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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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늑대와 춤을]이라는 영화를 보았을 때 부터였나? 아니면 <호텔 아프리카>를 열광적으로 보았을때 부터였나.

난 인디언이란 존재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갖고 있다. 자연과 진정으로 공존할 수 있는 어리석지 않은 인간...이라고나 할까나. 게다가, 잔학무도한(?) 미국의 실상을 가장 여실히 보여줄 수 있는 실례가 되지 않았던가. 인디언의 역사를 읊으면, 그만큼 미국을 씹을 수 있다.-_-;;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은 이번이 두번째 이다. 첫번째는 고3 수능이 끝나고 나서였는데, 너무나도 잔잔한 내용에 쉽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만 책을 덮어버렸다. '호텔아프리카'의 지요와 같은 인디언은 책 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5년의 시간이 흐른후, 난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뭐... 내가 선택한 책이긴 했지만, 어쨌든 일때문이기도 했다.) 정말 오랜만에 찡,한 느낌을 받았다.

이 책의 원제는 'The education of little tree'. 즉, 작은 나무의 수업 또는 교육이라고 할 수 있겠다. 5살때 부모님을 잃은 작은나무(아이의 이름이다.)는 체로키 인디언인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인디언으로서의 자부심과, 인디언 특유의 자연과 공존하고 이야기 나누는 법을 배운다. 그렇다고 무슨 화려한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에게 마음을 열고 귀 기울이면 된다.

그리고 중,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체로키 족의 슬픈 역사와 그들이 인디언이기에 겪는 모멸감과 고통 등의 이야기가 나오면 정말 슬퍼진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작용하는 극적인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이상하게 슬픔이 스며져온다.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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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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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언제였더라.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가 온 나라에 열풍을 일으켰던 때가. 그때, 난 꽤나 많은 베스트 셀러들을 탐독하는 문학소녀(?)였지만, 유독 그 책은 읽지 않았었다. 분명히 읽기 위해 펼쳐든 기억은 나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몇장 읽지도 않고 그만 덮어버렸다. 만화의 세계에 입문하던 그 시절, 더 급히 읽고 싶었던 다른 만화책에 밀려 우선순위에 밀려버렸거나 누군가에게 빌렸다가 다시 돌려줘야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한국 도서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 작가의 책을 난 단 한권도 읽지 않았었다. (실제로 베르나르는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에서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책을 팔았다고 한다. 그에 감복한 그는 자신의 작품에 언제나 한국인을 등장시키는 등 한국인의 사랑에 열렬히 보답한다나?;;; 이 책에서도 한 마음착하고 현명한 젊은 한국여자가 등장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이 책을 읽어야 했다.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나무>를 찾는데, 도무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두리번 거리는데, 정문의 바로 앞쪽에 <나무>를 위한 코너를 따로 마련한 것이 아닌가. 베르베르의 힘인 것인가, 마케팅의 힘인 것인가.

이 책은 18개의 짧은 단편(꽁트에 더 가까운)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의 엄청난 판매고에 비해, 많은 이들이 혹평을 했는데 그것은 좀 식상하게 느껴지는 상상력의 전개와 책의 가벼움 때문일 것이다.

글쎄, 이 작가에 대해 기대치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주 좋았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난 재미있게 읽었다. 조경란이었던가.(하성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전에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질문에 대해 그녀는 좀 싱거운 답을 했는데, 바로 자신은 모든 작가들을 다 존경한다는 대답이었다.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 일인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라나.

