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구경 - 불타의 게송
등하 지음 / 법공양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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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을 가리키지 못하는
천 마디 말 어디에 쓰랴
듣는 이의 마음을 바로 쉬게 하는
일구(一句)의 법문이 값지고 귀하다(50면)

학문을 하는 것은 항상 뭔가 허전했다. 거목의 잎사귀들은 가을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데, 그 생생하고 광활한 흐름에 동참하지 못하는 허전함 같은 것. 뭔가 타는 목마름이 있어 학문을 했겠지만, 이제 그 목마름이 가시니 천 마디 말, 만 마디 말이 모두 부질없다. 이제는 학문을 하게 했던 그 마음을 쉬게 하는 한 마디 법문이 더 귀하고 더 값지다. 아니, 그 마음을 쉬게 되니, 한 마디 법문이 참으로 귀한 것임을 알겠다. 그 "일구의 법문"들은 너무나 분명한 것들이어서 도리어 얻기가 힘들었나 보다. 법구경의 한마디 한마디 법문을 듣노라면 마치 산사의 수조에 또르르 떨어지는 물을 마시는 듯하다. 특별할 것 없으되 참 맑고 깨끗한 것. 몸 안으로 흘러 마음을 적시는 것이 마치 물 흘러 꽃 피듯 하다.

"법구경은 원래 부처님의 법구를 모은 게송집이었다. 다시 말해, 이 경은 부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연달아 한번에 설하신 것이 아니라, 불멸 후 경전 결집이 이루어지고 난 몇 백년 후에, 법구존자가 아함경 가운데 나오는 게송을 두루 살펴, 요긴하고 핵심적인 것들을 가려서 엮은 경"(345면)이다. 법구존자는 한 마디 법문, 한 편의 게송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국내에는 번역본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등하스님 번역의 법구경은 그중 가장 최근의 역본이다.

번역본들을 일일히 비교하여 우열을 논하는 것은 피하겠다. 그런 것도 내가 목마를 때에나 하는 것일 터. 등하스님 역본으로 읽으면서 더없이 흡족했기 때문인 지도 모르겠다. 그저 등하스님 역본의 몇 가지 특징만 언급하고 싶다.

먼저, 이 역본에서는 전통적인 용어 내지 선불교 문헌의 용어가 비교적 눈에 많이 띈다. 무량겁, 삼독, 염리, 정념, 단견, 상견, 선열, 근기, 선근, 안심입명, 본분사, 일대사, 두타행 등등. 그래도 이런 정도의 것들 이외에는 특기할 만큼 생소한 용어는 없다. 법구경 자체가 워낙 평담한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인들이 어렵다고 느낄 용어에는 책 뒷편에 역주를 달았다. 가령 염리(厭離)에 관한 역주는 이렇다:

진리에 눈뜨게 될 때, 그 동안 미망에 사로잡혀 애착하거나, 각성된 마음이 부족하여 단호히 끊고 떠나지 못하던 것을, 비로소 그 실상을 바로 봄으로써 진실로 싫어하는 생각이 일어나 마음이 거기서 아주 떠나 자유로워지는 것.(333면)

이런 역주는 학자의 역주가 아니다. 학자 너머의 안목을 갖춘 분의 역주이다. 역주 하나하나가 법문 같다. 사성제, 팔정도, 정념, 단견, 상견 등에 관한 역주는 가장 짧게 가장 깊이 일갈하는 법문 같아서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다음으로, 선택된 낱말들이 맑고 문체가 아름답다. 법구경 뿐만 아니라 초기경전들의 빨리어 번역본들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아쉬운 것은 우리말의 아름다움이었다. 굳이 버릴 이유가 없는 전통적 불교용어들을 대부분 버리고서 풀어서 번역하느라 그랬는지, 도무지 경전의 문체와 낱말이라고 할 수 없는 역본들이 즐비한 것이다. 그러나 등하스님 역본은 존중해야 할 전통적 불교용어를 그대로 살렸고 문체도 드물게 뛰어나다. 그리고 하나하나 낱말의 선택이 예사롭지 않다. 그 예들:

열반이란 비어있음이요, 자취가 없는 것
해탈자의 행로여,
허공을 나는 새가 날개짓의 자국을 남기지 않듯,
그 가는 길에도 자취가 없네(211면)

욕망의 밀림에서 모든 나무를 남김없이 제거하라
한두 그루 베어 넘기는 것으로 그치지 말지니
비구여, 그 밀림에서 두려움이 일지 않더냐
욕망을 자취 없이 근절하여 두려움에서 벗어나라(226면)

정념수행(正念修行)을 즐거워하고
늘 나태와 방종을 경계하는 수행자를 보아라
크고 작은 장애를 뚫고 거침없이 나아간다
온갖 것을 사르며 번지는 불길같지 않으냐(261면)

