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

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작가세계 2003년 여름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우리는 정말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적어도 쪼들리지 않게는 살만큼 돈도 충분하기를 바라고, 집안 가족들이 별탈 없이 모두 건강하기를 바라고 ,요즘은 특히나 북한 미사일 문제,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국제 유가 문제 등으로 국제 정서가 불안정하다는데  크게는 나라경제를 비롯한 정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어 우리들 삶이 평안해지기를 바라고, 정말 <우리의 바람>은 끝이 없습니다. 도정일 선생의 글은 이런 점에서 현재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게 합니다. 행복한 삶에 관해서.

21세기 초 도시 중산층 이상의 한국인을 지배하는 정신상태는 두 개의 강력한 '코드'에 관통당했는데, 하나는 '탐욕의 코드'이고 또 하나는 '선망의 코드'랍니다. "소유하라, 친구여, 욕망의 크기만큼 소유하고 그 소유를 달성하기 위해 뛰어라, 그러지 않으면 너는 불행을 벗어날 길이 없다. 네가 뛰어야 네 부동산도 뛴다".라고 하는  '탐욕의 코드'와, "저자는 갖고 있는데 나는 없어, 이건 안되지, 암 안 될이고 말고"라고 사람들을 들쑤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전염성 질투의 코드로 '선망의 코드'를 말하고 있습니다. 탐욕과 선망의 부호가 행복의 공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준 이는 석가모니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탐욕과 선망을 부추기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지탱되지 않는다는 것이 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결함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욕망과 과잉의 탐욕은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고, 현대인의 불행감을 다스리는 방편으로서의 석존과 동양적 정신세계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법을 찾아 헤매야 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절망의 사회다"라는 군요.(기사원문보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늘 느끼는 것이지만, 지금 이 정부가 국민들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불편하다. 어제는 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을 원활이 지원하기 위해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하기로 했던 지원단을 대통령 '직할기구'로 위상을 격상시켰다. 국민 대다수가 FTA를 반대하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노 대통령은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협정 체결이 우리의 미래가 달린 사활적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다"는 말에서처럼 국민의 정서보다는 대통령 개인의 판단력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것 같다. 위험하기 짝이 없다.

박구용 교수는  말한다. "대통령은 홍보가 부족해 국민이 오해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국민은 홍보의 대상이 아니라 소통에 참여할 권리를 가진 이 나라의 주인이다."라고. "참여정부는 국민적 소통이란 힘으로 권력을 창출했지만, 참여와 소통을 막으면서 권력을 잃어가고 있다. 참여정부는 폭력정권이 돼 가고 있다."라고.(기사원문보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오늘 4군데서 실시된다. <성북을>을 제외하곤 이미 판세는 기울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이 현실을 읽어내려 하지 않는다. 아니면 오판하고 있거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교종교학자가 쓴 불교이야기이다.  다른 종교를 통해 자신의 종교를 더 깊게 알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배경에 있는 오강남, 길희성, 이현주 목사 등은 이웃종교인 불교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들을 하고 있는 반면, 불교계에서는 기독교, 가톨릭 등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별로 엿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늘날 세계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차츰 다종교 상황으로 되어가고 있는 추세를 주목한다면 종교간 평화공존을 위한 대화는 필요하다. 대화는 상호이해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이 전반적인 불교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글 역시 명확하면서도 쉽다.

인상깊은 대목 몇 군데 톺아 보자면, 우리는 흔히 불교가 힌두교에서 말하는 참자아, 즉 아트만처럼 어떤 고정된 실체( 참자아, 진아, 진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기 쉬운데(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초기경의 주석서들은 모두 '실체가 없다'는 뜻에서 무아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어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我)'가 '실체'를 뜻한다면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실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아니 본질이니 하는 상(相.想)에 얽매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아를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에 관한 다음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가 상호 의존, 상호 연관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존재할 뿐 독자적인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있는 한,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나'는 따로 성립할 여지가 없게 된다. 우리의 자아란 이처럼 실체가 없기에 우리가 집착할 가치가 없다는 것, 거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우리의 자아가 이처럼 허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자유로워지고, 세상도 그만큼 아름다워진다. 나아가 개인의 자아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도 그 자체로 독립적 실체가 아니다. '무아'를 영어로 'no-self'라고만 하지 않고 'no-substance'라고 번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77면)

