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측면보다 실천이 우선되어야 하는 게 생태적 삶이다. 결국 '욕망의 문제'인데 어디 이 사회가 사람을 욕망없이 살 수 있게 하는가? 자본은 늘 소비를 부추기고 물질적 허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한다. 그에 대한 깨침을 주는 기사와  관련 책들. 한겨레21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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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없는 사회는 없다. 한국사회만이 유독 갈등이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현대 우리가 사는 산업사회는 갈등이 '구조화'되어 있는 사회이다. 우리는 아직도 '갈등'에 너무 약하고 '갈등의 반응'에 너무 서투르다. 무엇보다 갈등을 병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갈등은 병리가 아니라 정상이다."

송복 <한국사회의 갈등구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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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내가 읽은 문학서적들에는 많은 해직교수들의 이름이 있었다. 백낙청, 송기숙, 문병란과 같은 이름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민주화 과정 속에서 진실을 향한 외침을 멈출 수 없었던 그런 분들에게 주어진 명예로운 주홍글씨가 해직교수였다. 명예롭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선생이 강단으로부터 추방되어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사회인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복직되었고, 고적한 정년을 맞았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형식적인 민주화가 쟁취되고 난 이후였다.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또 자칭 타칭 ‘재야비평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또다른 유형의 해직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가령 오랜 싸움 끝에 서울대에 복직한 김민수 교수라든가, 지난해 전남대에 임용된 김상봉 교수가 그 분들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대학을 뛰쳐나온 분도 있었다. 가령 철학 아카데미의 이정우 선생 같은 분이 그렇다. 다시 그런가 하면, 대학이 학문 공동체로서의 순기능을 상실했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면서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을 건설하자는 고미숙 선생 같은 이도 만날 수 있었다. 왜 대학이 문제인가.

사회 민주화는 어느 수준에서 진척된 게 분명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 체제의 가장 보수적인 습속과 제도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쟁논리’의 명암을 균형잡힌 시각에서 통찰하기보다는, 대학 자체가 ‘무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체계화된 담론으로 생산하고, 제도화한다. 대학의 운영방식은 이 사회의 많은 부분이 민주화되는 것에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큰 대학은 거대 기업자본에 포섭되고, 작은 대학은 족벌 간상배 집단에 장악당한다. 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본분에 철저하고자 하는 선생과 학생들은, 그들의 대학에서 추방되어 쉰목소리로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건만, 그 반향은 넓지도 깊지도 않다. 국민소득은 높아간다지만, 신자유주의의 구호들은 우리들의 일상 전체를 오히려 악다구니판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는 강남대의 이찬수 교수가 해직되었다. 아무리 기독교가 배타적인 유일신론을 교리의 원천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윤리야말로 다른 것에 대한 고통스런 관용까지를 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교수의 종교적 관용은 그것대로 포용하면서, 기독교적 유일신의 섭리를 마음 깊이 견지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 대학의 성숙한 태도 아닌가.

내가 재직하는 대학에서도 재경회계학부의 오문성 교수가 불과 임용 1년 만에 전자우편으로 재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재임용 탈락의 표면적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전임교수가 한 기업의 비상임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 둘째, 전임교수가 총장의 허가 없이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비상임 사외이사가 해임의 이유라면,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학교수들은 이미 대거 해임되었을 것이다. 회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더 깊은 학문을 위해 ‘세법’을 또다시 공부하는 교수를 격려는 못해줄지언정 ‘불신임 총장’의 허가가 없었다고 해임하는 행위는 소와 말이 함께 웃을 일이다. 그런데 소와 말이 함께 웃을 일이 벌어진 것은, 해임당한 교수가 교수협의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원 민주화의 신념을 결코 꺾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겨레신문. 2006.6.28


문제는 우리사회에서 비판적 지성들이 설 자리가 자꾸만 협소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자본의 논리는 대학마저도 집어삼키려고 한다. 정신마저 신자유주의화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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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 강한 사람,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을 대하는 예의는 도덕적이기보다는 계산적이다. 식당 주인이나 백화점 직원의 지나친 친절이나 일터와 직장에서 상사를 대하는 자세만 계산적인 것은 아니다. 교사에게 학생과 학부모가 보이는 과도한 존경의 표시나 부모나 남편에 대한 아이들과 아내의 존경심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도덕은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 존경과 무시는 넘쳐나지만, 서로 존중하는 문화는 아직 낯설기만 하다. 존중을 모르는 존경의 도덕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은유를 반복적으로 세뇌시키는 가정교육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은 대화가 필요하지만, 존경받고 싶은 부모는 훈계에 익숙하다. 아이들은 비판적 사고를 통해 성장하지만, 부모는 권위를 앞세운다. 아이들은 만남을 통해 자유인으로 성장해야 하지만, 부모는 사랑의 이름으로 길들이려 한다.

