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인터넷에 접속한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면 바로 나타나는 뉴스기사의 헤드라인. 잡다한 방송 프프로그램이나 연예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기사가 많지만 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넘쳐나는 것이 아동 성폭행, 10대 성폭행과 관련된 기사다. 성폭행. 이렇게 무시무시한 사건이 이제는 신문 사회면에 오르내리지 않은 날이 얼마 안 되는, 일상적인 범죄가 되었다. 마치 옆집 사람이 우리집 돈을 훔쳤다는 절도 사건처럼. 같은 사건이 계속 반복되다보니 반응하는 속도도 감각도 무뎌져 이젠 헤드라인이 떠도 에고, 또 사건이 터졌네, 한숨 쉬고 끝이다. 참 딸 가진 부모들은 어찌 살아야 하나 싶다.

<도가니>는 10대 성폭행, 그것도 장애아에 대한 성폭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기에 읽으면 읽을수록 분노가 치민다. 이야기의 배경으로 나오는 무진시의 자애학원이라는 장애인학교는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곳이다. 매년 정부에서 40억이나 되는 복지예산을 지원받지만 아이들에게 나가는 음식은 형편없어서 아이들은 저녁을 굶고 따로 간식을 사먹어야 하는 지경이다. 이곳에 근무하는 교사들은 학원발전기금이라는 일종의뇌물을 주어야 취업을 할 수 있고, 학교의 실세들은 교사들에게 막말도 서슴치 않는다. 도무지 인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곳이다.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폭행과 성폭행을 당했고, 단기간에 두 명의 학생이 자살했지만 그 죽음도 학교와 경찰에 의해 장애아의 부주의로 인한 죽음으로 덮히고 만다.  

기간제 교사로 막 학교에 발을 디딘 강인호가 부딪친 현실은  외면하기에 너무나 참혹했다. 그는 차마 상처받은 아이들을 외면하지 못하고, 인권센터 간사인 대학 선배 서유진과 함께 법정 싸움을 벌인다. 결국 힘있는 권력자들을 업은 교장과 행정실장은 집행유예로 풀려나고, 생활지도교사만 6개월 징역을 선고받는다. 같은 죄를 지었어도 교장과 행정실장 형제는 유능한 판사 출신 변호사를, 생활지도교사는 국선변호사를 앞세워 형량을 다르게 받는 것도 참 코미디 중의 코미디라 할 수 있다. 물론 생활지도교사도 형량을 다한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는 것이 가장 최상의 코미디라 할 테지만. 무진시라는, 한때 민주화의 메카였던, 연일 안개가 자욱한 이 도시의 모습은 정의의 이름이 통용되지 않는, 계란으로 바위를 칠 수밖에 없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에 다름아니다.   

강인호는 평범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것저것 해봤지만 되는 일도 없었고, 돈은 벌어야겠기에 아내 동창의 소개로 무진시까지 내려가게 되었고, 학원발전기금을 낼 때는 잠시 수치심에 휩싸이긴 했지만 결국 현실을 인정하는마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 아이들을 위해 수화를 배우고,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수화를 익히겠다고 약속하는 마음 따뜻한 사람이다. 그래서 딸아이 새미를 생각하며 같은 반 아이들을 마음으로 보듬어 안고, 연두와 유리의 상처를 진심으로 아파하고 걱정하며 학교에 맞서 싸우게 된다. 이혼 후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인권센터 간사로 일하고 있는 대학 선배 서유진은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들과 함께하며 무진시의 보이지 않는 세력들에 맞서 싸운다. 경찰서의 장경사는 학교와 밀착관계를 맺고 적당히 사건을 은폐해주고 돈을 받아 챙기는 부패 경찰로 현실을 잘 이해하고 이용할 줄 아는 인물이다. 나중에는 서유진에게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렵게 사냐고 충고하며 동정하기도 한다. 강인호와 서유진이 싸우고 있는 현실은 장경사의 입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 사람들 세상에 태어나 지금까지 점수, 점수, 점수, 경쟁, 경쟁, 경쟁 속에서 남을 떨어뜨리고 여기까지 왔어요. 일점 때문에 친구는 낭인이 되고 자신은 판검사가 되었단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정신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아들 몇명 때문에 처삼촌과 대학 동창 사돈과 사위의 은사와 장인의 후배와 얼굴을 붉혀가며 그 정의라는 거, 진실이라는 거 되찾아줄 것 같아요? 그 사람들에게 진정 학원 이사장과 장애아의 인권이 같을 줄 알아요?" 

