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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판을 켜고 온 것이 분명하다[1]

 

2013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북한에서 장성택이 처형당했다. 호주에 산불이 났고, 필리핀에 태풍이 불었고, 샌프란시코 공항에 착륙하려던 아시아나항공의 여객기가 사고를 냈으며,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는 폭탄이 터졌다. 그리고 그 해에 남편은 두 번째로 실직을 했다.


한 번도 실직을 당해본 적이 없는 나는, 30년 군 생활 후 만기 전역한 아버지를 둔 나는, 사람이 실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어떻게 하면 두 번이나 실직을 당할 수가 있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두 번이나 실직을 당할 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어쩌다 저런 사람과 결혼을 한 것일까. 두 번째에는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별 수 없지. 이게 다 내 팔자다. 약 25분 동안 공황 상태에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던 나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오케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이나 갑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내가 무척 대범한 여자인 줄 착각하실 텐데, 나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낙천적인 여자냐고? 그것도 아니다. 집에 쌓아놓은 재산이 많아서 걱정할 게 없을 여자처럼 보이는가?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나는 주로 지나치게 비관적이다가 가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낙천적이 되어 이상한 짓을 하곤 하는 여자인데, 그런 현상을 일컫는 말이 있다. 바로 현실 도피.


결혼 이후 우리는 한동안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살아왔다. 그건 마치 플랫폼에 멍청하게 서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인파에 떠밀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도 모를 전철에 올라타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취직을 했고, 웨딩문화원이라는 데서 결혼식을 했고, 혼인신고를 했으며, 주택자금대출을 받았고,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취직을 했고, 아이를 연달아 둘 낳았고, 학부형이 되었다.


남편은 매일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은 불편한 차림으로 1시간이 넘게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퇴근을 했다. 눈치를 보고 욕을 먹고 욕을 하고 갈굼을 당하고 누군가를 갈구고 술을 퍼마시면서 돈을 벌었다. 남편의 양복바지는 여기 저기 헤지고 찢어진 데 투성이였다. 비싼데다 실용적이지도 않은 그 바지가 나는 싫었다.


남편이 그러고 사는 동안 나는 유모차를 밀며 하루 종일 집과 놀이터와 마트 사이를 전전했다. 난장판이 된 집에서 미친 듯이 매 끼니를 차려냈다. 적금을 붓고 대출 이자를 내고 공과금을 내고 보험에 들고 세금을 납부했다. 그러는 사이에 터널 시야 증후군에라도 걸린 듯 우리의 시야는 점점 좁아졌고 세상사를 바라보는 각도는 고정된 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인지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된 거였다. 다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이미 전철의 문은 닫혀 버렸다.
이제 전철 안의 상황에 좀 적응해 보려 했더니 떠밀려 내려야 했다. 우리를 텅 빈 플랫폼에 버려둔 채 전철은 떠나버렸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왕 망한 인생, 잠시라도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일도 하지 않고 공과금도, 대출 이자도, 보험료도, 세금도 내지 않고 싶었다.(실제로는 내고 있지만.)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싶었다. 빈둥대고 싶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싶었다. 하기 은 것은 하기 싫었다. 하기 싫은 것을 주로 하면서 살아왔으니, 2주 동안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다고 천벌을 받을 일도 아니었다.


우리는 달아나는 게 아니었다. 새로운 공기를 마시고 새로운 빛을 쬐고 새로운 바람을 맞고 새로운 시야와 새로운 각도를 얻는 것. 그것들을 안주머니 깊이 품은 채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전부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고민하던 우리는 목적지를 태국으로 정했다. 태국. 나의 첫 여행지. 내가 처음으로 밟아본 외국 땅. 처음 방콕 돈므앙 공항에 내렸을 때 열대의 새콤달콤한 향기가 입국장 안까지 흘러 들어왔었지.


20대 초반에 처음으로 태국을 여행한 후, 나는 여름만 되면 태국으로 가는 짐을 꾸려왔다. 나는 태국을 좋아했다. 나뿐만 아니라 함께 간 모든 이들이 태국을 좋아했다. 물가는 싸고 먹을 것은 지천이고 자연환경은 풍요롭고 즐길 거리가 널려 있으며 사람들은 친절한 곳. 그곳에서는 3천 원짜리 게스트 하우스에 묵으며 천 원짜리 국수로 끼니를 때우고 6천 원짜리 마사지를 받으며 유유자적 지낼 수 있었다. 반대로 10만 원대의 호텔에 묵으면서 3만 원짜리 스테이크를 썰고 에어컨이 시베리아 북동풍처럼 불어오는 화려한 쇼핑몰들을 순회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 중간쯤의 여행을 할 수도 있었다. 오늘은 가난한 여행자가 되었다가 내일은 부유한 관광객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태국에서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소비로 자존감을 획득하는 데 익숙한 우리에게 태국이란 그런 곳이었다. 3분의 1만 가져도 실컷 즐기다 올 수 있는 곳.


