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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카슨 매컬러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여행이나 출장 중에 읽을 책은 비교적 가벼운 에세이류나 실용서가 적합하지만, 마땅히 가져갈 책이 없던 관계로 이번 출장 길에 이 책이 짐 꾸러미에 포함된 것은 정말이지 행운이었습니다. 사실 가는 비행기안에서부터 읽은 초반에는 별 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의외로 후반으로 갈수록 소설의 속도감과 끝없는 깊이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이 책을 고른 건 아주 오래 전에 EBS에서 본 흑백영화 때문 이었습니다. 전혀 스토리도 기억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늘 제목을 잊지 않고 있었죠. 아마 그 기억이 없었다면 고려원 소설 풍의 책표지에 다소 닭살스럽고 작위적인 제목의 이 책을 고를 일은 없었을 겁니다. 물론 소설은 이와 상관없이 아주 좋았습니다. 이렇게 간단히 말해 버리는게 미안할 정도로.
소설의 중심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근원적인 고독, 소통의 불가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인공들이 느끼는 외로움은 곁에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주는(혹은 이해해준다고 믿는) 벙어리 청년 존 싱어로부터의 구원을 기대하지만 그 구원자 역시 허상일 뿐입니다. 온전한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이해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작가는 냉정한 사실을 단 한줄 여분의 문장없이 담담하고도 세밀하게 묘사해갑니다. 지극히 사사로운 영역의 문제에 이토록 강렬하리만치의 리얼리티를 부여한 것은 순전히 작가의 힘일겁니다.
소설은 읽기에 따라 사춘기 소녀 믹의 가벼운 성장기로도 보여질 수 있지만 의외의 폭과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30년대 미국 남부의 빈부차와 인종갈등,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바라보는 작가의 예리하고 통찰력있는 시각은 독자로 하여금 “엉클톰스캐빈”같은 동정심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이미 60여년전의 사실이니 유효기간이 지났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다른 모습으로 진행중인 문제일지도 모르죠) 나처럼 작품 전반에서 은근히 내비치는 동성애적 코드를 찾아내는 엉뚱한 독자도 있을테구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시계수리공인 믹의 아버지에게 맡겨진 고장난 시계처럼 정지된 미국남부 소도시의 황량한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조용히 소용돌이치는 혼란과 의문, 분노와 욕망들은 반복과 어설픈 변주, 불협화음을 이루며 믹이 틈틈이 쓰는 습작교향악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이 걸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이러니하게도 시적일만큼 아름답습니다. 삶이란게 그런 걸까요. 희망은 어김없이 우리를 배신하고 삶은 여전히 내 몫일 뿐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존 싱어같은 메시아를 기다리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