니체의 통찰을 빌자면, 일상화된 언어는 더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닳아버린 동전과도 같다. 언어가 보편화될수록 그 언어를 사용하는 자의 해석권에 더 깊이 함몰되기 때문에, 그만큼 원래의 자리에서 이탈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현대인에게 생소한 전통적 용어가 오히려 불교의 가르침을 더 직접적으로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한 용어는 현대의 해석지평를 끊어야 비로소 드러나는 자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에 익숙한 용어만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현대의 해석지평으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이 생각이 끊어진 자리를 겨냥하고 있을진대, 현대의 해석지평에 무작정 동화시켜도 괜찮은 것인지 재고할 필요가 있겠다. 등하스님 역본은 이러한 고심을 한 흔적이 역력하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법구경은 매우 쉽고 간결한 느낌을 주는 법문이다. 그러나, 그 안의 함의는 아무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깊이와 날카로움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지나치게 쉽게 푸는 데만 치우쳐 옮기다 보면, 높고 현묘한 법문을 그저 밋밋하고 너무 평이하거나 오히려 모호해져버리게 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하였다. [...] 대중성만을 고려하여 무작정 쉽게 하는 번역보다는, 좀더 정확한 개념과 분명한 사상적 틀을 통하여 불법의 참뜻과 그 위대성을 가능한 한 왜곡 없이 파악하도록 하는 번역이 시기적으로 더 큰 효용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344면)


결국, 결론은 "무엇보다 곡해 없이 여래의 뜻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데 제일 큰 주안점을"(343면) 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현대의 해석지평도 끊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용어도 취사선택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서 새롭게 번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침내 "여래의 뜻", "불법의 참뜻"을 아는 것이 관건이다. 그리고 이것이 번역본의 성패를 가르는 분수령이기도 하다. 그 분수령을 향해 가 보자:

부처님은 과연 산문(山門)의 세월이 깊어갈수록 그리워지는, 스승 가운데 스승이다. 그 옛날, 그 분이 우리처럼 땅 위를 걷고, 말하고, 우리를 바라보았을 그 때는 진정 그립고 그리운 시절이다.

아, 그 분의 용맹한 지혜는 만고에 변치 않는 히말라야의 설봉(雪峰)처럼 드높아, 온갖 미혹된 소견과 팔만사천의 번뇌를 거침없이 부숴버렸고, 그 분의 헤아릴 수 없는 자비심은 드넓은 인도평원 저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가장 낮은 각도에서 뜨고 지는 태양빛처럼 따스하게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어 적셨으리라. 모습은 사자처럼 위엄이 넘치고, 걸음걸이는 코끼리처럼 당당하고…… 호숫빛 같은 눈매는 타르사막 한가운데서 한밤중에 바라보는 별빛 같았으며, 진리를 설하는 음성은 태고의 파도소리처럼 잔잔하면서도 저항할 수 없는 힘과 깊이가 서리고 맑았으리라.

이 경에는 실로 그런 부처님의 면면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혹시 이것이 법구경의 본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러나 이것은 역자의 <옮기고 나서>의 한 대목이다. 부처님의 지혜, 그 분의 자비심, 그 분의 모습, 그 분의 걸음걸이, 그 분의 눈매, 그 분의 음성을 이처럼 장엄할 수 있다니, 마치 부처님을 곁에서 모셨던 어느 제자가 오늘의 한국에 살아온 듯했다. 그것도 누구보다도 유려하게 우리말을 구사할 줄 아는 어느 제자가.


이런 안목이 있기에 역자스님은 법구존자의 편집을 재배열할 수 있었겠다. 논리적 연결보다는 게송에 등장하는 낱말을 중심으로 분류한 법구경의 기존 편찬에, "조심스런 마음으로 약간의 틀을 벗어난 시도를 감행"(346면)한 것이다. "내리 읽어나가도 끊어지지 않고, 점점 법의 대해 속으로 깊어져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를 기대"(346면)한 역자스님의 이 시도에는 산문에서 정진하는 수행자의 맑고 두렷한 눈길이 들어 있다. 이 눈길은 낱말의 선택에서도 드러나며 운율, 문체에서도 드러나며 편집에서도 드러난다. 역주와 옮긴이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이 역본을 일이관지하는 것은 한 마디로 '선승의 두렷한 눈길'이다. 부처와 선지식과 수행자를 한 꼬치에 꿰는 듯한 눈길.