이런 <실체>와 관련된 언급은 무수하다. 또다른 저서에서 적절한 예를 들자면,

모든 것을 유(有)라는 고정적 실체로 간주하여 생각하면 육도(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천)의 미계(迷界:어리석음의 세계)가 생기고, 일체를 공(空) 가(假)  중(中)이라는 비실체적 사유방식으로 생각하면 사성(四聖:성문,연각,보살,불)의 오계(悟界)가 생기는 것이니, 미오(迷悟)의 그 마음가짐을 떠나 열개의 세계들이 따로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일체유심조라는 것도 이처럼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계의 출현방식을 지적하는 말이지, 조물주의 의지에 의한 창조나 절대적 정신에 의한 구성처럼 추상적 관념론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닌 것이다. (김종욱 저, 『불교생태철학』, 동국대학교출판부, 182면)

자신의 복을 비는 기복 일변도 신앙에 대한 언급 역시 정확하다. 대학입학시험 때마다 '내 자식 시험 잘 봐서 좋은 대학'들어가게 해달라는 기도행위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절에서 하는 백일기도, 영가천도재, 우란분재 등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는 대목들이다. 이는 어찌보면 자기, 자기가족, 자기집단을 위한 이기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제 믿고 기도만 하면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이나 천사가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식의 믿음을 성숙한 믿음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 불교에서도 어느 면에서 자기 개인이나 가족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기적 안녕만을 위하여 비는 것이 종교의 주요 목적인 양 오도하는 이런 기복적 신앙형태는 지양되리라고, 그리고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을 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지닌 한계성을 겸허하게 자각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염원이나 기원을 간직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을 다해 아뢰고 복을 빌더라도 나만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비워 전 우주 공동체와 더불어 살고, 어울려 사는 원대한 화엄적 세계의 구원을 위해 비는 것으로 승화해야 하리라 봅니다.

둘째, 기복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특히 죽은 이들을 위해 복을 비는 것도 지양되리라 봅니다. 사랑하는 식구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해 종교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런 절박한 상황을 기회로 하여 , 그리고 미지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을 이용하여, 종교가 필요 이상으로 신도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안겨 준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이런 예식들의 표피적,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이런 예식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더욱 깊은 정신적, 심리적, 상징적, 효용적인 가치에 더 큰 관심을 쏟고 더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굴하고 널리 펴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316-7면)

다만 "상좌불교(소승불교)에서는 궁극 목표를 위한 수행이 기본적으로 승려를 위한 것이지만, 대승불교 보살의 길은 승려 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해당한다. (108-9면)"는 부분은 선뜻 동감할 수 없다. 대승불교가 더 종교적으로 완성된 형태의 불교라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보는 사람이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다. 대승불교에 관한 부분을 체계적으로 서술이 잘 되어 있는 반면에, 상좌불교에 관련해서는 논의가 너무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찌보면 이 책은 불교의 발생에서부터 인도불교, 동아시아불교, 서양불교 등 불교의 전반적 이해를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초기불교에 관한 부분에 관한 언급이 없다 해서 흠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상좌불교에서 유래한 불교 명상법으로서의 비파사나 등등에 대한 보다 깊고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리라 본다. 궁극목표가 승려를 위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그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지와 편견, 집착과 고집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깨달음이 일상의 생활이 될 수 있지도 않을까. 그러면 우리 사회는 그만큼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바뀌게 될 것 같은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서 양악을 삼으라"하셨느니라.

2.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하셨느니라.

3. 공부하는 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하셨느니라.

4. 수행하는 데 마(魔)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 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으로서 수행을 도와주는 벗을 삼으라"하셨느니라.

5.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을 경솔한데 두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꺽어서 일을 성취하라"하셨느니라.

6.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서 사귐을 길게 하라"하셨느니라.

7.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교만해지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과 사귀도록 하라"하셨느니라.

8. 덕을 베풀면서 과보(果報)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덕을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하셨느니라.

9.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에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서 부자가 되라"하셨느니라.

10. 억울함을 당했다고 밝히려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