그러나 이번 여행은 좀 다르다. 이제 막 여덟 살과 여섯 살이 된 아이 둘을 데리고 가는 여행이다. 아이 둘을 데리고 태국을 여행하다니. 택시비를 흥정하고 낯선 골목에서 하룻밤 묵을 방을 찾아 헤매고 노천 식당에서 이름 모를 음식들을 먹고 트럭을 타고 뚝뚝을 타고 배를 타는, 그런 여행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것도 대문 앞만 나섰다 하면 다리가 아프다고 주저앉는 저 화상들을 데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파타야의 워터파크가 딸린 리조트를 검색하고 있었다. 외국인보다 한국인이 더 많아서 비행기를 타고 가평쯤에 놀러온 것 같은 그런 리조트라고 했다. 파타야라니, 아아 안 돼. 파타야에 갈 수는 없어.


파타야가 나쁜 곳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심지어 나는 파타야에 가본 적도 없다. 기껏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해놓고는 고른 것이 파타야의 리조트라니, 어쩐지 어색하지 않은가. 전형적인 바보짓이다. 하지만 나는 평소 이런 바보짓을 많이 한다. 생각난 김에 나의 바보짓 퍼레이드를 반추해 보자면,

 

1. 나는 트럭을 모는 것이 부끄럽다는 이유로 1종이 아닌 2종 수동 운전면허를 땄다. 내 평생 수동 자동차를 몰 일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동 운전면허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수동 기어가 달린 자동차로 운전 연습을 하느라 고생만 죽도록 했는데, 면허를 따자마자 클러치 밟는 법을 다 까먹어 버렸다. 결국 나는 수동 운전면허를 갖고 있지만 생계를 위해 트럭을 운전할 수도(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렇다고 수동 기어가 달린 자가용을 운전할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이게 뭔가.


2. 한때 자연주의 출산법에 경도되었던 나는 첫째를 조산원에서 낳았다. 지하에 나이트클럽이 있는 허름한 건물의 여관방 같은 조산원에서 DJ가 틀어대는 비트에 맞춰 밤새 소리를 지르다가 도합 38시간의 진통 끝에 자연주의 출산에 성공한 것이다(환경 빼고는 모든 것이 자연주의적이었다). 그때 나는 둘째는 무조건 온갖 약물과 기구의 도움을 받아 소독약 냄새 진동하는 병원에서 낳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세상에 첫째를 병원에서 낳고 둘째를 조산원에서 낳는 사람은 많아도 나처럼 반대로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별 수 없다. 바보짓은 내 특기니까. 혹시 조산원과 병원 중 어느 쪽이 더 나은지 묻는다면 애 낳는 건 뭘 어떻게 하건 죽도록 아프다고 말하련다.


3. 한때 내 꿈은 영화 <카모메 식당>의 여주인공처럼 동네의 한적한 골목에 예쁜 카페를 차리고 그곳을 찾아온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1년 반 만에 나는 단골손님과 싸우고 드나드는 낯선 손님들을 경계하고 미워하면서 카페의 문을 닫았다. 장사가 안 된다거나 몸이 고되다는 이유로 카페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물론 그 두 가지도 문을 닫은 이유에 포함이 되겠지만) 사실은 손님이 싫어서 그만둔 것이다. 손님이야말로 장사의 복병이라는 사실을 누가 꿈에라도 상상이나 했겠는가.(남들은 했겠지만 나는 바보라서 못한다.) 지금은 카페에 커튼을 내리고 작업실로 쓰고 있는데, 누가 들어와서 커피 한 잔을 달라고 하면 단호하게 안 판다고 말한 후 매몰차게 쫓아내 버린다.


물론 이 세 가지 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바보짓들을 하며 살아왔다.(바로 오늘 한 바보짓도 생각난다. 참담하다.) 내 인생은 바보짓을 하고 그것을 수습하며 사는 일의 연속이다. 아니, 그게 내 인생 자체다.
아무튼 밤새 파타야 리조트를 검색하고 있는 내게 남편이 말했다.


“이러려면 굳이 태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그의 말이 맞았다. 이런 코스라면 굳이 비싼 돈을 들여 아이들까지 끌고 태국에 갈 필요가 없었다. 나는 바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나의 바보짓 퍼레이드를 멈춰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평생 바보로 살다 바보로 죽게 될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우리 아이들보다 더 어린 아이를 데리고 더 험한 코스로 여행한 여자들도 있었다. 좋다. 나라고 못할 것이 뭔가.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고, 트럭을 타고, 배를 타고, 예전에 그랬던 대로, 길을 잃고, 헤매고, 당황하고, 화를 내고, 싸우고, 악다구니를 쓰고, 울고, 그러다 바보처럼 웃는, 여행 같은 여행을 해보자.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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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2]

 

태국에 가기 전에 나는 태국 여행에 관련된 웹사이트들을 섭렵한 후 그중 한 사이트의 운영자가 직접 만든 여행 안내서를 구입했다. 좋은 책이었다. 가보지도 않고 쓴 티가 역력한 다른 안내서들처럼 들고 다니다가 국제미아가 될 일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책이었다.


