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르미도르 - 전3권
김혜린 지음 / 길찾기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방과후, 주말에는 하루종일 만화방에 붙어 살았었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으면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를 정도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시절, 만난 것이 김혜린의 '비천무'다.

비정상적으로 큰 눈과 오똑한 콧날을 가진 8등신 남녀가 만나 티격태격 신경전 벌이다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일반적인 순정만화만 봐왔던 내게 김혜린의 만화는 큰 충격이었다. 순정만화처럼 느껴지지 않는 거친 펜 선과 음울한 분위기, 웅장한 스토리, 비극적인 결말 뭐 하나 그때까지 만나온 순정만화 공식에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비천무에 충격 받은 내가 이후 김혜린의 만화에 빠져 산 건 필연이라면 필연이다.

그러던 차에 '테르미도르'가 재단장하여 출간됐으니 냉큼 사지 않을 수 있을까. 회사에서 책을 받은 후 퇴근 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퇴근길부터 펼친 후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환승 구간을 걸으면서, 다시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부터 던져 버리고 마지막까지 단숨에 읽어 버렸다. 그림과 스토리를 음미하면서 천천히 읽는 건 생각할 수도 없다. 처음엔 단숨에, 그 다음에 음미하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 김혜린 만화를 읽는 나만의 방식이다.

테르미도르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토리다. 프랑스 사회의 혼란과 혁명, 사랑, 배신. 이것은 테르미도르뿐 아니라 수많은 순정만화에서 다뤄지던 단골 소재였다. 내가 프랑스 혁명을 처음 알게 된 것도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통해서였으니 말이다. 그 프랑스 혁명은 많은 시민들의 분노로 일궈낸 소중한 성과이자 오늘날 프랑스의 기본 정신인 자유, 평등, 박애의 밑바탕이 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말이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는 프랑스 혁명 속에서 가상 인물 오스칼과 실존 인물 마리 앙뜨와네트의 삶과 사랑이 교차하는 과정을 나타냈다면, 테르미도르에서는 혁명 속에서 피어오르는 등장인물들의 애증도 섞여 있지만 혁명 세력의 분열과 배신, 혁명 속에 감추어진 추잡한 권력욕 등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김혜린 만화이기에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행여 행복해질까, 행여 해피 엔딩일까 기대해 보지만 여지 없이 무너지는 비극적 결말도 김혜린 만화이기에, 아련하게 젖어오는 슬픔도 김혜린 만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이다. 그래서 김혜린의 만화를 사랑한다.

복간된 테르미도르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이 많다는 것을 이곳을 통해 알았다. 만화에 대해 그다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선 비판의 글을 읽고 나서야 제작이나 인쇄 방식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김혜린의 테르미도르를 소장하게 됐다는 것만으로 그저 감사할 뿐이다. 한동안 잊고 있던 만화를, 그것도 김혜린의 만화를, 이대로 기억 속에서 잊혀질 뻔했던 내 소중한 기억들을 다시 찾게 되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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