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선인장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사사키 아츠코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중고교 시절, 순정만화 잡지에서 한 두장 삽입되어 있던 듯한 삽화가 인상적인 책이다. 이 책은, 철저하게 '관계'에 대한 책이다. 오이와 숫자 '2'와 모자. 이 세 명의 캐릭터는 이름이 상징하는 것처럼 인간의 한쪽 측면을 극대화하여, 도식화 한 듯한 느낌을 준다. 어찌 보면 희극적이고 만화적인 설정이지만, 동시에 묘하게 섬세하며, 묘하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야기는 단순한 뼈대로만 진행되는데, 누구나 그 뼈대 속에 자신의 상황을 이입시킬 수 있다. 부드럽게, 마치 동화책을 읽어주듯 접근하지만 그 뼈대를 집어낸 작가의 섬세함이 부럽다.

같은 건물 안에 살고 있던 오이와 '2'와 모자는 처음엔 서로를 알지 못했지만, 점차 친구가 된다. 그리하여 '재미있고 즐겁지만 흘러가기에 슬픈' 시간들을 함께 공유한다. 너무나 다른 세 사람이기에 서로 접근하는 방식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제각각이지만,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혼자보다는 둘, 또는 셋이 더 나은 것이다. 물론, 인간이란 모두 각각의 객체이기에 상대방을 온전히 소유할 수도 그 사람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없다.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의 방을 누구나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서로를 약간씩만 존중한다면 그것 역시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건물이 철거되고, 세 사람은 뿔뿔히 흩어진다. 각각 처한 상황과 현실이 종종 그 '관계'보다 우선하게 되기도 한다. 지속적으로 물을 주어야 조심스럽게 생명을 연명하는 '관계'는 변화에 민감하다. 결국 모자는 먼길을 떠나고, 오이와 '2'도 점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든다. '관계'에 대한 기억만을 희미하게 남긴 채. 뭐, 다 그런 거지 뭐. '관계'에 대해 지나친 기대는 안하는게 좋지 않을까. 지금 현재,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에, 타인에게 잠시나마 위로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모두 다 혼자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