그 책을 우리보다 더 꼼꼼히 읽어본 아빠는 이 페이지를 꼭 읽어보라고 했다. 태국의 낯선 거리 음식을 보고 ‘저런 걸 어떻게 먹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번 도전해보면 다 먹을 만하다는, 특히 족발덮밥 같은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음식을 가리느라 맥도날드에 가고 서양 음식만 먹다 보면 배낭여행의 한정된 예산을 초과하는 것은 물론, 진정한 태국 문화를 경험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족발덮밥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그리고 아빠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코펠이랑 버너 안 가지고 가냐?”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페이지는 대충 보고 넘겨버리고 말았다. 사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바보가 이런걸 당해?’라고도 생각했다. 그것은 방콕의 ‘보석 사기’에 관한 페이지였다. 지도를 들고 얼빠진 표정으로 방콕의 거리(구체적으로 왕궁 부근)에 서 있는 당신에게 선량한 얼굴의 태국인이 다가온다. “좀 도와줄까?”라면서. 친절한 태국인은 당신이 찾고 있는 장소까지 가는 길을 알려준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어디에서 왔느냐, 태국은 처음이냐, 나는 유명한 T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당신은 그의 친절에 감복하고 태국의 유명 대학에 다닌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그는 관광객들은 잘 모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유명한, 정말 아름다운 사원이 여기에서 멀지 않다는 고급 정보까지 준다.


그러더니 그는 뚝뚝을 잡아주겠다고 한다. 방콕의 관광지들을 돌아보려면 이쪽이 훨씬 저렴하다면서. 직접 뚝뚝 기사와 적절한 가격을 흥정까지 해주겠다고도 한다. 그가 도로 쪽으로 나가서 두리번거리자 때마침 뚝뚝 한 대가 다가온다. 친절한 태국인은 말한 대로 저렴한 가격의 뚝뚝 투어를 흥정해준 후 고마워하는 당신에게 한마디 덧붙인다.

 

“그런데 방콕에서 보석 박람회가 열리는 것 알고 있니? 보석이 엄청나게 싸대. 요즘 외국 애들이 거기서 보석을 잔뜩 사서 자기 나라에서 비싸게 판다더라. 기회가 있으면 한번 들러봐”

 

가벼운 말투. ‘안 가면 네 손해지 나는 아무 상관도 없어’의 태도. 즐거운 여행을 빌며 그가 선량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역시 태국은 미소의 나라. 뚝뚝 기사는 태국인들의 친절에 홀딱 넘어간 당신을 그 아름답다는 사원으로 데려다준다.


사원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번들거리는 양복을 쫙 빼입고 콧수염까지 기른 번들거리는 얼굴의 남자가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번들거린다. 미소도 번들거리고 말투도 번들거린다. 그는 번들거리는 인사를 건넨다. 가벼운 신상조사가 끝난 후 그는 당신이 들고 있는 가이드북을 잠깐 보여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는 방콕에서 꼭 보아야 할 곳들을 찾아내 짚어준다. 번들거리기는 하지만 친절한 남자다. 그때 한 서양인 남자애가 다가온다. 공부만 하다가 태국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순진한 인상의 남자애다. 번들거리는 남자는 그 애가 자기 친구고, 프랑스인이라고 알려준다. 프랑스인은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그때 번들거리는 남자가 말한다.


“오늘 방콕에서 아시아 최고의 보석 박람회가 열린다더라. 보석을 엄청나게 싸게 판대. 부모님 선물로 좋을 거야.”


가든 안 가든 상관없지만 안 간다면 네가 참 불쌍하다는 느낌으로. 수줍은 프랑스인이 한마디 보탠다.

 

“나도 작년에 보석을 잔뜩 사서 프랑스에 가서 5배의 이윤을 붙여 팔았어. 올해도 그래 보려고.”


당신은 갑자기 흥분한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추천할 정도면 분명히 뭔가 있다. 지금껏 당신의 인생에는 금전운이란 없었다.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기대도,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당신의 인생은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할 것이다. 남들이 돈방석에 올라앉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보석 박람회가 당신을 부른다.
당신은 사원을 뛰쳐나가 문 앞에서 기다리던 뚝뚝 기사에게 다급하게 소리친다.


“보석 박람회장으로!”


박람회장은 모르는 사람은 찾아가기도 힘들 방콕 시내 어딘가의 커다란 건물에서 열리고 있다. 그렇게 유명한 박람회라더니 주차장이 텅텅 비어 있다. 하지만 오히려 안도감이 든다. 좋은 물건을 남들보다 빨리 낚아챌 수 있게 되었다.


