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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스틱 피플
파브리스 카로 지음, 강현주 옮김 / 브리즈(토네이도)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그런 순간들이 있다. 너무나 익숙하여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에 대해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진실과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것’의 표면, 껍데기였을 뿐이었다는 진실. 우리를 뒤뚱거리게 하는 그 진실의 무게가 무수한 허위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어둠이 들어앉은 다락방에 올라가 먼지 낀 시간의 시체들을 뒤적여보기도 한다. 그러나 생을 향한 배신감과 상실감은 먼지를 털어내듯 툭툭 털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세계의 폐허 위에 흩어진 허술한 생의 편린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고독 속으로 침잠한다. 고독 속에서 소리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존재를 가리켜 ‘사회적 동물’이라 하였다. 사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삶의 장소이다. 사회 내에서 개인은 원하든 원치 않든 타인과의 접촉을 하게 된다. 무수한 낯선 타인들과의 접촉에서 우리는 때와 장소, 관계에 따라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본능적으로 익혀왔다. 적당한 가식은 그래서 사회적 동물의 불가무한 것이 되었다. 이런 내용의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새삼스럽게 여겨질 만큼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되어있다. 오히려 한결같이 꾸밈없는 사람 -이 과연 존재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은 반사회적인 바보 취급을 당하는 형편이다. 이러한 ‘일상적 가식’에 대한 불감증은 길을 헤매는 집 잃은 개처럼 우리들의 진실이 생의 언저리만을 맴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서야 비로소 집(생의 진실)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 왔다는 자각과 함께 혼돈에 빠진다. 생을 흉내내는 허위가 있을 뿐 생은 없는 것이다. 진실의 부재. 생의 부재. 이것이 사회적 동물들의 진실이다.
 
‘나’는 단 한 편의 희곡도 완성해본 적이 없는 서른 살의 희곡작가다(소설의 장과 장 사이에 그의 희곡이 실려있다). 딱히 열정적으로 글을 쓰지도 못하고 있는 그의 주된 일상은 신문의 부고란에 실린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례식의 형식이나 분위기에 대한 평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조용히 슬픔에 잠긴 채 어쩌면 허구일지도 모르는 고인에 대한 감동적인 추억 속에 빠졌다.” (p.20)
 
‘나’의 인간관계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 부모님, ‘나’보다 모든 면에서 월등한 동생, ‘나’에게 성적 환상을 심어줄 만큼 매혹적인 동생의 애인 안나, 그리고 예술 후원자이자 친구 부부인 쥘리앵과 클레르가 그의 일상의 중심을 채우는 인간관계의 전부다. 똑같은 일상의 궤도 - 그 한복판을 채우는 가식적 인간관계에서 ‘나’는 ‘인간은 원래 고독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쥘리앵과 클레르 부부는 나에게 매주 다섯 끼의 식사를 제공했고, 나는 매주 다섯 차례 그 두 사람 중 누구도 꿈꾸지 않았던 삶 앞에 그들만 덩그러니 남겨지는 것을 막아 주었다. 우리는 사막에서 나름대로 초라한 해결책을 찾아냈던 것이다.” (p.16)
 
“늘 그래 왔듯이 아버지는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아버지는 누가 봐도 무관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자식을 걱정하는 아버지 역할을 말없이 완벽하게 수행하면서 죽은 닭의 엉덩잇살을 조금씩 음미하는 데 만족하고 계셨다. 동생은 냉동 강낭콩에 대한 불만을 쏟아 놓는 것으로 나를 도우려고 나섰다. 동생은 화제를 돌리려고 애를 썼다. 결국 어머니는 화제를 바꾸셨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오늘 오후에 안나를 만날 거니?” 동생은 닭다리에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오늘 오후에 만날 거니?” 이 말은 달리 보면 나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오늘 오후에도 너는 아무도 안 만나니?” (p.25)
 
“머리를 맞대고 식사를 하면서, 쥘리앵은 주로 클레르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특별히 새로운 사실을 알린다기보다는 큰 목소리로 정기적인 종합 보고를 한다고 할까. 미치광이로 보이지 않으려면 자신이 떠들어대는 동안 누군가를 앞에 앉혀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p. 31)
 