이런 책을 평할 때 드는 유일한 아쉬움은 이것이다. 역자의 한마디 한마디는 황금덩어리 같은데, 이 책을 평하는 나의 앎은 깨진 기왓장 같다는 것. 그리하여 내 기쁨은 실로 크기만 하다:

어머니가 살아계신 세상은,
아버지가 살아계신 세상은 기쁨이다
수행자가 있는 세상은 큰 기쁨,
성스러운 수행자가 있는 세상은 진실로 큰 기쁨이다(30면)

역자스님께 삼배를 올린다. 그리고 이 책을 선물해 주신 분께 두손 모아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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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 (空) - A Scent Of Korean Buddhist Temples 소리로 떠나는 그곳, 山寺
Various Artists 노래 / MFK(뮤직팩토리코리아)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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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생전에 출가한 이 몸, 돌계단의 발길도 무거운데", 정태춘의 <탁발승의 새벽노래> 가사이다. 이 가사에는 정태춘이 절집에서 생활하면서 자고 먹고 씻고 예불 드리고 소요했던 발걸음이 담겨져 있다. 절집에 유난히 많은 것이 돌계단이요, 돌계단을 딛고 오르는 때만큼 무수한 상념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시간도 드물다. 그런데 그 돌계단의 발길이 무겁다. 이 한 마디에는 말로 하기 힘든 그 무엇, 귀와 눈과 몸으로 부딪혔던 흔적이 어려 있다. 정태춘의 허투로 웅얼거리는 듯한 창법도 아마 그 흔적과 함께 피어났을 것이다. 그에게 그의 것을 선물했던 절집의 소리는 그러면, 과연 어떤 것일까.

절집의 생활은 새벽 3시 기상, 3시 반에 새벽예불, 아침공양, 운력, 소임, ... 이렇게 일과가 되풀이된다. 이 일과들은 경내 이쪽에서 저쪽까지 오고가는 발걸음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발걸음마다 매듭을 짓고 푸는 것은 절집의 음악, 절집의 소리이다. 도량석, 명고타종, 예불문, 목탁소리, 죽비소리, 빗질소리, 찻물 따르는 소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 나무잎이 흔들리는 소리, 비오는 소리,... 이 소리들은 수행자들의 발걸음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 소리를 따라 일어나고 소리를 따라 절하고 소리를 따라 눕는 그네들의 감각은 누구보다 소리에 예민하게 노출되어 있다.

空, 이 음반은 이 한 글자 표제를 달았다. 절집 소리의 본질을 뚫어본 것일까. 절집 수행자들의 소리소리에는 근본적으로 진여의 자리에서 퍼져나오는 울림이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제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조차 장악하거나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풀어서 허공으로 흩어버리는 수행자들의 예불소리. 목탁소리, 법고소리, 범종소리, 이 모든 것도 듣는 이들의 마음을 휘어잡지 않고 그저 그 마음들조차 풀어서 함께 허공으로 흩어버린다. 그리고 그 소리들에 맞추어 합장하고, 절하고, 무릎꿇고, 일어서고, 걷고, 공양하고, 빗질하고, 눕는다. 모두가 한낱 환(幻)이고 공(空)인 것을! 그러나 이 환과 이 공은 중생심에 사로잡혀 일생을 끌려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정확히 지칭하는 것일 뿐, 수행자들의 세계가 허하고 공한 것은 아니다. 수행자들은 중생심의 환과 공을 물안개처럼 흩으며, 맑은 청계가 되어 청량하게 흘러간다. 그들은 끊임없이 흩어지는 소리들 속에서 걷고 머물고 앉고 눕지 않던가!

그러나 수행자들의 그 소리가 천편일률일 수는 없다. 절집마다 대중스님들의 성향이 있어 혹은 절집 내력이 있어 그 흩어지는 소리들이 저마다 일가를 이루고 있다. 가령, 해인사 대중들의 명고타종과 예불은 사자가 벼랑을 타고 오르는 듯 기세가 충천하며, 송광사 대중들은 완만한 산세처럼 옹골차고 너그럽다. 운문사 비구니 스님들은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곱고 단아하고 야무지다. 이 음반은 이 세 절집의 종송, 명고타종, 예불을 녹음해 놓았다.