아직 난 허접한 작가 지망생일 뿐이지만, 책을 읽을 때 독자보다는 작가라는 입장에서 읽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재미있고 새롭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나무의 수많은 가지가 한 기둥에서 자연스럽게 뻗어나가듯, 현실 속의 작은 동기를 놓치지 않고 작가는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끌고 나가본다. 그건, 그가 '지금부터 글을 쓰는 시간이다.'라는 생각하에 글을 쓴다기 보다는 24시간 끊임없이 자신이 소설가라는 인식아래 작은 재료 하나 하나를 주워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르나르가 참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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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선인장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사사키 아츠코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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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교 시절, 순정만화 잡지에서 한 두장 삽입되어 있던 듯한 삽화가 인상적인 책이다. 이 책은, 철저하게 '관계'에 대한 책이다. 오이와 숫자 '2'와 모자. 이 세 명의 캐릭터는 이름이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의 한쪽 측면을 극대화하여, 도식화 한 듯한 느낌을 준다. 어찌 보면 희극적이고 만화적인 설정이지만, 동시에 묘하게 섬세하며, 묘하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야기는 단순한 뼈대로만 진행되는데, 누구나 그 뼈대 속에 자신의 상황을 이입시킬 수 있다. 부드럽게, 마치 동화책을 읽어주듯 접근하지만 그 뼈대를 집어낸 작가의 섬세함이 부럽다.

같은 건물 안에 살고 있던 오이와 '2'와 모자는 처음엔 서로를 알지 못했지만, 점차 친구가 된다. 그리하여 '재미있고 즐겁지만 흘러가기에 슬픈' 시간들을 함께 공유한다. 너무나 다른 세 사람이기에 서로 접근하는 방식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제각각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혼자보다는 둘, 또는 셋이 더 나은 것이다. 물론, 인간이란 모두 각각의 객체이기에 상대방을 온전히 소유할 수도 그 사람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없다.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의 방을 누구나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서로를 약간씩만 존중한다면 그것 역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건물이 철거되고, 세 사람은 뿔뿔히 흩어진다. 각각 처한 상황과 현실이 종종 그 '관계'보다 우선하게 되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물을 주어야 조심스럽게 생명을 연명하는 '관계'는 변화에 민감하다. 결국 모자는 먼길을 떠나고, 오이와 '2'도 점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든다. '관계'에 대한 기억만을 희미하게 남긴 채. 뭐, 다 그런 거지 뭐. '관계'에 대해 지나친 기대는 안하는게 좋지 않을까. 지금 현재,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에, 타인에게 잠시나마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모두 다 혼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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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박영욱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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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내용은, 말 그대로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내가 그동안 오랫동안 고민해 오던 '화두'에 대해 어떤 해답을 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 시원히는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며 가려웠던 부분을 조금 긁었다는 생각은 들었다. 고교시절까지 내게 '문학'보다는 '만화'가 더 중요했다. 내 성장기에 날 지배했던건 순수예술이 아닌 키치적인 성향이 다분한 대중문화였고, 그 대중문화는 여전히 나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난 나의 위치를 바꾸어야 했다. 많은 치기어린 인문학도들처럼 대중문화에 조소어린 시선을 던지며 경멸감을 표시했다. 모든 대중문화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나의 태도는 여전히 습관처럼 굳어져 버렸다.

편협하고, 우스운 일이라는 것은 안다. 세익스피어도 히치콕도 '순수예술'의 고고한 포즈를 취하며 그들의 '예술적 성과'를 이루어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꽤 오랜시간 동안, 난 순수예술이냐, 대중문화냐 양자 택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어떤 죄의식 등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조심스럽게 이렇게 결론을 내려본다. 어떤 포지션에 있던지,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의 정신과 철학, 마인드가 아닌지. 내가 여전히 가슴떨려 하는 김혜린도 만화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대중문화 속에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보였고, 노희경과 인정옥도 그 상업적인 드라마라는 장르 속에서 나름대로의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다.