초조함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홀 같은 곳에 보석이 잔뜩 진열된 쇼케이스를 늘어놓고 대부분 중국계 태국인으로 보이는 보석상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다. 갑자기 당신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석을 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뭐가 보석이고 뭐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보석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당신의 눈에도 이 보석들은 제3세계를 제외하고서는 팔릴 가능성이 희박한 디자인 같아 보인다. 심지어 가격표에 찍힌 금액은 심장마비가 올 지경이다. 그래도 일단 사가지고 가면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 당신의 맞은편으로 한 무리의 서양인들이 나타난다. 얼빠진 미소를 띤 채로 보석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을 너절한 차림을 하고서 쇼케이스 사이를 걸어 다니는 노란머리의 덩치 큰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당연하다. 그건 당신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사기를 당한 사람의 얼굴.


사기의 기본은 ‘우연을 필연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 친절한 태국인은 당신에게 다가와 길을 알려주었고, 근처에서 대기하던 뚝뚝은 신호를 받고 달려왔으며, 사원에서는 번들거리는 남자와 프랑스인 남자애(알바생으로 추정)가 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것이 신이 내린 대박의 기회라는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 놀라운 우연의 고리가 조금이라도 느슨했더라면, 또는 그 느슨함을 눈치챌 만한 약간의 지능이 있었더라면, 당신은 보석 박람회장을 멍청한 얼굴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느냐 하면, 바로 내가 그 사기를 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가이드북의 ‘보석 사기’ 페이지를 보며 비웃기까지 했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세상에, 어떤 바보가 이런 사기를 당하나.’ 그 바보가 바로 나였다.


다행히 최후의 순간에 이것이 사기임을 눈치 챌 정도의 지능은 있었던(침팬지 정도의 지능이면 가능) 나와 동생은 황급히 보석 박람회장을 빠져나왔다.(불쌍한 미국인 동지는 구해내지 못했다.) 우리는 수수료를 못 챙기게 되어 기분을 잡친 뚝뚝 기사와 칼부림을 한판 벌인 후 무사히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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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이상한 일[1]

 

군인인 아빠는 많은 나라에 다녀왔다. 배를 타고 싱가포르나 하와이 같은 곳으로 ‘원양’이라는 것을 갈 때도 있었고 미국이나 독일 같은 나라에 1년씩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돌아올 때면 아빠는 까맣고 네모난 비즈니스 가방을 들고 왔다. 번호로 잠그게 되어 있는 가방이었다. 아마 샘소나이트 가방이었을 것이다. 007가방이라 불리던 가방이었다. 많이 들어가지도 않는데 가방 무게만으로도 무겁고, 어깨끈도 없어서 늘 손으로 들어야 하는 가방이었다. 기업의 비밀 서류나 돈다발이 차곡차곡 들어 있을 것 같은 가방이었고, 액체 폭탄이 들어있을 것 같은 가방이었다.


돌아온 아빠가 가방을 여는 순간을 나는 고대하고 또 고대했다. 아빠도 보고 싶었지만 아빠가 가방 속에 담아온 외국의 물건들을 어서 빨리 보고 싶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는 시장마다 수입품 가게라는 것이 있었는데 외국 물건들을 잔뜩 쌓아놓고 파는 곳이었다. 외국 물건들은 참으로 알록달록했고 듣도 보도 못한 신기한 것들로 가득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수입품 가게마다 모여 앉아 하루 종일 커피를 타마시고 수다를 떨다가 저녁밥 짓는 시간이 다가오면 국자나 보온병이나 영양제나 스타킹 같은 것을 하나씩 사서는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아빠의 가방 속은 꼭 그 수입품 가게의 축소판 같았다. 가방 안에는 커다란 허쉬 초콜릿이라든지, 리바이스의 청바지,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사온 안네 프랑크의 일기, 런던의 2층 버스 모형, 네덜란드의 풍차 모형, 독일의 맥줏집에서 긁어온 종이로 만든 맥주받침, 그 외에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장식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꼭 요술 가방 같았다. 저 많은 것들을 하나씩 사들이고 모으면서, 귀국 전날 그것들을 저 가방 속에 꽉꽉 채워 넣으면서 아빠는 얼마나 들뜨고 뿌듯했을까.