녹음된 세 절집의 예불소리에는 법당 밖에서 바람따라 흔들리는 풍경소리, 지저귀는 새 소리, 수조의 물 떨어지는 소리도 함께 들린다. 녹음자가 절집 소리들을 훼손할 수 있는 인위적 노력을 일체 삼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당 밖 명고타종 후 이어지는 법당 안의 작은종 소리와 예불문 앞자락이 녹음되지 않았다. 명고타종 후 녹음장비를 들고 법당 앞으로 옮기기까지의 시간이 그대로 비어 있는 것이다. (녹음장비가 워낙 고가의 장비여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다.) 그래서 마치 예불자가 법당 밖에서 명고타종 소리를 끝까지 듣고나서 돌계단을 밟고 금당 안으로 들어서는 듯한 공간적 이동이 느껴진다. 명고타종 소리를 내처 듣고 오르는 돌계단의 발길은 가볍고 소리는 비어 있는데, 잠시 후 지심귀명례가 들려온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세 절집의 명고타종과 예불문 만으로도 충분히 음반의 값어치를 하고도 남는데, 또 한 장의 음반을 여분으로 제공하고 있다. 여러 절집들의 소리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호거산과 가야산의 계곡 물소리, 수덕사 풍경과 새벽 종소리, 삼경(三更)의 부엉이와 아침의 새 소리, 개심사 홍송 숲에 내리는 가랑비 소리, 무위사의 조그만 시냇물 소리, 일지암 찻물 따르는 소리 등등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이산혜연선사발원문, 반야심경, 천수경, 보례진언, 관세음보살 기도문 등도 함께 담았다. 음반 내지의 설명도 알차게 편집되어 있다.

진작부터 이런 명고타종과 예불문 녹음 시디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구하기가 어려웠다. 한번은 해인사 예불 녹음 시디가 있길래 구입하였더니, 참으로 무정하게도, 예불소리에 무슨 백뮤직처럼 소위 '명상음악'을 깔아서 녹음한 것이었다. 대중의 취향을 맞추어서 그렇게 했다고 하는데, 글쎄, 그 대중이 참 어떤 것인지 두렵기만 하다. 모든 예술은 최상을 겨냥하지 않으면 반드시 삼류로 전락하게 되어 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상을 겨냥해야 비로소 이류라도 될 수 있는 것이거늘, 어찌 최상의 것을 그 아래의 것에다 맞추려 하는 것인지 참 안타깝지만 했다.

그러나, 이 음반이 있어 이제는 행복하다. "지심귀명례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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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가르침 (양장)
증곡문웅 / 불교시대사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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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교경전이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이다보니 불교 초학자들이 어느 경전을 먼저 읽어야 할지 종잡기 힘들다. 불교의 세계를 알아가면서 불교의 각 종파를 알게 되고 그 종파들이 저마다 제일의 가르침으로 꼽는 소위 "소의경전"이라는 것도 아는 단계에 이르면, 무엇보다 "불교사상의 원류, 경전의 원시림"으로 평가받는 «아함경»을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함경»은 원전인 빨리어본, 그리고 한역본이 현존한다. 사실 한역본은 산스크리트어역본에서 번역한 것인데, 이 산스크리트어역본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실전되었다. 그간 국내에 번역된 «아함경»은 한역본에서 번역한 것이므로, 이것은 빨리어본-산스크리트어역본-한역본-한글역본의 삼중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역에 중역을 거듭하여 오역의 가능성이 많으므로, 빨리어본에서 직접 번역할 필요가 있음은 당연하다. 더구나 빨리어본과 한역본은 그 체제가 다를 뿐아니라 내용이 다른 대목이 많으므로 "경전의 원시림"에 최대한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빨리어본 «아함경»을 직접 번역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이 시대에 이 역경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재가신자인 전재성 박사의 번역으로 «쌍윳따니까야»(잡아함, 총11권, 1999년~2002년), «맛지마니까야»(중아함, 총5권, 2003년)가 완역되었고, 각묵스님의 번역으로 «디가니까야»(장아함, 총3권, 2006년)가 완역되었다. 이것은 최근 육칠년 사이에 진행된 작업이다. 각묵스님은 «아함경» 완역을 목표로 하고 있으므로 각묵스님 번역본의 «맛지마니까야»와 «쌍윳따니까야»도 수년 내에 출간될 것이다. 두 분의 역경사업은 필생을 건 작업이자 단독의 작업이다. 나는 두 분의 역경사업에 대하여 평할 만한 역량이 되지 않거니와, 설령 역량이 된다해도 차마 평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많은 번역자들처럼 고료를 바라고 하는 작업이 아니라 필생을 건 청빈하고 고독한 작업이며, 비록 흠결이 있다하더라도 아주 먼훗날 완결본을 위한 위대한 밑거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쉬운 점은 이러한 번역본들이 모두 주석을 상세히 달고 있고 편집이 조밀하지 않아 권수가 많고 가격도 권당 3만원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빨리5부 중에서 3부만 번역된 «아함경»의 한글번역본을 모두 구입하려면 거금 57만원이나 든다. 우리가 한글로 번역된 «아함경»을 읽기 위해서 거금을 들여 모두 19권(나머지도 번역되면 더 많아질 것이다)을 구입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함경»을 읽으려는 열망을 사그러지게 하기 마련이다. 그에 비해 독역본이나 영역본의 경우 각 니까야 별로 한 권씩, 그러니까 3권만 구입하면 된다는 사실은 참 난감하기까지 하다. 물론 언젠가는 우리도 각묵스님과 전재성 박사의 공들인 번역을 밑거름으로 콤팩트한 경전을 소유할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현재, 한글역본의 비대함을 피하는 가운데 «아함경»을 맛볼 수는 없을까? 있다. 전재성 박사의 «오늘 부처님께 묻는다면»과 «명상수행의 바다»를 읽는 길이다. 전자는 "한 권으로 읽는 쌍윳따니까야"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쌍윳따니까야»에서 주요하다고 생각되는 경들만 추려놓은 것이며, 이와 동일하게 후자는 "맛지마니까야 엔솔로지"가 부제이다. 이 두 권은 독자가 전재성 박사 번역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간단하나마 «아함경»을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하나의 길이 있다. 이제 이야기하려는 책,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빨리어본 «아함경»에서 채록하여 일역한 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이 책의 편역자는 增谷文雄, 즉 마스타니 후미오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편역자를 "증곡문웅"이라고만 표기해 놓아 검색을 불편하게 해 놓았다. 그래서 마스타니 후미오의 «불교개론»이나 «아함경»을 감동적으로 읽었던 나도 이 책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도서관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빌려와 찬찬히 읽어보니 과연 마스타니 후미오였다.


