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 (양장) 소설Y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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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환적인 색채로 가득한 곳에 한 아이가 서 있다. 그 풍경은 지면 아래에 똑같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실제 세계의 투영인 건지, 복사판 세상인지 알 수가 없다. <나나>의 표지는 이렇듯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제목만 봐선 도통 내용을 이해하기 힘든, 하지만 다 읽은 후엔 어떻게 이런 제목을 지었을까, 하는 감탄이 나온다. <페인트>라는 놀라운 세계를 만들어낸 이희영 작가답다. 그만큼 기대가 컸던 책, 역시 최고였다.


한수리는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 공부도 잘하고 다양한 취미와 관심사를 가졌다. 자기 관리에 철저해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고 그 시간도 아까워서 손에서 영어 단어장을 놓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친구들과 유명 카페를 가려고 탄 버스가 충돌하면서 쓰러졌을 뿐인데 눈을 뜨니 영혼이 육체를 빠져나온 상태가 됐다. 일주일 안에 영혼이 육체로 돌아가지 못하면 영원히 '나'로 살 수 없게 된다는데, 문제는 내 육체가 내 영혼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나는 필사적으로 육체로 돌아가기 위해 육체만 남은 수리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본다.


수리와 같은 사고를 당한 은류는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관심은 오로지 병약한 동생 완에게 쏠려 있었다. 그래서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렸다. 마음 속에 담아둔 말들은 모두 삼켜야 했고, 늘 의젓한 형이자 아들이 되어야 했다. 그랬는데 완이 죽었다. 모두가 나 때문인 것 같다. 완이가 죽은 것도, 엄마가 울고 아빠가 힘든 것도. 그래서 다시 육체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영혼이 사라진 수리는 학교 과제를 위해 인터넷에서 글을 짜깁기한다. 수리는 영혼과 분리된 자신의 모습이 엉망진창으로 변하는 걸 못 견뎌한다.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와 주변의 평가를 모두 무너뜨릴 것만 같다. 이런 모습을 보고 류는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부수는 육체를 용서하지 못할 정도로 자비가 없으니 그 육체가 영혼을 거부하는 게 아니겠냐고 말한다. 그제야 수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다른 아이들의 실수에 대해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실수는 참을 수 없었던 수리. 칭찬을 받을수록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했다. 실력도 없는데 운이 좋아 이 자리까지 올라온 거라고, 사람들이 야유를 보낼까봐 초조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기가 힘들었다. 영혼이 되어 자신을 관찰하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의 날개를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던 단 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것을.


상자를 쌓다가 무너지면 오히려 박스를 치며 다시 쌓던 완이. 류도 이제는 안다. 무너진 건 다시 쌓으면 된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나'에 한해선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대부분이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언제 무너질지 몰라 불안하고 조바심 나는 일상보다는 무너진 뒤 견고하게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아이들이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맘대로 일이 안 풀릴 때, 인간관계가 꼬였을 때, 류처럼 영혼 없이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삶이 얼마나 단순해질까. 걱정, 고민, 불안, 우울 등의 부정적인 감정 따위는 사라질 것이다. 물론 기쁨, 즐거움, 희열, 만족, 기대 같은 긍정적인 감정도 사라지겠지. 그럼 인간이 기계나 AI와 다른 게 무엇일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것은 이런 감정들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일 텐데, 영혼이 없다면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도, 삶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에 무감한 요즈음, 수리와 류처럼 나에게 미안했다.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인데, 왜 인정하지 않으려는 건지. <나나>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나를 안아주고 싶어졌다.

영혼이 없다는 건 생각을 안 한다는 뜻이잖아. 그만큼 삶이 단순해진다는 거 아니야? 그게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은데. 어차피 삶은 시시하지 않나? 그저 동글동글 모나지 않게 살라고들 하잖아. 그리려면 오히려 영혼이 방해되지 않을까. - P115

나는 지금껏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왔을까? 세상 누구보다 나를 잘 안다 믿었는데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열여덟 한수리가 누구인지, 무엇이 그 아이를 가장 힘들게 하는지 말이다. - P119

생각할수록 웃기지 않냐? 다른 사람에겐 너그러우면서 정작 자신에겐 왜 그렇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댔을까? 뭐든지 잘해야 하고 완벽해야 하고. 그럼에도 전혀 성에 차지 않고. - P140

혹여 완이는 알고 있었을까.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쌓으면 된다는 사실을. 삶은 콘크리트 건물처럼 견고하지 못하다. 쉽게 흔들리고 작은 충격에도 휘청거리는 상자 탑과 같았다. 그렇기에 또다시 쌓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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