다른 나라에 대한 아빠의 호기심은 가족에 대한 미안함을 억누를 정도로 컸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간다는 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아빠로서는 상상조차 못했던 엄청난 행운이고 기회였을 것이다. 한국에서 쪼들리면서 살아가는, 외국 따위는 꿈도 못 꿀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아빠는 그 작은 물건들 하나하나를 사고 모으면서 조금씩 떨쳤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산 사람이라서 좋았다. 내 기억에 아빠는 늘 즐거워보였다. 죽지 못해 사는 얼굴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즐거운 일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 하고 살았다. 혼자서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려고 했다. 그건 아빠가 특별히 가정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남과 같이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돌아오면 아빠는 동네 사람들을 비좁은 우리 집에 초대해서 슬라이드 영사기에 찍어온 필름들을 넣고 벽에 쏘아 작은 상영회를 열었다. 거기에는 그때의 우리가 상상도 못했던 풍경들이 있었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찍은 들판 위의 풍차와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와 런던의 새빨간 2층 버스와 깨끗한 지하철과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예쁜 집들과 푸짐한 미국식 식사와 노란 머리에 키도 크고 코도 큰 외국 사람들이. 사진 속 도시와 사람들과 심지어 사진 속 아빠조차도 같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요즘도 아빠는 우리가 친정에 갈 때마다 여행지에서 찍어온 디지털 사진들을 TV에 연결해 보여준다. 이제 더 이상 나는 그 사진 속의 나라들이 신기하지 않다. 나도 다 가봤으니까. 심지어 디지털 사진의 시대가 오면서 아빠의 사진 찍는 실력은 점점 더 퇴보하고 있는 것 같다. 의미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사진들이 태반이다. 대개 이런 식이다.


1. 도대체 누구를 찍은 건지 알아볼 수 없는 사진
2.무언가를 하고 있는 엄마(대개 찍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성의 없는 구도로 카메라를 들이대 얼굴이 모아이 석상 부럽지 않게 크거나, 눈을 감고 있다.)
3. 정체를 알 수 없는 돌무더기 따위를 붙잡고 있는, 같은 표정의 사진 연작
4. 값싸고 맛 좋은 음식의 향연(과 기뻐하고 있는 아빠의 얼굴)
5. 사람은 블루스크린 앞에서 찍은 뒤 마치 배경만 합성한 것 같은 사진


우리는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하품을 한다. 딴 얘기를 한다. 결국 내가 참지 못하고 말한다.
“이제 그만 보면 안 돼?”
누구라도 1, 2, 3, 4, 5의 사진을 한 시간째 보고 있다면 같은 소리를 할 것이다. 아빠는 어색하게 웃지만 기분이 상한 것이 전광판처럼 얼굴에 다 드러난다(그리고 나는 아빠를 닮았다). 아빠는 상영회를 조속히 마무리한 뒤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엄마는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애쓴다. 엄마가 10여 년 전에 암에 걸린 것도 이해가 갈 만한 일이다.


아무튼 대학생이 된 내가 고등학생인 남동생을 데리고 첫 해외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아빠는 본인이 더 흥분하고 들뜬 모양이었다(사실 우리 아빠는 잠잘 때 빼고는 늘 흥분하고 들떠 있다. 엄마의 진단으로는 성인 ADHD). 아빠는 우리를 끌고 백화점에 가서 배낭을 골랐다. 아빠는 50리터짜리 배낭을 권했다. 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커 보였다. 에베레스트 등반에나 필요할 배낭이었다. 아빠는 버너와 코펠과 라면과 쌀과 김치와 생수병을 넣어 가려면 이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는 버너와 코펠과 라면과 쌀과 김치와 생수병은 필요 없다고 했다. 밥은 사먹을 거라고 덧붙였다. 여행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현지 음식 체험이 아니던가.


아빠는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아빠의 경험상 호텔방에서 몰래 버너에 불을 붙여 코펠에 지은 밥에 통조림 깻잎이나 김치, 고추장으로 끼니를 때우지 않는 것은 여행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엄마와 파리에 갔을 때도 코펠에 밥을 지어 먹거나 슈퍼마켓에서 산 빵과 맥도널드 햄버거로 연명했다고 했다.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아빠의 설득에 못 이겨 나는 50리터짜리 배낭을 샀다. 아빠가 권해서 복대도 샀다. 아빠는 늘 그러듯 지나칠 정도로 세세하게 복대의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바지 밖이 아니라 꼭 바지 안에 넣어야 한다. 여권과 항공권과 복사본과 귀중품은 꼭 여기에 넣어두어야 한다. 한시도 몸에서 떼어놓아서는 안 된다. 심지어 샤워할 때도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나는 아빠의 말씀을 받들어 그 복대를 허리춤에, 그러니까 속옷과 바지 사이에 꼭 차고 다녔다. 원래도 아랫배가 나왔는데 이제는 거의 임신 5개월 수준으로 배가 나와 보였다. 복대에서 뭔가를 꺼낼 때마다 어린 시절 자주 보던 할머니들 중 한 명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거스름돈을 거슬러주거나 용돈을 줄 때 바지 속으로 손을 넣어 안에 달아둔 주머니를 더듬거리며 찾던 그런 할머니들 말이다(가끔은 손이 허리춤과 가랑이를 지나 거의 무릎 안쪽까지 들어가기도 했다).


