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40
최승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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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일기

그리고 연인들

 

최승자 지음

 

갈수록 빠져들고 만다. 처음 최승자 시인의 글을 접했을 때는 복잡했다. 이 세상 너머 어딘가로 가고 있는 지성인의 모습이 낯낯이 드러나서, 그 민낯이 거북했다. 내 안의 어둠이 피어올라 뾰족한 가시들이 얼키고 설켰다. 그래서 더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 시가 마음을 누르더니(너는 묻는다 라는 시를 특히 좋아한다), 소리내어 대뇌이게 하더니, 이내 다른 시집도 찾아보고 마음에 넣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의 밤

 

팽팽한 초록빛 눈알을 번들거리며

내 앞에서 공포는 무럭무럭 자라오른다.

바오밥나무처럼 쳐내도 쳐내도

무한정 뻗어 나가면서

불면의 밤, 불면이 방을

쑥대밭처럼 뒤헝클어 놓는다.

내 입 속으로 내장 속으로

가지 치고 뿌리 치며 뻗어 들어온다.

 

새벽 여섯시, 물먹은 싱싱한 빛을 발하며

공포는 이미 하얗게 세어 버린 내 방 안을

그 무성한 이파리와 줄기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뒤덮어 버리고

내 배꼽을 뚫고 아랫목

구들장 속까지 뿌리 내렸다.

 

그릇 똥값

 

노량진 어느 거리 그릇 세일 가게

쇼윈도에 이런 문구가 붙어 있다.

그릇 똥값

 

순간 충격적으로, 황금색으로

활짝 피어나는 그림 하나.

신성한 밥그릇 안에 소중하게 담겨 있는

김 모락모락 나는 커다란 똥 무더기 하나,

아니 쇼윈도 안 모든 그릇들 안에 담겨

폴폴 향기로운 김을 피워올리는 똥덩이들.

그 황금색의 화한 충격.

 

입과 항문이 한 코드로 연결되듯

밥과 똥이 한 에너지의 다른 형태들이니,

밥그릇에 똥을 퍼담은들,

밥그릇에 똥을 눈들 어떠랴,

 

산다는 것은 결국 싼다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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