존경의 도덕은 학교 교육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비판 없는 존경의 도덕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잘 길들여진 노예는 성실하고 믿음직한 학생으로 평가되고, 자유인으로 성장하려고 몸부림치는 학생들은 체벌 없이는 교육이 불가능한 문제아로 분류된다. 길들이기는 곧 선별하는 과정이 되고, 존경이란 덕목은 체벌을 통해 강자에게 순종·숭배할 것을 강요한다.

체벌은 신체에 직접적 고통을 주는 벌이다. 체벌을 학업 증진이나 비행을 교정하고자 하는 교육의 불가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체벌은 학습 능력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공부 잘하는 학생과 그가 사회에서 누리게 될 권력에 대한 이유 없는 존경심과 열등감을 심어줄 뿐이다. 회초리로 아이들만 길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어른들은 더 쉽게 길들일 수 있다. 체벌은 교육이 아니라 약자에 대한 강자의 무시이며 폭력이다.

최근 성적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초등학생의 뺨을 때리고 책을 던진 교사 이야기로 떠들썩하다. 한 달 전에는 청주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과도한 체벌에 강하게 항의하는 학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일이 있었다. 쉽게 무릎을 꿇은 교사의 행동도 놀랍지만, 교육계와 학부모의 반응은 더욱 충격적이다. 교육계는 존경받아야 할 교육자의 권위가 침해되었다고 요란하고, 청주 기계공고 어머니회는 사랑의 매를 들어달라며 회초리를 학교에 전달했다. 진정으로 회초리가 필요한 사람은 서로 존중할 줄 모르고 존경받기만을 원하는 부모와 교사들이 아닌가?

회초리로 길들여진 아이들은 과연 누구를 존경할까? 심심찮게 보도되는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부모와 교사, 그리고 정치·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항상 우선순위에 꼽힌다. 강한 사람, 성공한 사람, 그리고 가까이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다. 그런데 강자에 대한 무비판적 존경은 언제나 약자와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의 무시를 동반한다.

존경의 도덕이 반드시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로 존중하는 것이 먼저다. 가까이서 나를 위해 자기희생을 감수한 부모나 내 삶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는 교사는 존경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부모와 선생이 아니라 나와 유사한 욕구를 가진 인간으로 존중해야 한다. 회초리에 쉽게 무릎 꿇는 아이들이 만들어갈 사회는 계산에 따른 지배와 복종의 사회다. 자기를 낮출 줄 알지만 비굴하게 자기를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만나 서로를 존중하도록 하는 도덕 교육이 진정한 참여 민주주의의 출발이다.

한겨레신문.2006.7.4


얼마 전 술자리에서 했던 말, 자녀들에게 효도와 존경을 바랄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모를 자발적으로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고 했더니, 되돌아 오는 것은 냉랭한 시선 뿐.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효도와 존경과 같은 거의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언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자기성찰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효도와 존경의 도덕은 얼마나 허약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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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학과 선 - 마음을 다스리는 책 5
우희종 지음 / 미토스 / 2006년 1월
평점 :
절판


자칫 종교 담론은 소이연(所以然)보다는 가치지향적 도덕률로서의 당위연(當爲然)을 앞세우기 쉽다. 사실, 기술(記術)적 측면들을 존중하기보다는 당위,요청 등에 집착하려는 의도가 강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禪 을 이렇게 과학적 입장에서 볼 수도 있다는 데 아주 인상깊었다. 이 책을 읽을 때가 마침 황우석 사태가 일기 얼마 전이었는데, 이후 불교계에서는 황우석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얽히고설킨 내막이야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생명에 대한 근본 질문들이 침묵, 봉쇄되어서는 안된다는 것과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적 담론들이 보다 더 분석적이고 치밀해질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정치(精緻)한 과학적 인식틀을 포용해내지 않는 추상론은 자칫 공허해질 수 있을 뿐더러 나아가 현실을 오도할 수도 있다. 우리 근현대 종교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불교의  禪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있어 과학자인 저자가 쓴 이 책의  의미는 사뭇 크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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