이 책은 아함부에서 뽑아낸 약 90여편의 경전을 모두 8장으로 나누어 편집했다. 이 가운데 제1장 '구도'와 제2장 '전도의 시작' 그리고 제7장 '최후의 설법'은 대체로 편년사적 순서로 배열했다. 또 제3장 '근본설법'에서 제6장 '비유설법'에 이르는 것은 모두 설법의 내용과 주제, 형식과 유형에 따라 집록했다. 제8장은 '성구'편인데 여기서는 약 150개의 성구를 수록했다. 이것들은 대부분 부처님의 말씀이지만 몇 가지는 제자들의 것도 있다. 이런 방식은 «법구경»에서 배운 것이다.

한 가지 더 밝혀둘 것은 번역용어에 관한 부분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옮기는 데 더 뜻이 있으므로 경전고유의 서술방식이라 하더라도 뜻이 통하도록 과감히 손질을 했다. 그리고 옛 불교술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늘의 적당한 말로 바꾸었다. 다만 '여래' '열반'과 같은 용어는 현대의 말로 바꾸기 어려워 그대로 두었다. 옛 번역자들도 이런 경우는 '존중고'(尊重故)라 하여 그냥 두었던 선례가 있다. 그러나 인명과 지명 등 고유명사는 종래의 한역을 피하고 원음을 표기했다.

마스타니 후미오의 머리말에서 인용한 위 인용문은 이 책의 소개문으로 읽힐 만하다. 위 인용문에서 "경전고유의 서술방식이라 하더라도 뜻이 통하도록 과감히 손질했다"는 말은, 경전의 정형구나 반복구를 생략하였고 그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뜻이 통하도록 필요한 문장을 삽입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책의 무게를 덜기 위한 방편일 뿐 뜻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들고 다니기에 편한 한 권의 책으로 «아함경»을 맛볼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머리말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소개해야 할 점이 한 가지 있다. 마스타니 후미오는 «아함경» 빨리5부뿐만 아니라 율장까지도 망라하여 채록하긴 했지만, «쌍윳따니까야»에서 주로 채록하였다. 이는 «쌍윳따니까야»가 긴 설법들을 모아놓은 «디가니까야»나 중간 길이의 설법들을 모아놓은 «맛지마니까야»에 비해 각 경의 길이가 짧고 또 고층(古層)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택과 편역자 나름의 의도에 의하여 이 책에 실린 경들은 짤막짤막하다. 그래서 읽기가 수월하면서도 한 대목 한 대목 쉬면서 읽도록 만들고 있다. 읽고 쉬는 호흡이 참 편하다. 경전처럼 늘 곁에 두고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실제로 이 책은 경전이다!

그리고 이 책은 각 경마다 출전과 그 경전명을 밝히고 있어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다. 그것도 빨리5부와 한역아함경을 공히 밝히고 있다. 하기야 빨리5부와 한역아함경의 비교목록을 세계 최초로 제시한 이도 일본학자이니 이러한 색인작업은 일본인으로서 아주 쉬운 일일 것이다.