작가의 서문의 제목은 '비틀즈, 베토벤을 만나다.'이다. 제목이 상징하듯, 이 책은 대중문화의 텍스트를 가지고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대중문화의 가치와 예술성에 대해 설파한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비대해져버린 이 대중문화 역시 예술성과 철학성을 지닐 수 있다,라고 말한다. 다소 지루한 감도 없잖아 있지만, 이런 결론을 저자는 대중음악과 현대 미술, 그리고 영화를 예로 들어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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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1
곤도 요시후미 지음, 미야자키 하야오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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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중에 하나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 마냥 동화같은 꿈을 꾸게 한다면, 콘도 요시후미가 감독한 '귀를 기울이면'은 한쪽 발은 동화 속에 다른 한 쪽 발은 현실 속에 담근 상태로 보다 현실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시즈크 유형의 주인공은 익숙하다. 작가를 꿈꾸는 문학소녀형의, 조금은 엉뚱하지만 사랑스러운 주인공은 이전에도 많이 보아왔다. 빨간머리 앤이 그러했고, 작은 아씨들의 조시도 그 유형에 속한다. 아,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 역시 그렇다. 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어차피 작가들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청소년 시절에 나르시시즘적인 애정을 갖고 스스로를 미화하여 매력적으로 표현했던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적이 있다.-_-

영화가 시작되고 10분 정도가 흐르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시즈크라는 책읽기를 좋아하는 '빨간머리 앤' 유형의 여중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즈크의 가정환경과 친구들과 학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시즈크가 살고 있는 곳이 대도시(도쿄)임을 알려준다. 그리고 2시간에 가까운 이 영화가 앞으로 풀어나갈 몇 가지 단서들을 던져준다. 그것은 도서카드에 언제나 적혀 있는 '이마사와 세에지'라는 이름과 시즈크가 '컨츄리 로드'라는 노래를 개작한 '콘크리트 로드'라는 노래이다. 이 컨츄리 로드라는 노래는 영화에서 시종일관 등장하는데, 시즈크가 개작한 '콘크리트 로드'와 기묘한 대조를 이룬다.

실제로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이 자연의 모습을 강조한 전원적인 풍경에 중심을 둔 것과 달리 도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도시란 더 이상 시골과 대립되고 적대시되는 공간이 아닌, 역시 우리가 숨을 쉬고 꿈을 꾸고 사랑하는 공간이다. 비록 흙 내음 나는 곳이 아닌 콘크리트 길일지라도 말이다.

이 영화에서 대립세력(안타고니스트)은 시즈크의 내면 속에 있다.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느끼게 되는 변화, 불안과 상처들이 그것이다. 시즈크는 이제는 모든 것이 전과 같이 않고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사실들에 당황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책을 읽어도 전처럼 두근거리지 않아.'

시즈크의 이런 불안은 세에지를 만나면서 더욱 증폭된다. 세에지는 멋지고 자신감에 찬 연애대상의 남자아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함께 성장기를 보내고 있는 경쟁의 대상이기도 하다. 시즈크는 자신의 목표를 향해 성큼 성큼 걸어가고 있는 세에지에게 뒤쳐질까봐 조바심을 낸다. 바이올린의 장인이 되기 위해 이탈리아 유학을 결심한 세에지 앞에서 자신이 보잘 것 없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결심한다. 세에지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오기 전의 두 달 동안 이야기를 써 보겠다고.

마지막 결말부분에서 시즈크는 밤잠을 줄이고, 시험점수가 형편없이 떨어지면서 까지 이야기 쓰는 일에 열중한다. 그녀의 이런 고집스러운 열정은 감동스럽기까지 한다. 결국 그녀는 고양이 남작 인형을 주인공으로 한 꽤 두툼한 환타지 소설(로 보이는-_-)을 써내지만, 그녀는 알게 된다. 자신이 아직 한없이 미숙하고 서툴다는 것을. 그러나 식상한 결론이지만, 시즈크는 아직 어리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나이이기에 열심히 앞으로 나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렇게 빨갛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세에지의 황당한(?) 청혼을 끝으로 영화는 유쾌하게 막을 내린다.

어른이 되고, 스물이 훌쩍 넘었다고 하여 사실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은 없다. 내가 스즈크의 나이였을 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좀 더 강해지고 좀 더 현명해지는 것으로 생각했었지만, 난 여전히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많은 것들이 혼란스럽고, 두려운 것들 투성이다. 동화 속의 공주님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그리하여 영원히 행복하였습니다.'라고 말하며 드레스 자락 질질 끌며 유유히 사라지지만, 그런 해피엔딩은 이곳 현실에는 없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영화가 더욱 애뜻한 감동을 주는 이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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