게다가 열대의 기후에 복대까지 하고 다니려니 나중에는 허리춤에 땀이 차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빠의 경고대로 태국 국민의 절반 이상이 소매치기인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내게 큰돈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복대를 풀어 배낭 안쪽에 고이 넣고 다녔다. 그 여행 이후로 수없이 여행을 다녔지만 소매치기를 당하거나 여권이나 지갑을 잃어버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운이 좋았다. 그 복대는 첫 여행 이후로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다.


떠나기 전날 밤, 방에서 짐을 꾸리고 있는데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는 버너를, 한 손에는 부탄가스를 든 아빠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다.


“진짜 안 들고 갈 거냐?”


떠나는 날 아침, 김포 공항에서(그때는 인천 공항이 생기기 전이었습니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는 이런저런 상투적인 당부의 말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한 후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런데 생수는 챙겼냐?”


그로부터 5년 후, 엄마와 둘이서 태국 여행을 갈 때 아빠는 500ml 생수병을 체류일의 수만큼 배낭 가득 채워갔다. 물은 역시 삼다수라면서. 다행히 버너와 부탄가스는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것까지 챙겼더라면 아빠는 테러범으로 검거되어 지금껏 귀국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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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본 적 없는 인생[2]

 

끄라비 공항의 짐 찾는 곳에서 나는 머리에는 커다란 헤어밴드를 하고(신혼여행으로 간 일본의 편의점에서 산 무인양품 제품이다. 한마디로 늘어질 대로 늘어진 것) 목이 늘어난 회색 반팔 티셔츠에(남동생이 입다 버린 것) 역시 늘어진 미니스커트를 입고(산 지 10년은 더 된 것), 끈 달린 슬리퍼(이마트!)를 신은 채였다. 등에는 내 복덩이 배낭을 메고 어깨에는 잡동사니를 넣은 숄더백도 하나 더 멨다.


내 옆에 선 선남선녀의 인생이, 나는 부러웠다. 부럽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과 내가 살아볼 수 없는 인생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 같은 거였다.


학창시절의 어떤 여자애들에 대한, 그 여자애들의 인생에 대한 감정이나 비슷했다. 말간 얼굴에 입을 가리고 웃는 여자애들. 조용히 말하고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여자애들. 교복에 구겨진 자국 하나 없이 셔츠의 목과 소매가 언제나 깨끗한 여자애들. 체육 수업을 마치고 수돗가에서 얼굴을 씻고 난 후에는 손수건을 꺼내 찍어내듯 물기를 닦아내는 여자애들. 내 교복은 항상 구겨져 있었고 내가 수돗가에서 물을 틀기라도 하면 늘 옷이 흠뻑 젖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얼굴의 물기는 언제나 바람에 말렸다. 그런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여자애들의 인생.


짐을 찾은 후 우리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갈라질 것이다. 나는 공항을 빠져나와 선착장으로 가장 싸게 가는 법을 찾아 헤맬 것이고, 그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고급 리조트의 밴에 가볍게 올라탈 것이다. 내가 겨우 몸을 구겨 넣은 사설 셔틀 버스는 나를 끄라비 시내의 알 수 없는 장소에 내려줄 것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어리둥절해 할 동안, 그들은 시 외곽의 리조트에 도착해 미소 띤 직원에게 방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을 것이다. 아름답고 청결한 방에 도착해서는 벨보이에게 팁을 좀 쥐어주고 방문을 닫을 것이다.

 

여자가 창 너머의 프라이빗 풀을 향해 걸어가면 에어켠을 켠 남자가 웃으며 그녀의 뒤를 따를 것이다. 여자는 풀에 발끝을 담가볼 것이다. 남자는 “수영부터 먼저 할까?” 라고 물을 것이고 여자는 “수영은 나중에 하고 우선 구경부터 할까?” 라고 제안할 것이다. 둘은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지금까지도 무거운 옷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가벼운 마음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리조트를 산책할 것이다.


내가 겨우 피피행 페리 선착장에 도착해 떠나기 직전의 배를 잡아타기 위해 끝도 없이 긴 땡볕의 도크 위를 미친 듯이 달려 다이빙하듯 배에 뛰어들고, 커다란 몸집의 북유럽 남자들이 아우슈비츠행 열차를 타기나 한 것처럼 우울한 표정으로 구겨져 있는 기름내 나는 지하 선실에 겨우 자리를 잡고 있을 때, 그들은 그들 인생의 아름다운 한때를 맛볼 것이다. 그런 그들의 인생이 나는 부러웠다. 그들의 인생 전반을 촉촉하게 적시고 있을 운과 복이 부러웠다.


그때 내 인생의 운과 복은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태국으로 2주 동안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이유는 운이 넘치고 복이 터져서가 아니라 남편이 실직을 했기 때문이다. 나의 운과 복의 시대는 이제 끝난 것인가.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이 정도면 내 주제에 과분할 정도로 운이 좋고 복이 넘치는 것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끔씩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일 쓰셨던 일기장에서 훔쳐본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참 박복하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내 일기장에 그런 문장 따위는 쓰고 싶지 않다.