마스타니 후미오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본이 1936년~1942년 사이에 빨리5부의 경전뿐만 아니라 율장과 논장까지 완역한 이후에 이뤄진 결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현재 일본에는 한역경전들을 문헌비평하여 편집한 «大正新修大藏經», 한역경전류를 일역한 «國譯大藏經», 그리고 빨리어 삼장을 비롯한 남방의 중요 전적을 일역한 «南傳大藏經»이 완비되어 있다. 세계에서 일본만큼 불교의 문헌을 완비한 나라도 없다. 이러한 성과 이후에 마스타니 후미오 같은 학자들도 나오는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같은 간략한 경전도 나오는 것이다. 빨리어 삼장의 번역만을 놓고 비교하자면 우리나라는 일본에 한 60년 정도 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학문의 진보가 반드시 신심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종교의 불가사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불교의 학문적 연구의 진보가 불교 자체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일까? 불교의 역사나 문헌 등의 사실을 아무리 분명하게 밝혀 낸다고 해도, 이것으로 불교에 대한 신심이나 실천이 반드시 깊어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미즈노 고겐, «경전의 성립과 전개» 198면)

자국의 학문적 연구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질 만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겸허함을 갖춘 일본 불교학자들의 세계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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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병기 / 가야금작품집 4집 춘설
황병기 연주 / 씨앤엘뮤직 (C&L)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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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음반에 실린 음악들을 듣기까지 얼마나 먼 길을 돌아온 것일까. 나는 20년 가까이 서양음악의 애호가로서 지내왔으나, 황병기의 음악을 들으면서 비로소 그 20년이 이질적인 것들에 적응하려고 애쓴 세월임을 알았다. 물론 모차르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 모차르트조차도 내가 영원히 안길 수 있는, 혹은 내가 숨결처럼 들이쉴 수 있는 음악이 아님을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내 생각을 구성하고 있는 정신적인 재료들이 수년 간 서서히 동양적인 것들로 채워지면서 내 감각들 역시 변하기 시작하였다. 첫 신호는 서양의 책들에 대한 기피였고, 다음으로는 동양의 고전과 미술에 대한 관심이었다. 종교적인 관심도 가톨릭에서 불교로 바뀌었다. 그래도 가장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음악적인 요소였다. 가장 나중까지 모차르트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이 음반을 구입하기까지 내가 가진 국악 음반으로는 죽파의 가야금 산조밖에 없었다. 그것도 10여년 전에 구입하고 나서는 거의 들어본 기억이 없다. 느릿하고 권태롭고 무미하게만 느껴졌던 탓이다. 그러나 황병기의 곡과 연주들을 들어보면서 나는 말할 수 없는 정신적인 상쾌를 느꼈고, 순식간에 국악에 빠져들었다. 이제 죽파의 가야금 산조를 들어보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죽파의 연주를 두고 "권태로움을 아는 위대한 예인의 연주"라고 평했던 듯한데, 서양의 세계관에 머물면서 평하자면 확실히 그런 평이 옳게도 여겨질 수 있겠지만, 지금 내 귀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제 김현이 "권태로움"이라고 평한 그 부분을 나는 "잔잔함"이나 "졸박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추함의 미학"까지 내려간 서양미학의 세계에서 국악의 극적이지 못한 요소들은 확실히 권태로움으로 느껴질 수 있는가 보다. 내가 쌓은 세계, 혹은 내가 속한 세계가 달라지면 음악도 이렇게 달리 들릴 수 있는가!

«춘설»은 '나'라는 것이 이렇게 달라졌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준 음반이다. 이 음반을 들은 것을 기점으로 나는 거문고 밑도드리, 가야금 정악, 산조, 가곡, 판소리 등등을 듣게 되었다. 이제 국악을 듣기 시작한 초보인 셈인다. 그런데도 굳이 나서서 이 음반을 소개하는 까닭은, 서양음악이 조금씩 덜 들리기 시작하는 분들이 자신의 취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가늠자로 이 음반만한 것이 없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춘설»은 모두 황병기가 작곡한 곡들로 채워져 있으나 연주악기의 종류는 가야금, 대금, 거문고 등으로 상이하며, 음반 내지의 설명도 뛰어난 글들로 채워져 있어서 국악에 접근하고자 하는 분들이 제1감으로 택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가령 여음餘音에 대한 황병기의 생각은 한국 음악에 대한 그의 깊은 성찰 한 자락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소리 하나에 관심을 모으고, 여음이라는 자연적인 상황에 주목하는 것이, 여러 가지 줄튕김 행위에 의해 생겨나 조금씩 변화하는 음색, 그리고 현을 지긋이 눌러줌으로써 생기는 미분음적 뉘앙스와 잔잔한 농현을 느끼고 감상하는 태도와 어울린다. 한국의 음악미학에서 이것은 인간이 자연과 나란히 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여음이 있는 줄튕김악기의 소리는, 있기는 있으되 한계를 아는 인간의 역할과 근본적이되 멈출 곳을 아는 자연의 역할 사이의 균형이라는 지고의 미적 이상을 충족해 준다.