혹시라도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꿀 생각이냐는 장경사의 말에 서유진은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라고 말한다. 나만 바뀌면 세상 살기가 더 편할 수 있다. 적당히 넘어가고, 타협하고, 무시하면 세상 살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 불합리해서 견딜 수가 없는 세상 앞에서 내가 바뀌는 것이 견딜 수 없기에 서유진은 이를 악 물고 아픈 애들을 두고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말이다. 

법원 판결 후 함께 싸운 이들은 천막에서 농성을 하며 수업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 방문한 강인호의 아내와 아이. 아내는 친척오빠에게서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다며 함께 서울로 가자고 한다. 그때 농성 중인 천막이 철거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서유진의 전화를 받고 늦더라도 꼭 가겠다고 약속하고 아내에게 편지를 남긴다. 딸 새미를 위해 짓밟히는 아이들 곁으로 돌아간다고, 당당하고 멋있는 아빠와 남편으로 돌아가겠다고. 허나 결국 밤새 울리는 전화를 무시하고, 편지를 찢어버리고, 가족들과 함께 무진시를 떠난다. 만약 강인호가 가족들을 두고 농성장으로 달려갔다면 소설의 결말이 조금은 어색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내와 아이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모를까, 함께 가자며 먼 길을 달려온 가족을 두고 제자들을 택할 만큼 강인호는 그렇게 정의감에 불타는, 세상이 자신을 바꾸지 못하도록 싸우는 서유진이 아니기 때문이다.  

'꼭 그래야만 하나, 하고 누군가가 물었다. 꼭 그래야만 한다, 고 그는 대답했다. 그래도, 정말, 꼭?이라고 누군가가 다시 물었다. 그래도, 정말, 꼭, 그래야만 한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보통사람 강인호의 고민이 잘 표현된 구절이다. 내가 강인호라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정말 꼭 그래야만 하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끄덕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보통사람 강인호과 나의 한계이다. 분노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와 제 생활에 안착하고 마는 보통사람. 그래서 강인호의 모습에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진다. 무진을 떠나고 육개월이 지나 강인호는 서유진에게서 편지를 받는다. 아이들이 학교를 나와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얻게 된 새로운 곳에서 생활하게 된 이야기며, 아이들이 밝아졌다는 이야기, 혹시라도 우리에게 미안해하지 말라는, 네가 보여준 사랑과 헌신을 기억한다는.    

<도가니>의 중심은 장애아에 대한 성폭행 사건이지만, 그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종 대립과 연합의 양상이 더 크게 드러난다. 자애학원에서 학생에게 가해지는 폭행, 그것도 장애아 학생에게 비장애인 교사가 휘두르는 폭행은 일방적이고 무차별하다. 그리고 성폭행 사건을 고소한 인권센터와 사건을 수사하지 않는 경찰, 인권센터는 나름대로 언론을 이용해 사건을 널리 알리고 그에 자극받은 경찰은 발빠르게 수사에 임하지만 가해자들에게 사건을 빠져나갈 통로도 제시해준다. 힘이 있는 자들의 죄는 법에도 호소하기 힘들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가해자인 교장을 둘러싼 무진시의 최고 권력들, 교회, 동창회 등 지역 유지들이 똘똘 뭉쳐 그의 무죄를 뒷받침해준다. 더러움을 둘러싼 최고 권력자들의 연대는 참 견고하다. 그들은 유리와 민수의 보호자에게서 합의서를 받아내 고소를 취하한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을 보여주는 게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광란의 도가니'다. 미친 세상에서 바른 정신을 가지고 산다는 건 참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상식과 양심이 살아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고 있고, 나 또한 그 길에 동참한다면 광란의 도가니가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도가니>를 읽고 분노하며 얻은 나름의 결론이다. 미친 세상에서 똑바른 정신으로 살자고.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태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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