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책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제 1장 내가 <검은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뤼야는 침대 머리맡에서 끝까지 펼쳐져 있는 푸른색 체크무늬 이불의 물결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계곡, 푸른색 언덕을 덮은 달콤하고 따스한 어둠에 싸여,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자고 있었다. 이것이 이야기의 시작, <검은책>의 첫 문장이다. 열대야 속에서 이 문장을 열 번 이상 읽었던 것 같다. ‘뤼야’라는 단어에 달린 주석- 터키어로 ‘꿈’이라는 뜻 -의 의미심장함과 길게 늘어지는 만연체의 문장 탓이었다. “푸른색 체크무늬 이불의 물결”과 “그림자가 드리워진 계곡”, “푸른색 체크무늬 이불”과 “푸른색 언덕”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느라 문장의 물결 속을 헤매면서 나는 아렴풋한 ‘꿈의 무게’를 가늠했다. 문장이 꿈같구나. 묵직한 <검은>책의 무게, 그것만큼 무겁구나, 라고. 내가 <검은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제 2장 사라진 뤼야(꿈), 드러나는 꿈(제랄)


[명사]
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
2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
3 실현될 가능성이 아주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나 생각.


‘꿈속’에서 ‘꿈’을 추적하는 남자가 있다. 그가 추적하는 ‘꿈’의 이름은, ‘뤼야’와 ‘제랄’이다. ‘뤼야’와 ‘제랄’은 남자의 ‘기억의 정원’에 그림자만 남긴 채 사라졌다. “아주 사랑했던 아름다운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그를 떠났습니다. 그는 그녀를 찾기 시작했지요. 도시의 어디를 가든지 그녀의 흔적과 만납니다. 그녀 자신이 아니라요.” 폐허처럼 되어버린 ‘기억의 정원’에서 남자는 과거의 얼굴들, 소리, 냄새, 의미들, 그리고 ‘알고 있지만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던’ 고통스러운 욕망- 다른 사람(제랄)이 되고자 하는 -과 마주친다.


제 3장 우리는 책 속에서 ‘나 자신’을 잃었다


꿈같은 단어와 문장들의 늪 - <검은책>은 늪과 같은 책이다. 아니, 늪이다. 수많은 은유와 상징. 수상한 암호들이 하늘을 향해 ‘초록의(제랄의 초록색 펜)’ 가지를 뻗치는 안개의 숲이다. 한없이 깊고 어두운 우물의 어둠을 응시하다가 마침내는 어둠의 힘에 이끌려 우물 밑으로 침잠해가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난삽한 문장과 실험적 구성은 어지럼증과 하품, 난독難讀의 좌절감을 안겨주었지만 그럴수록 나는 조금씩 <검은책>의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깊은 울림을 지닌 인용구들과 풍부한 어휘들로 이루어진 ‘기억의 정원’에서 ‘꿈’을 추적하는 ‘나’를 추적했다. <검은책>을 읽는 동안 나는 ‘추적하는 동시에 추적당하는 자였다.’ 갈립이 기억과 ‘문자들’ 속에서 ‘꿈’ - 뤼야와 제랄 -을 추적할 때 나 또한 ‘나의’ 꿈을 추적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눈目에게 추적당했다. 갈립이 제랄이 되어갈 때, 나도 흐릿해지는 ‘나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생래적 결핍에 대한 인식이 불러온 모방에의 욕망, - ‘꿈’인 동시에 ‘절망(혹은 재앙)’이다 - 그 검고 깊은 늪 한가운데에서.


제 4장 뤼야와 제랄의 죽음 그리고 '나'의 부활


그 무엇도 인생만큼 경이롭지 않다.
유일한 위안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꿈속’에서 ‘꿈’을 추적하는 남자는 ‘재앙’과도 같은 존재(제랄)의 죽음으로 ‘꿈’(뤼야)를 찾게 된다. 그리고 부활한다. 그는 새로운 생 - 글쓰기 -을 부여받는데, 그것(글쓰기)은 뤼야(꿈)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위안, 위대한 놀이가 되어줄 것이다. 배움은 흉내에서 시작하며 흉내의 끝은 창조다.


제 5장 <검은책>의 신호들


특별히 좋아하는 작가의 경우는 차치하고 내가 소설을 고를 때 주목하는 것은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소설을 읽기도 전에 그런 것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결코 그 소설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래서 자상한 사람들은 서평을 쓰고, 나와 같이 ‘미지의’ 소설(책)을 골라야 하는 독자들은 서평을 읽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책을 단념하거나 혹은 펼친다. <검은책>도 그렇게 만났다. 물론 <검은책>의 작가 오르한 파묵에 대해서는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안다,라고 표현하기는 했으나,  굵직한 글씨로 인쇄된 신문의 표제는 읽었지만 정작 본문은 읽지 않은 사람의 그것처럼, 그에 대한 앎은 표면적이며 얕았다. 오르한 파묵. 터키의 작가. 200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이 정도. 그런 내가 그(오르한 파묵)의 숲, 아니 늪에 발을 내디딘 것이다. (아아, 한여름밤의 지난한 독서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의 이야기(소설)를 ‘늪’에 비유한 것은, 쉽게 단정할 수 없는 모호한 단어들의 배열갈립의 ‘끈질긴’ 추적의 모양새를 닮은 길게 늘어지는 문장들, 갈립과 뤼야와 제랄의 자취를 추적하는 이야기 사이사이 제랄의 칼럼이 소개되어 있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의 콜라주 기법’과 그에 따르는 복합시점- 전지적 작가시점,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의 채용으로 읽는 이를 난감하게 하지만, 암호같은 표현들은 충분히 매혹적이고 오르한 파묵 특유의 ‘정교한 복잡함’은 오히려 주의를 환기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 뤼야와 제랄의 행방불명과 그들을 추적하는 갈립을 통한, 자신이 동경하는 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정체성의 상실을 겪는 현대인의 갈등과 절망, 독서와 글쓰기의 행위에서 어쩔 수 없이 야기되는 모방과 모방에서 빚어지는 창조의 과정에 대한 암시는 눈 밝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검은책>의 독자가 될 누군가를 위하여 나는 여기에 쓴다. 오르한 파묵, 그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노라고.

 

                                                            

                                                                                                                                          .         H070811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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