 

- 황병기 글/ 김세중 번역, 음반내지 21면에서

 

가야금과 거문고의 연주기법은 하나의 음이 울리고 난 뒤의 사라지는 과정을 중시한다. 이러한 자세와 철학이 "여음"이라는 낱말을 낳았는데, 가령 가야금의 경우 오른손으로 소리를 튕기자마자 왼손으로 농현을 하여 그 사라지기 시작하는 소리를 흔들거나 꺾거나 높히거나 내린다. 서양음악의 경우에는 소리의 냄과 소리의 끊음이 중요하지 냄과 끊음 사이의 소리를 흔들거나 어루만져 미분음적인 상태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차이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병기는 "서양철학은 합리적이다. 사고에서는 논리, 예술에서는 통제가 중시된다. 논리나 통제가 없으면 결과의 타당성이 의심받는 예는, 전위적 우연성 해프닝으로 만들어지는 소리를 음악으로 볼 수 있느냐 문제 삼는 일부 비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주자가 음의 지속과 세기를 장악하는 줄비빔악기는 서양의 음악예술 개념을 만족시키며 따라서 높이 평가받는다"(음반내지 21면)고 일갈한다.

그래서인지 국악에서 하나의 음이 나와서 사라지는 과정은 마치 한 소절의 음악, 혹은 한 프레이징의 음악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음 안에 이토록 풍부한 세계가 깃들 수 있으므로, 우리나라 음악은 굳이 서양음악처럼 규칙적이고 긴박한 박자로 기동성을 끌어올리거나 반복적 선율을 통해 뭔가를 구축하거나 화음이나 대위법으로 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두고 황병기는, "양악에서는 음들이 일정한 규격의 벽돌처럼 취급되어 여러 음으로 구축물을 쌓아 올리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대하여, 국악에서는 음들이 각기 특이한 형태의 자연석처럼 존재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석으로 정원을 꾸미는 식으로 음악을 만드는 것"(황병기,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102면)이라고 말한다.

황병기는 서양음악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것들은 국악의 본질적인 요소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박자와 장단, 기동성과 농현, 화음과 유니슨, 소리와 소리의 간격, 머릿소리와 여음 등등, 서양음악과 국악의 머나먼 거리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그리고 그 차이점들이 어떤 정신적인 내용으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깊이 성찰하고 있다. 이 성찰이 바로 그의 작곡에 고스란히 흘러들어가 있으며, 그래서 그의 곡들은 실험과 혁신이 가득하면서도 전통적이다. 쉽게 말해, 국악의 정신적인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는 가운데, 혹은 우리나라의 정신성을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추구하는 가운데, 전통적인 음과 음의 관계, 연주기법 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서양 현대음악의 출발점들에 대하여 나름대로 고심해본 음악애호가들은 황병기의 이런 성찰과 그 결과물이 놀랍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황병기가 작곡한 곡들 중에서 시기적으로 뒤의 것들이다. 작곡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국악에서 황병기의 작곡은 사실 작곡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더 나아간다. 정악적 요소와 민속악적 요소의 배합, 아방가르드로서의 작품, 고대세계의 상상적 복원, 산조적 작곡, 화음과 반음계의 도입, 판소리 요소의 도입 등등, 그의 곡들은 언제나 실험적이면서도 언제나 전통적이다. 실험성의 측면에서는 <미궁>을 앞설 만한 곡이 없겠으나, 전통적 음악이면서도 전통적 기법을 넘어선 강도는 음반 «춘설»에 실린 곡들이 다른 음반의 곡들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서양의 현대음악처럼 낯선 실험성의 음악이 아니라 지극히 전통적이다. 전통적이라면 뭔가 퀴퀴함을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황병기의 곡과 연주는 격조가 있고 단아하다. 이를 두고 조슬린 클락Jocelyn Clark은 “황병기와 같은 이들의 창의적인 노력을 통해 전통음악은 아픈 과거의 연상을 지워버린다”(음반내지 16면)고 평한다.

젊은 시절 정악과 민속악을 다 배워 아악과 속악의 경계를 넘나든 첫 연주자로서 황병기는 그의 글과 음악을 통하여, 전통음악이라면 흔히 연상되는 것들, “퀴퀴하고 졸박함, 망가진 산하, 촌티나는 해학, 전쟁의 상흔 따위 이미지”(조슬린 클락, 음반내지 6면)를 불식시켰다. 가령, 함동정월의 가야금 산조를 듣노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아픔이 느껴지지만, 황병기의 곡과 연주는 그런 먹먹함이 아니라 그 먹먹함을 대신하는 쓸쓸함이나 적막함이 느껴진다. 그는 정악의 소박함, 덤덤함, 유장함 등을 알고 있으며, 동시에 민속악의 한恨, 아픔, 신명, 조촐함과 화려함 등을 알고 있다. 이 음반에 실린 곡들은 이러한 양편의 언어들을 대부분 동시적으로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한과 아픔의 언어만큼은 그대로 취하지 않고 대신 적막함으로 변화시켜 취한 듯하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적막한 채로 머물 뿐 슬픔이나 아픔에 물들지 않으며, 느릿느릿하면서도 탄력이 넘치며, 덤덤히 흐르다가도 화려하게 달린다. 그의 음악을 듣노라면, 비유컨대, 옛날 웃방에 놓여 있었던 허름한 반닫이가 이제 격조 높은 미술품이 되어 전시장에 전시된 것을 보는 기분이 든다.

