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이상한 일[2]

 

태국에 가기 전에 나는 태국 여행에 관련된 웹사이트들을 섭렵한 후 그중 한 사이트의 운영자가 직접 만든 여행 안내서를 구입했다. 좋은 책이었다. 가보지도 않고 쓴 티가 역력한 다른 안내서들처럼 들고 다니다가 국제미아가 될 일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책이었다.


그 책을 우리보다 더 꼼꼼히 읽어본 아빠는 이 페이지를 꼭 읽어보라고 했다. 태국의 낯선 거리 음식을 보고 ‘저런 걸 어떻게 먹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번 도전해보면 다 먹을 만하다는, 특히 족발덮밥 같은 음식은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음식을 가리느라 맥도날드에 가고 서양 음식만 먹다 보면 배낭여행의 한정된 예산을 초과하는 것은 물론, 진정한 태국 문화를 경험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거였다. 나는 족발덮밥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그리고 아빠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정말 코펠이랑 버너 안 가지고 가냐?”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페이지는 대충 보고 넘겨버리고 말았다. 사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바보가 이런걸 당해?’라고도 생각했다. 그것은 방콕의 ‘보석 사기’에 관한 페이지였다. 지도를 들고 얼빠진 표정으로 방콕의 거리(구체적으로 왕궁 부근)에 서 있는 당신에게 선량한 얼굴의 태국인이 다가온다. “좀 도와줄까?”라면서. 친절한 태국인은 당신이 찾고 있는 장소까지 가는 길을 알려준 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어디에서 왔느냐, 태국은 처음이냐, 나는 유명한 T대학교에 다니고 있다. 당신은 그의 친절에 감복하고 태국의 유명 대학에 다닌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그는 관광객들은 잘 모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유명한, 정말 아름다운 사원이 여기에서 멀지 않다는 고급 정보까지 준다.


그러더니 그는 뚝뚝을 잡아주겠다고 한다. 방콕의 관광지들을 돌아보려면 이쪽이 훨씬 저렴하다면서. 직접 뚝뚝 기사와 적절한 가격을 흥정까지 해주겠다고도 한다. 그가 도로 쪽으로 나가서 두리번거리자 때마침 뚝뚝 한 대가 다가온다. 친절한 태국인은 말한 대로 저렴한 가격의 뚝뚝 투어를 흥정해준 후 고마워하는 당신에게 한마디 덧붙인다.

 

“그런데 방콕에서 보석 박람회가 열리는 것 알고 있니? 보석이 엄청나게 싸대. 요즘 외국 애들이 거기서 보석을 잔뜩 사서 자기 나라에서 비싸게 판다더라. 기회가 있으면 한번 들러봐”

 

가벼운 말투. ‘안 가면 네 손해지 나는 아무 상관도 없어’의 태도. 즐거운 여행을 빌며 그가 선량한 얼굴로 손을 흔든다. 역시 태국은 미소의 나라. 뚝뚝 기사는 태국인들의 친절에 홀딱 넘어간 당신을 그 아름답다는 사원으로 데려다준다.


사원 안을 돌아다니다 보면 번들거리는 양복을 쫙 빼입고 콧수염까지 기른 번들거리는 얼굴의 남자가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번들거린다. 미소도 번들거리고 말투도 번들거린다. 그는 번들거리는 인사를 건넨다. 가벼운 신상조사가 끝난 후 그는 당신이 들고 있는 가이드북을 잠깐 보여줄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는 방콕에서 꼭 보아야 할 곳들을 찾아내 짚어준다. 번들거리기는 하지만 친절한 남자다. 그때 한 서양인 남자애가 다가온다. 공부만 하다가 태국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순진한 인상의 남자애다. 번들거리는 남자는 그 애가 자기 친구고, 프랑스인이라고 알려준다. 프랑스인은 수줍게 인사를 건넨다.
그때 번들거리는 남자가 말한다.


“오늘 방콕에서 아시아 최고의 보석 박람회가 열린다더라. 보석을 엄청나게 싸게 판대. 부모님 선물로 좋을 거야.”


가든 안 가든 상관없지만 안 간다면 네가 참 불쌍하다는 느낌으로. 수줍은 프랑스인이 한마디 보탠다.

 

“나도 작년에 보석을 잔뜩 사서 프랑스에 가서 5배의 이윤을 붙여 팔았어. 올해도 그래 보려고.”


당신은 갑자기 흥분한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추천할 정도면 분명히 뭔가 있다. 지금껏 당신의 인생에는 금전운이란 없었다.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기대도, 확신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당신의 인생은 획기적인 전환을 맞이할 것이다. 남들이 돈방석에 올라앉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보석 박람회가 당신을 부른다.
당신은 사원을 뛰쳐나가 문 앞에서 기다리던 뚝뚝 기사에게 다급하게 소리친다.


“보석 박람회장으로!”


박람회장은 모르는 사람은 찾아가기도 힘들 방콕 시내 어딘가의 커다란 건물에서 열리고 있다. 그렇게 유명한 박람회라더니 주차장이 텅텅 비어 있다. 하지만 오히려 안도감이 든다. 좋은 물건을 남들보다 빨리 낚아챌 수 있게 되었다.


초조함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으로 박람회장 안으로 들어간다. 커다란 홀 같은 곳에 보석이 잔뜩 진열된 쇼케이스를 늘어놓고 대부분 중국계 태국인으로 보이는 보석상들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다. 갑자기 당신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보석을 사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뭐가 보석이고 뭐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보석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당신의 눈에도 이 보석들은 제3세계를 제외하고서는 팔릴 가능성이 희박한 디자인 같아 보인다. 심지어 가격표에 찍힌 금액은 심장마비가 올 지경이다. 그래도 일단 사가지고 가면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는 당신의 맞은편으로 한 무리의 서양인들이 나타난다. 얼빠진 미소를 띤 채로 보석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을 너절한 차림을 하고서 쇼케이스 사이를 걸어 다니는 노란머리의 덩치 큰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어쩐지 낯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당연하다. 그건 당신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사기를 당한 사람의 얼굴.


사기의 기본은 ‘우연을 필연으로 믿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위해 친절한 태국인은 당신에게 다가와 길을 알려주었고, 근처에서 대기하던 뚝뚝은 신호를 받고 달려왔으며, 사원에서는 번들거리는 남자와 프랑스인 남자애(알바생으로 추정)가 시간에 맞춰 나타나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이것이 신이 내린 대박의 기회라는 착각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 놀라운 우연의 고리가 조금이라도 느슨했더라면, 또는 그 느슨함을 눈치챌 만한 약간의 지능이 있었더라면, 당신은 보석 박람회장을 멍청한 얼굴로 돌아다니지 않아도 좋았을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느냐 하면, 바로 내가 그 사기를 당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는 가이드북의 ‘보석 사기’ 페이지를 보며 비웃기까지 했던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세상에, 어떤 바보가 이런 사기를 당하나.’ 그 바보가 바로 나였다.


다행히 최후의 순간에 이것이 사기임을 눈치 챌 정도의 지능은 있었던(침팬지 정도의 지능이면 가능) 나와 동생은 황급히 보석 박람회장을 빠져나왔다.(불쌍한 미국인 동지는 구해내지 못했다.) 우리는 수수료를 못 챙기게 되어 기분을 잡친 뚝뚝 기사와 칼부림을 한판 벌인 후 무사히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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