그때 남편이 활주로를 걷는 나와 아이들을 뒤에서 찍은 사진이 있다. 나는 헤어밴드를 하고 배낭을 등에 메고 배낭에 운동화를 매달고 숄더백까지 어깨에 멘 채로 끈 달린 슬리퍼를 신고서 씩씩하게 걷고 있다. 늠름한 어깨와 탄탄한 허벅지와 단단한 종아리. 나의 뒤를 배낭을 멘 아이들이 쫓아오고 있다. 각각 헬로 키티와 도라에몽이다.

 

그리고 프레임 바깥쪽, 내 옆에 그 커플의 모습이 보인다. 팔짱을 낀 채로 단정한 차림으로 다정히 걷는 그 커플이. 나와 다른 인생을 사는 그 커플이. 어쩌다 우연히 같은 프레임 안에 담긴 사람들이. 그 사진을 통해 나는 내가 아닌 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옆에서 걷고 있는 그 커플의 뒷모습도 함께 본다. 둘은 한눈에도 완전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다. 내가 그들처럼 살게 될 일도, 그들이 나처럼 살게 될 일도 없을 것이다. 운이고 복이고 상관없이, 그저 자기 인생을 사는 것뿐이다.


우리는 잠시 끄라비라는 도시의 공항에서 만났다가 헤어질 사람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나를 기억조차 하지 못할 것이고, 나도 거리에서 그들을 마주친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때때로, 나는 세상의 여기저기에서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을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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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본 적 없는 인생[1]

 

끄라비 공항의 짐 찾는 곳에 한 커플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사람이 아닐까 싶었는데, 한국인들이었다. 단정한 머리 모양에 선글라스를 쓰고 바나나 리퍼블릭이나 클럽 모나코의 모델들처럼 차려 입고는 손에는 작은 가죽 가방을 든 커플이었다. 먼지도 흠집도 헝클어진 데도 없는 커플이었다. 순간 그들이 부러워졌다. 어쩌면 그들의 인생이.


방콕에서 며칠을 보내다 남부의 해안 도시 끄라비까지 비행기를 탔다. 끄라비에서는 아름다운 피피 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비행기는 끄라비에 착륙하기 전 기류 불안정으로 심하게 요동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자 팔걸이를 꽉 붙잡고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한 중국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에게 동지의식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끄라비 공항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비행기가 기체를 서서히 앞으로 숙이기 시작했고, 구름을 통과할 때 복도를 걸어 다니며 승객들의 안전벨트를 체크하던 승무원들이 의자를 붙잡고 휘청거릴 정도로 기체가 흔들렸다. 아이들은 좋다고 깔깔대고 중국 아주머니는 괴성을 지르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목구멍 속에서 하느님과 알라와 부처님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면서 승무원들의 표정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일쯤이야 밥 먹듯이 일어나는 걸’ ‘기장님도 참!’ 의 얼굴로 생글거리며 복도 위를 협곡 사이에 놓인 흔들다리라도 되는 듯 위태롭게, 하지만 꿋꿋이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빛에 0.0002초 정도의 속도로 스쳐지나간 두려움을 놓치지 않았다. 저들은 분명 비행기가 땅이나 바다를 향해 속수무책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에도 미소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복도를 지나쳐 비행기 뒤편에 다다르면 커튼을 닫고 엎드려 울면서 기도를 하거나 부모나 애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구명조끼를 챙겨 입고 산소마스크를 쓸 것이다. 하지만 땅 위에 추락할 때 구명조끼가 무슨 소용인가. 중국 아주머니를 끌어안고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약 10분 후, 나는 살아서 끄라비 공항의 짐 찾는 곳에 서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할 만한 다짐(‘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따위는 늘 그렇듯 깡그리 잊어버린 내 곁에는 그 커플이 있었다. 남자는 흰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여자는 구김 하나 없는 스커트를 입고 가벼운 스웨터를 어깨에 걸친 채로(이 더위에 스웨터라니!) 작은 귀걸이도 하고 엷은 화장까지 했다.


지금껏 수도 없이 열대의 나라들을 여행했지만, 단 한 번도 그들과 같은 차림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 첫 여행 때는 집에서 입는 옷, 입다가 버릴 옷만 배낭 속에 잔뜩 쑤셔 넣어 갔다. 정말로 입다가 버릴 작정이었는데 집착이 심해서 양말 한 짝 버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갖고 돌아왔다. 여행지에서의 구질구질한 내 모습에 짜증이 난 다음부터는 좋아하는 옷들을 가져갔다. 그래봤자 죄다 소매 없는 티셔츠, 소매 있는 티셔츠, 소매 대신 어깨끈이 달린 티셔츠였다. 허름한 청바지나 짧은 스커트나 핫팬츠를 가져가기도 했다. 내가 여행지에서 입을 옷을 고르는 기준은 간단했다. 가볍고 얇고 잘 구겨지지 않고 빨았을 때 금방 마르는 것. 거기에 머리는 산발을 하거나(생각해 보니 머리를 빗지 않은 지 20년은 된 것 같다.) 질끈 동여매거나 밀짚모자를 쓰거나 반다나, 또는 헤어밴드로 대충 가리고 다녔다.


