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언젠가 - 개정판
츠지 히토나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누구에게나 사랑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은 있다. 이제와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을까’ 무척이나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것은 흐르는 시간에 의한 침식의 탓도 있겠지만, 사랑이 품고 있는 비현실적인 성격, 환상의 탓이 아닐까 한다. ‘사랑의 콩깍지 씌여버렸어’ 유행가 가사도 있지 않은가. 사랑은 예측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잡아둘 수도, 마음대로 털어낼 수도 없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되며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랑도 운명적이라고 생각한다. 

방콕으로 부임한 유타카는 미츠코와의 결혼을 몇 달 앞두고 토우코와 환락의 나날을 보낸다. 토우코는 전남편의 배신으로, 어마어마한 위자료를 받고 이혼한 여자다. 뜨거운 방콕의 열기 속에서 토우코는 유타카를 유혹한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유타카는 그녀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한다. 그렇게 넉 달간의 만남이 시작된다. 그 만남의 기간 동안 그들은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일에 몰두한다. 그들이 만나고, 사랑을 나누는 장소는 방콕의 유명한 고급호텔, 오리엔탈이다. 오리엔탈 호텔은 백 년 이상의 유구한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다. 아득한 시간을 품고 있는 곳. 영원의 시간이 흐르고 있는 곳. “이곳은 방콕이 아니야. 오리엔탈 호텔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 일본인 사회와도 동떨어진 별세계.” 그곳은 세상과 동떨어진 또 하나의 장소였다. 비현실적이고 비일상적인 가공의 세계. 바로 환상의 세계였다. ‘소리 없는 공간에 떠 있는 우주선’과 같은 그 환상의 세계에서 유타카는 불안을 느끼지만, 오히려 그 불안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마력으로 작용했다. 유타카는 토우코와 함께 끝도 없이 펼쳐진 아득한 우주공간으로 빠져 들어간다. 극도의 절망감에 사로잡힌 토우코의 유혹에서 비롯된 그들의 만남은 신비한 마법과도 같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사랑으로 발전한다. 유타카와 토우코는 마음에 싹트는 사랑의 감정에서 갈등을 느끼며 괴로워하지만, 그들만의 장소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각자의 현실세계로 돌아간다. 그리고 25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들은 운명적인 재회를 하게 된다. 바로 오리엔탈 호텔에서. 시간을 돌고 돌아 그들은 다시 그곳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평생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말, ‘사랑한다’는 말을 서로에게 들려준다.

처음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 때, 토우코의 육체적 도발과 유타카의 흔들림에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불륜이지, 이게 사랑이냐. 조금 더 읽었을 때에는 사랑을 잃고 마음을 다친 토우코의 극단적 슬픔의 표현에 공감이 갔다. 연약함은 언제나 죄의 씨앗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소설가 전경린이 그랬듯이,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쁜 사람들이 아닐까. 이것저것 헤아리고, 적당한 선을 지키고, 현실과 타협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은 끝내 별세계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유타카와 토우코가 서로의 육체를 탐하며 지낸 넉 달 간의 시간을 사랑이냐 아니냐 얘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유타카와 토우코의 만남을 지켜보며 공감하지 못할 부분들이 더 많기는 했지만, 역시 사랑은 알 수 없는 것이므로, 그들만의 장소, 별세계에서의 일이므로, 어떤 사랑도 제삼자가 개입하여 저울질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들이 서로의 외로움과 상처를 보듬어주었다는 것. 길고 길었던 25년의 시간보다도 짧은 넉 달의 시간 속에서 이해하고, 위로했다는 것. 이해받고, 위로 받았다는 것으로 충분히 그들의 만남은 귀중하다. 25년의 시간이 지나 유타카가 찾은 방콕. 고층의 건물들이 새로 들어선 방콕 시내의 변화 속에서도 오리엔탈 호텔만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그곳은 세상의 시간이 미치지 않는 곳, 유타카와 토우코만의 별세계이기 때문이다. 유타카와 토우코가 평생 서로를 그리워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연애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기피하는 편인데, 츠지 히토나리의 '해협의 빛' 에 대한 추억 때문에 읽게 되었던 소설, 『안녕, 언젠가』는 나만의, 우리만의 별세계가 사라지고 난 빈자리를 뼈저리게 일깨워주었다. 오래전 내가 잃어버린, 사랑을 향한 순수한 열정, 무조건적인 신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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