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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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가장 예뻤을 때가 언제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잠시 고민하다가 아마도 '스무살' 때였다고 이야기할 것 같다. 스무살, 방황하고 구속받던 10대를 막 벗어난, 이제는 어른인 듯 부모 또래의 진짜 어른들 간섭에 나도 어른이라며 맞서 '철없다'는 소리를 듣는, 세상에 온전히 부딪치면서 삶은 무엇인가를 나름 진지하게 고민한 그 시절 말이다. 짧은 치마를 입어도, 진하게 화장을 해도, 몸에 액세서리로 치장을 하고, 술을 마시고 담배를 펴도, 몇박 몇일 여행을 떠나는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스무살. 나는 온전히 어른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돌이켜보면 솜털 보송보송한 10대의 그늘을 막 벗어나 참 철없었던 그 시절. 그러나 가장 예뻤던 그때. 그 예뻤던 시절에 한껏 멋내지도 못했고, 일탈도 못했고, 청춘만이 할 수 있는 도전 앞에서 저어했던 기억들만 떠올리면 탄식이 나올 뿐이다. 아깝다, 참 아깝다, 내 스무살. 

<내가 가장 예뻤던 때>는 스무살 그 봄날같은 시절의 친구들 이야기이다. 딸 다섯 부잣집의 네째로 태어나 집 안에서 존재감이 미비한 마해금. 얼굴 예쁘고 똑똑한 순옥, 정금 언니, 대학 다니다가 공장에 취업해 혁명을 하겠다는 영금 언니, 노래를 잘하는 동생 영미 등 자매들 중에서 인물이나 학벌이나 뭐 하나 내세울 뚜렷한 것 없는 신세다. 이들 자매들의 알콩달콩한 다툼이나 딸들의 연애, 실연, 가출 앞에서도 결코 법석을 떨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며 짐짓 농담으로 넘기며 아버지 어머니가 내뱉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는 보는 내내 웃음이 터질 정도로 정겹고 찐하다.  

'아홉 송이 수선화' 모임으로 만난 친구들은 열여덟살에 5.18을 겪고, 그 와중에 친구 경애를 잃고, 경애의 죽음을 못 견뎌하던 친구 수경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시간은 흘러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대학에 들어가고, 재수를 하고, 취업을 하는 등 인생에서 가장 예쁠 그 시절을 보낸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에 겪은 5.18은 다소 소설의 분위기를 무겁게 이끌어나갈 수도 있었으나 10대의 발랄함과 스무살의 풋풋함은 5.18로 고통스러워하거나 기억 저편에서 억지로 끌어내어 우울해하지 않는다. 왜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잘 잊냐고, 정작 미안해할 사람들은 미안해하지도 않는다며 숨을 쉴 수가 없다던 수경이의 울부짖음처럼 산 사람은 그냥 하루하루를 살 뿐이다. 친구의 죽음은 분명 상처지만 각자의 삶은 현실이니.

스무살 그들의 일상에서 가장 충격적인 일은 아빠의 바람과 엄마의 죽음으로 방황하던 승희는 웬 '가이새끼'와의 하룻밤으로 아이 승춘이를 낳은 것이다. 조카의 기저귀와 젖병을 훔치고, 언니의 호주머니를 털고,  아이의 옷을 짓는 식으로 친구들은 자기들의 아이인 양 승춘이를 돌보고 보듬는다. 승희를 좋아했던 진만이는 이 때문에 방황하고, 진만이를 통해 친해진 만용이는 승춘이의 아빠 노릇을 자처하며 살뜰하게 돌본다. 해금이는 작은아버지 제재소에서 만난 환이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와 알콩달콩한 연애를 하게 된다. 그러나 폭력적인 아버지와 폭행당하는 어머니, 5.18의 상처를 안고 서로를 죽일 듯 덤비는 두 형들, 아픈 여동생 영이를 둔 환이는 형들의 다툼 가운데 병을 깨고 손목을 긋는다. 그 와중에 동생 영이가 죽고 환이는 깨어났지만 다시 예전처럼 잘 웃지 않는다. 해금은 환과의 이별 후 서울의 공장에 취직을 하지만 시위 도중 다리를 다치고, 대학생 신분을 포기하고 공장에 위장 취업했다가 고문당하고 풀려난 정신이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온다. 서울대에 다니던 승규는 잡혀서 고문당한 후 강제 입대를 하고, 군대에서 의문사한다. 고속버스 안내양을 하던 승희는 소설 현상공모에 도전했다가 떨어지지만 승춘이와 함께 고향 남원으로 돌아가고,  정신이는 여행을 떠난다. 해금이는 거리에서 만난 환이의 환영을 뒤로 하고 꽃향기 날리는 봄밤 속을 달린다. 

이들의 스무살은 행복도 기쁨도 누리지만 상처받고 아파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익히며 한발 한발 세상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누구나의 스무살처럼. "우리는...아직 좀더 흔들려도 좋을 때잖아"라는 승희의 말처럼, 스무살은, 좀더 흔들려도 좋은 때다. 꽃향기도 즐길 줄 알고, 꽃을 보고 아름답다 말할 줄 알고,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아는, 그런 나이다. 이후에는 기다리지 않아도 자로 잰 듯 재단된 삶이, 흔들려선 안 되는 팍팍한 삶이 그네들 속으로 들어올 것이니. 그래서, 흔들려도 좋을 나이에 흔들리지 못한, 풋풋함을 한껏 누리지 못한, 내 스무살 그 시절이 아깝고 또 아깝다.

**기억에 남는 구절 

피 흘리는 경애를 안고 목놓아 외쳤다는 수경이.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임을 외치는 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너의 슬픔에 내 슬픔이 공명하는 소리. 그리고 수경은 목이 터져라 외치다가, 화답 없는 세상에 절망하여 저세상으로 떠났다. 지금, 2번 시다 판님이가 3번 미싱사 경자를 잡아가지 말라 외치는 수경이 경애를 살려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나는, 이제라도 화답해야 한다. 내가 인간이고자 한다면, 그리하여 내가 우리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 쪽으로 돌려놓고자 한다면.  

그렇게 가슴앓이도 하면서, 이곳저곳으로 떠돌기도 하면서, 바람 앞에 선 들꽃처럼 몸을 잔뜩 움추리기도 하면서, 그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청춘은 조금씩 단련되어가리라. 기필코 살아서 경애, 수경이, 승규 몫까지 굳세게 살아서 마침내 아름다워지고 말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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