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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작가의 처녀작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처녀작 자체를 좋아한다기 보다는 현재 나의 실력과 은근슬쩍 비교해가며 읽는 것을 즐긴다. 뭐, 그것은 언제나 아득한 절망감을 동반하며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되지만 말이다.
따끈따끈한 작가의 열정과 설렘이 반영되어 있는 처녀작들을 보면,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작가의 긴장한 모습도 조금은 엿볼 수 있는 듯도 싶다.(나는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요소를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그들(작가들)의 태도가 아마추어 글쟁이 시절과 책을 처음 발표한 시기와 비교해 별반 달라진 것은 없겠지만, 정식으로 작가로 데뷔하고 세상에 책을 내놓는 시점을 기준으로 그들의 글쓰기 자체는 크게 의미가 달라진다. 그들의 작품들은 온전히 그들만의 작품일 수가 없게 되지만, 그들 작품에 무한한 책임만은 져야 한다.
엄청나게 거대한 작가(출판계의 상업적인 측면으로 보나, 문학적 성과로 보나)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처녀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다시 꺼내 읽었다. 이미 중견 작가로 접어든 그의 최근의 소설들을 보며 젊은 시절 그가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의 혼란과 어려움을 읽어내긴 어려울 테니, 이제는 내용도 도통 생각나지 않는 그의 데뷔작이나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물론 나의 이런 행보의 이유에는, 며칠 전의 '스터디' 충격건이 꽤 크다.-.-;;)
"완벽한 문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야." 그래도 역시 무엇인가를 쓰려고 하는 단계가 되면 항상 절망적인 기분에 사로잡히게 된다. 내가 쓸 수 있는 영역이 너무나도 제한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아마도 굉장히 정직한 콤플렉스의 소유자이며, 꽤나 성실하고 고지식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또는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끊임없이 닦달하여 가장 정직하다고 생각되는 말을 내뱉도록 재촉하는 것 같다.
그러나! 꽤 마음에 들었던 이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과는 달리, 소설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만든 스토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이러니 몇 년 전 읽었던 이 소설의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지...;;) 이후의 그의 소설들에서도 꾸준히 반복되는, 한 여성과의 기이한 만남과 감정의 교류, 재즈 음악이 흐르는 바에서의 선문답식의 시시껄렁한 대화들. 허무하고 공허하고 행복하지 못한 인물들의 일상들... 현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말이다.
꽤나 정직했던(또는 정직하고자 노력했던) 소설의 프롤로그 부분과 달리 본격적으로 소설이 시작되는 부분의 내용은 기억에 잘 남지도, 인상적이지도 않았다. 그래, 이런 부분 때문에 하루키는 확실히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될 수는 없다.
좋은 소설 쓰기란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그 전에 좋은 문장은 어떻게 쓸 수 있는 것인가.하루키가 자신의 첫 소설에서 '잘만 되면 몇 년인가, 몇십 년 후에, 구제된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라고 소망했던 것처럼, 그는 스스로 지금의 자신이 '좀더 아름다운 말로 세상을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