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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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종교학자가 쓴 불교이야기이다.  다른 종교를 통해 자신의 종교를 더 깊게 알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배경에 있는 오강남, 길희성, 이현주 목사 등은 이웃종교인 불교에 대해  의미 있는 발언들을 하고 있는 반면, 불교계에서는 기독교, 가톨릭 등 다른 종교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별로 엿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오늘날 세계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차츰 다종교 상황으로 되어가고 있는 추세를 주목한다면 종교간 평화공존을 위한 대화는 필요하다. 대화는 상호이해를 촉진하기 때문이다. 다른 종교를 이해하기 위한 불교계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이 전반적인 불교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글 역시 명확하면서도 쉽다.

인상깊은 대목 몇 군데 톺아 보자면, 우리는 흔히 불교가 힌두교에서 말하는 참자아, 즉 아트만처럼 어떤 고정된 실체( 참자아, 진아, 진여)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기 쉬운데(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초기경의 주석서들은 모두 '실체가 없다'는 뜻에서 무아를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어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我)'가 '실체'를 뜻한다면 '무아'란 존재론적으로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실체를 극복하지 못하면 그것은 자아니 본질이니 하는 상(相.想)에 얽매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아를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에 관한 다음의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모두가 상호 의존, 상호 연관의 관계에서 생겨나고 존재할 뿐 독자적인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이 있는 한,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나'는 따로 성립할 여지가 없게 된다. 우리의 자아란 이처럼 실체가 없기에 우리가 집착할 가치가 없다는 것, 거기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우리의 자아가 이처럼 허구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면 우리는 그만큼 자유로워지고, 세상도 그만큼 아름다워진다. 나아가 개인의 자아뿐만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도 그 자체로 독립적 실체가 아니다. '무아'를 영어로 'no-self'라고만 하지 않고 'no-substance'라고 번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77면)

이런 <실체>와 관련된 언급은 무수하다. 또다른 저서에서 적절한 예를 들자면,

모든 것을 유(有)라는 고정적 실체로 간주하여 생각하면 육도(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천)의 미계(迷界:어리석음의 세계)가 생기고, 일체를 공(空) 가(假)  중(中)이라는 비실체적 사유방식으로 생각하면 사성(四聖:성문,연각,보살,불)의 오계(悟界)가 생기는 것이니, 미오(迷悟)의 그 마음가짐을 떠나 열개의 세계들이 따로이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일체유심조라는 것도 이처럼 마음가짐에 따라 달리 보이는 세계의 출현방식을 지적하는 말이지, 조물주의 의지에 의한 창조나 절대적 정신에 의한 구성처럼 추상적 관념론을 나타내는 표현이 아닌 것이다. (김종욱 저, 『불교생태철학』, 동국대학교출판부, 182면)

자신의 복을 비는 기복 일변도 신앙에 대한 언급 역시 정확하다. 대학입학시험 때마다 '내 자식 시험 잘 봐서 좋은 대학'들어가게 해달라는 기도행위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절에서 하는 백일기도, 영가천도재, 우란분재 등도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하는 대목들이다. 이는 어찌보면 자기, 자기가족, 자기집단을 위한 이기적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이제 믿고 기도만 하면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이나 천사가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식의 믿음을 성숙한 믿음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 불교에서도 어느 면에서 자기 개인이나 가족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기적 안녕만을 위하여 비는 것이 종교의 주요 목적인 양 오도하는 이런 기복적 신앙형태는 지양되리라고, 그리고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을 비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지닌 한계성을 겸허하게 자각하고 이를 넘어서려는 염원이나 기원을 간직하는 일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정성을 다해 아뢰고 복을 빌더라도 나만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을 비워 전 우주 공동체와 더불어 살고, 어울려 사는 원대한 화엄적 세계의 구원을 위해 비는 것으로 승화해야 하리라 봅니다.

둘째, 기복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특히 죽은 이들을 위해 복을 비는 것도 지양되리라 봅니다. 사랑하는 식구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위해 종교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다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런 절박한 상황을 기회로 하여 , 그리고 미지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을 이용하여, 종교가 필요 이상으로 신도들에게 금전적 부담을 안겨 준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이런 예식들의 표피적, 문자적 의미가 아니라 이런 예식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더욱 깊은 정신적, 심리적, 상징적, 효용적인 가치에 더 큰 관심을 쏟고 더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굴하고 널리 펴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316-7면)

다만 "상좌불교(소승불교)에서는 궁극 목표를 위한 수행이 기본적으로 승려를 위한 것이지만, 대승불교 보살의 길은 승려 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도 해당한다. (108-9면)"는 부분은 선뜻 동감할 수 없다. 대승불교가 더 종교적으로 완성된 형태의 불교라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는 보는 사람이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이다. 대승불교에 관한 부분을 체계적으로 서술이 잘 되어 있는 반면에, 상좌불교에 관련해서는 논의가 너무 피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어찌보면 이 책은 불교의 발생에서부터 인도불교, 동아시아불교, 서양불교 등 불교의 전반적 이해를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초기불교에 관한 부분에 관한 언급이 없다 해서 흠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상좌불교에서 유래한 불교 명상법으로서의 비파사나 등등에 대한 보다 깊고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리라 본다. 궁극목표가 승려를 위한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그 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지와 편견, 집착과 고집에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에 다름 아닐 것이다. 깨달음이 일상의 생활이 될 수 있지도 않을까. 그러면 우리 사회는 그만큼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곳으로 바뀌게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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