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데기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덴마크의 우울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두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은 ‘죽을 수 없음’으로 하여 싹트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정신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자아를 탈피할 수 없고 無로 화할 수 없는 절망. 새롭게 태어날 수 없는 절망.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이 끊긴 상태. 그것이 절망이라고.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는 이런 의미에서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죽음으로 점철되는 소설 속 ‘탄생’의 순간들은 뜻 깊은 것이다. 주인공 ‘바리’의 탄생을 보자. 바리의 탄생은 소설 구조적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소설의 유의미적 측면에서도 그 뜻이 깊다 하겠다.


오래전부터 우리에게는 죽은 이를 저승으로 천도하는 비슷한 구성과 내용의 굿이 전국적으로 전해내려오고 있는데, 지노귀, 오구, 오기라고 합니다. (중략) 이 굿의 여러 과장 중에 무속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말미, 바리공주, 바리데기, 칠공주 등의 서사무가가 거의 같은 내용으로 한반도 전 지역에서 구송되어 오면서 47종의 구술자료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 서사무가의 줄거리는 그리스의 오르페우스나 북유럽의 오딘 신화처럼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서 저승을 다녀오는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무당이 자신들의 원조인 바리가 겪은 고통과 수난에 대한 줄거리를 구송함으로써 고통받은 고통의 치유사또는수난당한 수난의 해결사임을 자처하려던 것 같습니다. (중략) ‘바리’를 ‘버린다’의 뜻으로 해석하여 무가의 내용대로 ‘버린 공주’로 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바리’를 ‘발’의 연철음으로 본다면 ‘발’은 우리말에서 광명 또는 엇던 것을 새로 만들어낸다는 생산적인 뜻이 있는 말이지요. 그러므로광명의 공주’ ‘생명의 공주’ ‘소생의 공주라는 뜻도 있겠지요. 

 

                                           - 2007/06/21 한겨레 <작가와의 인터뷰> 중에서

 

 

이처럼 ‘바리의 탄생’은 중의적이라 하겠다. ‘바리’ 자체가 이미 하나의 ‘생명’이요 ‘광명’이므로 그렇다. 작가 황석영은 ‘세상의 어둠’을 드러내기 전에 하나의 ‘빛 - 광명의 공주’을 탄생시킨 것이다. ‘세상의 죽음’을 그리기 전에 ‘생명의 공주’, ‘소생의 공주’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저의에는 음울한 ‘죽음’이 넘쳐나는 세상에 대한 ‘희망’과 ‘구원’의 뜻이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리’의 딸 홀리야(자유)의 죽음과 소설의 마지막, ‘바리’가 부푼 배를 안고 울먹이며 ‘아가야 미안하다’ 한 것은 일견 절망을 암시하는 것 같지만 앞서 내가 얘기한 절망과 죽음의 개념에 비추어 내가 본 것은 결국 ‘희망’이었다.

 

나는 굳이 여기서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하지 않겠다. 소설의 줄거리에 대한 정보는 내 글이 아니더라도 쉬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소설의 형식적 구조에 대해서는 꼭 얘기해야겠다. 나는 소설이라는 것은 무엇보다 ‘재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참 재미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이야기들 - 굶주림, 탈북, 전쟁, 테러 -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소설은 회상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화자, 그러니까 ‘바리’의 이야기는 스물한 살에서 끝나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는 성인이지만 그의 이야기는 태어난 순간부터 스물한 살까지의 것이어서 소설의 절반 이상이 미성년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 그래서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그는 낡고 물빠진 작업복을 입고 헝겊배낭과 손풍금을 짊어졌다. 그러고는 엄마를 따라 마루로 오르기 전에 아직도 약간 겁을 먹고 있는 우리들 머리를 차례로 거칠게 헝클어뜨렸다. 외삼촌은 아마 그게 머리를 쓰다듬어준다는 손짓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미꾸리 아저씨는 연길의 중국회사 부장 되는 남자였다. 몸집이 똥똥하고 아랫배가 볼록 나왔는데 놀란 토끼처럼 눈이 똥그래서 얼굴만 봐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또 하나의 소설의 묘미는 이북 방언의 실감나는 재현에 있다. 거기에 더해 작가가 던져주는 능청스러운 유머가 소설 곳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자네 이름이...... 샤오룽이라. 쬐그마한 용이라 그런 얘기디. 내 보기엔 그 체격으루 용은 아니구 맹꽁이가 맞갔는데.”

“아 무스거 말씀입네까 형님. 시절을 못 만나개지구 두만강 개천에서 왔다리갔다리 하지만 이전엔 몸집두 날씬하구 꼬챙이 같다구 영화배우 나갈 뻔했습네다.”

 

이러한 유머에서 나는 작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엿보았다. 또한 ‘바리’가 지옥에서 만난 넋들과의 대화에서, 압둘 할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세상의 수많은 ‘악’까지도 포용하고 그 안에서 ‘선’을 지향하는 정신, 용서와 화해와 사랑이 곧 생명수라는 작가의 신념을 읽을 수 있다.


 

 

 

“말 좀 해봐. 우리가 받은 고통은 무엇 때문인지. 우리는 왜 여기 있는지.”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래. 남보다 더 좋은 것 먹고 입고 쓰고 살려고 우리를 괴롭혔지. 그래서 너희 배에 함께 타고 계시는 신께서도 고통스러워하신대. 이제 저들을 용서하면 그이를 돕는 일이 되겠구나.”

(중략)

“어째서 악한 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지, 우리가 왜 여기서 적들과 함께 있는지 알아왔어요?”

“전쟁에서 승리한 자는 아무도 없대. 이승의 정의란 늘 반쪽이래.”

(중략)

“우리의 죽음의 의미를 말해보라!”

“신의 슬픔. 당신들 절망 때문이지. 그이는 절망에 함께하지 못해.”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그런데 육신을 가진 자는 누구나 살아가면서 지상에서 이미 지옥을 겪는 거란다. 미움은 바로 자기가 지은 지옥이다. 신은 우리가 스스로 풀려나서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오기를 잠자코 기다리신다.”


 

 

 

세계의 어두움을 응시하고 인식할 수 있는 힘. 그것이 곧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의 의미였다. 그리고 절망은 곧 죽음으로 비가역적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은 새로운 ‘탄생’, ‘빛’, ‘희망’이라는 것. 나는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에서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죽어야 한다.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나와 세계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태어나야 한다. 끊임없이 죽고 나는 것. 그것이 곧 삶이 아니던가. 


                                                                 . H07073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