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맑실 사계절출판사 대표

지금 세계 출판계에서는 기업 합병이 계속되면서 출판사가 거대 기업화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랜덤하우스이다. 예술 출판사로 이름 높은 판테온 역시 일찍이 랜덤하우스에 인수됐다. 최근 출간된 ‘열정의 편집’이라는 책은 판테온이 랜덤하우스에 인수되면서 수익성 있는 출판만을 강요받게 되자 판테온을 퇴사한 유명 편집자 앙드레 쉬프랭이 쓴 책이다. 이 책은 하나의 거대 출판기업이 미국의 출판산업과 독자들의 독서 취향을 어떻게 황폐화시켰는가를 고발하고 있다.

물론 우리 출판계는 아직 다국적 거대 기업의 합병이 미국처럼 심각한 건 아니다. 하지만 수익성만을 앞세운 출판 경향이 갈수록 거세져 출판의 다양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열정의 편집’이 고발하는 상황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수익성’보다는 여전히 ‘문화적 가치’를 움켜쥐고 있는 소자본의 독립 출판사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출판사들의 창립자는 웬만한 규모의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편집자나 마케터로 일했던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들이 대부분이다. 자신들이 정말 만들고 싶은 책만을 출간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들로 하여금 독립 출판사를 창립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으리라.

일인(一人) 출판을 감수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책만을 고집하는 출판인이 늘고 있다. 그들이 출간하는 책들은 대부분 인문·사회과학·환경서적 등 큰 출판사들이 돌보지 않는 소수의 독자들을 위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손익 분기점을 넘기기 어렵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수익성을 고민해야 하는’ 책들을 고집스레 펴낸다. 한 사회의 문화 전반의 콘텐츠는 책이 유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화가 다양하게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책들이 다양하게 출판되어야 한다. 그 책들의 운명을 통속적 내용을 선호하는 대중들의 선택에 언제까지나 맡겨 둘 수는 없다.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갈수록 심해지는, 그래서 경쟁 자체가 불공평한 출판시장의 논리에 맡겨 둘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부가 정책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책적 지원 없이는 이제 그 빛나는 책들의 운명에 희망이 없다. 문예진흥원이나 학술원, 문화관광부가 책이 출간된 이후에 우수 도서를 선정해 지원하는 건 생색내기에 불과하다. 근본 대책이 될 수가 없다.

도서관 정책도 함께 검토돼야 하겠지만 동시에 출판은행을 제안하고 싶다. 당연히 대상은 소자본 출판사들만이다. 책의 기획서를 사전에 검토해 일정 금액의 제작비를 지원해주고 대출도 해주는 것이다. 물론 기획서를 검토하는 검토위원들의 구성이 투명해야 하며, 출간 이후에는 반드시 기획서 대로 출간했는지의 여부까지를 확인해야 하는 등 절차와 방법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사전 기획서의 실행 여부를 믿지 못해 출간 후 도서를 선정하여 출판사 규모에 상관없이 지원해주는 방식은 소자본의 독립 출판사에게는 여전히 꿈 같은 이야기이다. 출판의 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는 지금, 우리는 문화적 재앙의 거대한 물결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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