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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지 않는다는 것 - 하종강의 중년일기
하종강 지음 / 철수와영희 / 2007년 6월
평점 :
'내가 철들어 간다는 것이/ 제 한몸의 평안을 위해/ 세상에 적당히 길드는 거라면/ 내 결코 철들지 않겠다......'
대학 새내기 시절, 한창 많이 불리던 민중가요의 첫부분이다. 당시 어린 나이에도 가슴 깊이 와닿는 가사 때문에 한동안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녔었다. 노래를 흥얼거릴 때마다 '그래, 세상에 길들면서, 철들면서 살지 말자'고 굳게 다짐을 했었다.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오래전에 불렀던 그 노래가 생각이 났다. 철들지 않는다...같이 사는 사람에게 물어봤다. 철들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물들지 않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철들지 않는 것=물들지 않는 것. 참 서글픈 공식이다. 세상에 일찍 물든 사람이 앞서가는 세상에서 철들지 않고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 그렇게 산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그런 의미에서 하종강 이 양반은 평생 철이 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라는 양반도 그랬다지. 철 안 난 것으로 치자면 자네는 거의 정신병 수준이라고. 이 책은 <하종강의 중년일기>라는 작은 제목이 말해주듯 이 양반의 소소한 일상이 담겨져 있다. 중년의 시선으로 바라본 가족, 사회, 일상 등이 잔잔하게 와닿는다. 그의 일기 몇 편을 읽다 보면 노동문제연구소 소장이라는 직함 때문에 무거운 내용으로 가득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금방 사라지고 만다. 간간이 나오는 유머러스함에 픽하고 웃음도 여러 차례 터져 나왔다. 세상에 대한 무거운 시선보다 사람을 향한, 특히 노동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책이다.
그는 30년 동안 노동상담 일을 하고 있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전국의 파업현장,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손짓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간다. 가족과 휴가를 보내긴 해야 하는데 파업현장에서 노동자들이 부르니 가족들을 데리고 파업현장으로 달려갈 정도로 유별나고, 퀵서비스 오토바이에 자동차 범퍼가 날아갔는데도 청년의 푸념 한마디에 그냥 넘어갈 정도로 심성이 여리다.
허나 일 때문에 가족을 등한시하는 이율배반적인 인간도 아니다.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락콘서트 티켓을 얻어 아들과 락콘서트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마다 아이들에게 편지와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가 되기도 하며, 아들 친구들에게 진돗개를 보여주기 위해 기습적으로 학교를 찾아가기도 하는 좋은 아빠이기도 하다. 또 크리스마스 전날 아마추어 무선을 통해 연결된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초대할 정도의 엉뚱함과 따뜻함도 가지고 있다.
예로부터 마흔을 넘기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근데 이 양반, 철이 들지 않아서 그럴까? 나이에 걸맞지 않게 너무 해맑다. 사진으로 보는 그는 김미화의 말대로 '부드러운 남자,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중년 남성'이다. 대학시절 수배전단에 '미남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는 전설이 거짓은 아닌 듯하다.
노동조합과 연애하기에 연애하는 청춘남녀가 부럽지 않다고, 계속 이렇게 살고 싶다는 그는 평생 철이 안 들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가 60이 되어도 70이 되어도 철이 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 해맑은 미소를 유지하면서.
아울러 나도 해맑게 나이 먹고 싶다. 그래서 이제 그만 철들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