공자는 "시를 통하여 일어나고 예를 통하여 확립하고 음악을 통하여 완성한다興於詩 立於禮 成於樂"(«논어» 泰伯篇)고 말했다. 황병기는 공자의 이 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실천한 독보적인 현대인일 것이다. 황병기의 음악이 들리고 거문고 정악이 들리는 이즈음, 서양음악을 들을 때는 납득하기 어려웠던 공자의 이 말을 나는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 듯하다. 망가졌던 이 산하에서 성어악成於樂의 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기만 하다. 이 성어악의 소리를 이 음반뿐 아니라 «침향무», «비단길» 등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복된가.

어느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건너가는 것은, 어느 한 작품이 계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 황병기의 이 음반은 그 역할을 하기에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나는 이 음반을 듣고서 내가 이미 국악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았다. 제 위치를 확인한 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 거문고 정악과 산조, 가야금 정악과 산조, 가야금과 거문고 병창, 가곡, 판소리 등등을 이제 듣고 있다. 만약 거문고의 밑도드리가 근원적인 친밀함으로 다가온다면 이미 그 사람은 국악의 세계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러나 사실 요즘 사람들이 가야금 산조를 듣고 국악으로 건너가는 계기가 마련되기는 쉽지 않을 성싶다. 가야금 산조를 들을 때 느껴지는 그 뭔가의 아픔 때문이다. 그 아픔과 슬픔을 알고 있되 거기에 물들거나 빠지지 않는 황병기의 곡과 연주는 그래서 권할 만하다. 그러면서도 황병기의 곡은, 황병기의 곡이 잘 들리는 분에게는, 이전에 잘 듣지 못했던 가야금 산조, 판소리 등의 민속악으로 건너가는 다리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정악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이것 역시 황병기의 음악이 지니고 있는 크나큰 매력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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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월폴라 라훌라 지음, 전재성 옮김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전재성 역본은 약간 심하게 말해서 라훌라 스님이 쓴 «What the Buddha Taught»의 역서가 아니다. 전재성 역본으로 읽다보면 나름대로 잘 읽히다가도 팔정도 대목에서 한없이 늘어질 것이다. 역자가 자신의 글을 수십 면 삽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본 제목조차도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이다. 물론 원저에 역자의 글을 삽입하면서 별도의 표기를 해 주었다면 참을 만하겠지만, 그런 표기도 해놓지 않았다. 팔정도 대목 뿐만 아니라 “일일이 거론하기가 무척 어려워 밝힐 수가 없”을 정도로 곳곳에서 역자가 라훌라 스님의 글을 보완했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저자의 글이고 어디까지가 역자의 글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역자의 의도는 분명 보완이었겠지만 독자인 내 입장에서는 보완이 아니라 훼손이다.

더구나 전재성 역본의 역어들은 내가 서양인문학을 거치면서 머리속에서 털어내었던 개념들을 대다수 포함하고 있어서 글을 읽을 때 꼭 모래알을 씹는 기분이 든다. «What the Buddha Taught»에 어엿하게 실려 있는 Selected Texts(pp.91~138) 대목을 아예 빠뜨린 것도 의외다. (원저는 Selected Texts를 부록이 아니라 본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 역본은 라훌라 스님의 책이 아니라, 저자와 역자의 합작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역자 역시 이점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거지 성자» 등을 읽으면서 역자의 인생에 대하여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는 독자로서 이런 비평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정말 가슴 아프지만 라훌라 스님의 저서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 물론 나와 의견을 달리하여 전재성 역본의 상세한 보완 의도를 좋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나는 라훌라 스님의 «What the Buddha Taught»의 또 다른 역본,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이승훈, 경서원)를 추천한다. 그 책에 대한 서평에서 밝혔지만, 탁월한 번역이다. 물론, 전재성 역본이 나은 점도 있다. 전재성 역본은 라훌라 스님의 빨리어 텍스트 출처를 근간된 PTS 판본의 출처로 바꾸는 수고를 하였으며, 일일이 주석 형식으로 빨리어 원문을 싣고 있다. 이 장점을 제외하고는 이승훈 역본의 우위가 현저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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