황입니다. 저는 가진거 전부를 세금으로 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끝장입니다. 그 때문에 당신에게 편지쓰지 말라고 하는겁니다. 저는 당신과 편지를 쓰면서 정말 당신을 좋아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서로를 더 가깝게 만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저는 돈을 더 빌리 수도 업습니다. 한 푼도 빌릴 수 업습니다. 저는 지금 상황이 조금 좋아지면 덴마크로 돌아갈라고 합니다. 아마 거기서 살겁니다. 모든 걸 잊어주십시오. 저는 이제 희망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돌아갑니다. 거기서 언젠가 다시 돌아오면 당신이 결혼하지 안고 있으면 당신을 도와줄수 있다면 도와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좋은 남자를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올루프를 알았던 걸 잊어버리십시오." (142~143쪽)


 






   어린 아이들은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은 앞만 본다. 눈앞에 펼쳐진 저 미래의 빛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안달한다.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어른이 되고 싶은 열망 속에서 아이는 빠르게 성장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러셀 베이커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어른의 조건은 단순히 육체적 성장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무엇일까. 표지 그림을 장식하는 두 마리의 새. 앞서 나는 그것이 두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 단독의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어른이 된 자아와 그 안에 살아있는 과거의 자아. 그것이 '성장'이 함축하고 있는 바가 아닐까.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뒤를 돌아보게 된다.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가늠하기 시작한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 그것은 인간의 본능 같은 것이 아닐까. 아이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앞으로 뻗어나가고픈 열망이라면, 어른을 성장시키는 것은 뒤를 돌아보는 일이 아닐까. 자기 피와 뼈를 이루고 있는 시간과 그 속에 살아있는 사람들. '나'를 키운 것은 그 모든 지나간 것들 속에 있음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 그것이 저 표지 위의 새들과 《러셀 베이커 자서전, 성장》이 일깨워주는 아름다운 가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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