게다가 나는 언제나 슈트케이스보다는 배낭을 선호한다. 나는 성큼성큼 걷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성큼성큼 걷는 여자에게는 슈트케이스가 어울리지 않는다. 슈트케이스는 ‘나는 내 인생을 끌고 다니고 있어. 개처럼 질질’의 느낌으로 끌고 다녀야 한다. 나는 내 인생을 끌고 다니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어깨에 이고 다니는 쪽이다. 성큼성큼.


다만 내 여행용 배낭은 턱없이 작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 호텔에서 열리는 유럽의 한 등산용품 브랜드 런칭 행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나도 한때는 그런 데 초대도 받고 그랬다.) 오로지 호텔 밥을 먹고 싶어 간 것인데, 그날의 메뉴는 감사하게도 스테이크였다. 하지만 스테이크보다는 납작하고 얇게 썬 노란색 버터가 얌전히 올려져 있던 작은 접시가 더 기억에 남는다. 버터는 적당하게 물러져 있었고 나이프로 떠서 빵 위에 펴 발라 먹기에 최적의 상태였다. 버터의 맛은 참으로 호사스러웠다. 나는 빵 부스러기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접시를 싹싹 비웠다.


곧 추첨 행사가 있었다. 입구에서 건넨 명함을 추첨해 선물을 주는 행사였다. 나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나는 원래 추첨이란 추첨에는 다 떨어지는 타입이다. 요행을 바래서는 안 되는 인생이다. 추첨장에서 나는 늘 남들이 펄쩍 펄쩍 뛰며 기뻐하는 모습이나 지켜보다가 똥 씹은 얼굴로 집으로 향하는 인생이었다. 노력 없이 얻은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나도 이런 내 운명에 체념했다. 그래서 나는 복권도 사지 않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사본 적 없고 사볼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복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언젠가 친구가 “복권이나 당첨됐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자존심이 있지, 난 복권 같은 건 안 사”라고 단호하고 매정하게 말한 적도 있다. 실은 자존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게 당첨 운이란 것이 있었다면 나도 매주 복권을 사댔을 것이다.


그런데 스테이크를 먹었으니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는 마음에 반쯤 넋을 놓고 여유롭게 배를 두드리고 있던 내 이름이 불렸다! 내가 당첨이 된 것이다! 나처럼 당첨 운이 없는 여자가 말이다!
운이나 복이란 건 누구에게나 같은 양으로 주어지는 걸까, 아니면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걸까?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어지는 걸까? 만일 누구에게나 같은 양으로 주어지는 거라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 운과 복이 특정한 시기에 몰리기도 하고, 너무 일찍 찾아오기도 하고, 너무 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 운과 복을 제대로 누리지도못한 채 떠나기도 한다. 한 푼 한 푼 모아 방바닥 밑에 묻어둔 전 재산을 결국 쓰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노랑이 영감처럼.


운과 복을 인생의 이 시기와 저 시기에 잘 배분해서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재정 플랜이라도 짜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내 운과 복들이 봄에 내리는 비처럼 인생의 모든 시기를 촉촉히 적시게 하고 싶다.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인생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그 행사장에서 나는 당첨 선물로 작은 등산용 배낭을 받았다. 내 돈 주고는 절대 안 살 배낭이었다. 하지만 튼튼한 배낭이라 여행 다닐 때 메고 다니기 좋다. 긴 여행에는 맞지 않지만 일주일 안쪽의 짧은 여행이나 짐이 가벼운 더운 나라를 여행할 때는 그럭저럭 쓸 만하다. 여분의 신발까지 넣으면 가방이 터질 것 같아 신발은 주머니에 넣어서 가방 앞쪽에 끈으로 고정해 달아둔다. 그렇게 하면 그럭저럭 배낭여행자의 느낌이 난다. 그 배낭은 그 해 내게 주어진 운과 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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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2017-09-16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여행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됩니다

chagall 2017-09-22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배낭을 더 좋아해요. 질질 끄는 캐리어보다 등에 달라 붙어 나와 여행을 같이하겠다고 붙어 있는 배낭이 더 좋아요

ByulNuRy 2017-10-02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깨만 아프지 않다면 배낭이 백번 낫지요^^

선비 2017-10-11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에서 여행이란 한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에 눈으로 발로 체험하는 감흥의 일기를 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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