인용문에 그은 밑줄 위의 단어들에서 나는 일상적 가식과 그것에서 빚어지는 권태를 본다. 그리고 그것의 이름은 ‘죽음’이라는 것을. ‘나’의 희곡(연극을 위한 글) 쓰는 행위와 장례식에서의 형식적 슬픔은 일상적 가식(연극적 일상)을, - 소설의 말미에서 ‘나’의 희곡 속 등장인물들이 ‘나’의 현실로 들어오는 설정이 있는데,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사라진 이러한 설정은 우리의 현실이 곧 연극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  장례식과 더불어 자주 언급되는 ‘죽음’은 일상의 허위가 빚어낸 개인의 정체성 상실, 진실(혹은 생의)의 부재를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왜 사람들은 겨자 소스를 곁들인 죽은 토끼요리라고 말하지 않는 걸까? (중략) 사람들은 왜 바스크식 죽은 멧돼지 스튜라고 말하지 않을까? 어쩌면 자신의 종말을 떠올리게 하는 건 무엇이든 되도록 피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p.13)
 
*피귀렉이라는 인간파견회사의 직원 - 곧, 배우 -과 ‘나’의 첫 만남을 ‘장례식’에서 이루어지게 한 설정은 그런 견지에서 볼 때 의미심장한 것이다. 말한 대로 피귀렉은 인간파견회사의 직원이다. 타인의 생에서 결여된 존재를 대신 연기해주는 자들이다. 허위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나’는 피귀렉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자신을 둘러싼 무수한 생의 허위들을 직면하고 자신 또한 허위의 노예였다는 무서운 진실에 도달한다.
 
“나이가 들고 새로운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거대한 바위는 조금씩 부서지기 시작하여, 결국 반쯤은 바람에 날아가 버린 시커먼 잿더미가 되고 만다. (중략) 더 이상 깨질 수 없는 것도 깨질 수 있으며, 가루 역시 더 미세한 가루가 될 수 있고, 다 나았다고 믿었는데 어느 순간 재발하고 마는 종양처럼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지점에서 기만당할 수도 있다.” (p.190)
 
“무슨 놀이를 하는 거니?”
“그럼 아저씨는 무슨 놀이를 하는 거예요? (중략) 아저씨는 모든 것을 놓치고 있어요. 아저씨는 내 또래 아이들처럼 아저씨의 장난감을 엉망으로 망가뜨리고 있어요.” (p.276)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골콘드(Golconde,1953)를 모방한 이 책의 표지그림은 ‘플라스틱 피플’이라는 제목과 더불어 책에 담긴 내용과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똑같은 생김새의 남자들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그림에서 받는 충격과 혼돈은 생의 허위를 확인한 순간에 받는 충격만큼이나 강렬하다. 생의 ‘허위’와 ‘진실’을 우리는 어떻게 구별하는가. 그리고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하며 한편으로는 지켜나가는가. 가식이 반드시 나쁘다고 여기지 않는다. 해로운 진실보다는 이로운 거짓이 낫다. 나는 착한 거짓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선한 목적에서 비롯되는 가식은 사회적 동물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배려다. 각설하고 - 다시 골콘드로 돌아와서, 그림 속 똑같이 보이는 남자들 중 누가 진짜일까.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래서 이들을 만져볼 수 있다면 나는 즉각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갈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고? 그렇다면 나는 아무것도 확신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지나칠 것이다. 진실과 허위, 진짜와 가짜. 그것은 표면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나’는 왜 ‘플라스틱 피플’ 속에서 길을 잃었는가.
 
“매일, 한 노부인이 바게트를 고르고 돈을 지불한 후에 훈제 햄 조각이 들어있는 장바구니에 바게트를 담는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매일, 한 경찰관이 자동차들이 정확하게 보이는 시야가 확 트인 덜 혼잡한 교차로에 서 있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매일, 우체국의 한 창구 위에는 ‘잠시 문을 닫습니다’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 그 뒤로 대머리에 두꺼운 안경을 낀 50대의 남자가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매일, 다섯 명의 여자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후 9시부터 9시 40분까지 정문 앞에 모여 있다. (중략) 내가 다가간다. “피귀렉이신가요?” (p.185,186)
 
그 스스로가 ‘플라스틱 피플’이었기 때문이다. 볼품없는 진실보다 그럴듯한 허위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쓰디쓴 진실을 삼키기보다 달콤한 허위를 찾아 헤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신은 당신이 만들어 낸 이미지를 통해 당신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가장 사악한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가장 사치스러운 거울, 가장 값비싼 거울을 즐겼을 뿐입니다.” (p.250) 
                                                                   



*프랑스어로 단역배우는 ‘피귀랑(figurant)’ 또는 ‘피귀라시옹(figuration)’이다. ‘피귀렉(figurec)’이란 명칭은 이에 착안하여 만든 조어이다. (역자 주) 
  

 

                         H070726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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