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본 적 없는 인생[1]
끄라비 공항의 짐 찾는 곳에 한 커플이 서 있었다. 처음에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사람이 아닐까 싶었는데, 한국인들이었다. 단정한 머리 모양에 선글라스를 쓰고 바나나 리퍼블릭이나 클럽 모나코의 모델들처럼 차려 입고는 손에는 작은 가죽 가방을 든 커플이었다. 먼지도 흠집도 헝클어진 데도 없는 커플이었다. 순간 그들이 부러워졌다. 어쩌면 그들의 인생이.
방콕에서 며칠을 보내다 남부의 해안 도시 끄라비까지 비행기를 탔다. 끄라비에서는 아름다운 피피 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비행기는 끄라비에 착륙하기 전 기류 불안정으로 심하게 요동쳤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의자 팔걸이를 꽉 붙잡고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는 한 중국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에게 동지의식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슬그머니 눈길을 피했다.
끄라비 공항이 창밖으로 내려다보일 정도로 가까워지자 비행기가 기체를 서서히 앞으로 숙이기 시작했고, 구름을 통과할 때 복도를 걸어 다니며 승객들의 안전벨트를 체크하던 승무원들이 의자를 붙잡고 휘청거릴 정도로 기체가 흔들렸다. 아이들은 좋다고 깔깔대고 중국 아주머니는 괴성을 지르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목구멍 속에서 하느님과 알라와 부처님의 이름을 외쳤다. 그러면서 승무원들의 표정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일쯤이야 밥 먹듯이 일어나는 걸’ ‘기장님도 참!’ 의 얼굴로 생글거리며 복도 위를 협곡 사이에 놓인 흔들다리라도 되는 듯 위태롭게, 하지만 꿋꿋이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빛에 0.0002초 정도의 속도로 스쳐지나간 두려움을 놓치지 않았다. 저들은 분명 비행기가 땅이나 바다를 향해 속수무책으로 곤두박질치는 순간에도 미소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복도를 지나쳐 비행기 뒤편에 다다르면 커튼을 닫고 엎드려 울면서 기도를 하거나 부모나 애인에게 전화를 걸거나 구명조끼를 챙겨 입고 산소마스크를 쓸 것이다. 하지만 땅 위에 추락할 때 구명조끼가 무슨 소용인가. 중국 아주머니를 끌어안고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약 10분 후, 나는 살아서 끄라비 공항의 짐 찾는 곳에 서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할 만한 다짐(‘앞으로 착하게 살겠습니다!’) 따위는 늘 그렇듯 깡그리 잊어버린 내 곁에는 그 커플이 있었다. 남자는 흰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여자는 구김 하나 없는 스커트를 입고 가벼운 스웨터를 어깨에 걸친 채로(이 더위에 스웨터라니!) 작은 귀걸이도 하고 엷은 화장까지 했다.
지금껏 수도 없이 열대의 나라들을 여행했지만, 단 한 번도 그들과 같은 차림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 첫 여행 때는 집에서 입는 옷, 입다가 버릴 옷만 배낭 속에 잔뜩 쑤셔 넣어 갔다. 정말로 입다가 버릴 작정이었는데 집착이 심해서 양말 한 짝 버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갖고 돌아왔다. 여행지에서의 구질구질한 내 모습에 짜증이 난 다음부터는 좋아하는 옷들을 가져갔다. 그래봤자 죄다 소매 없는 티셔츠, 소매 있는 티셔츠, 소매 대신 어깨끈이 달린 티셔츠였다. 허름한 청바지나 짧은 스커트나 핫팬츠를 가져가기도 했다. 내가 여행지에서 입을 옷을 고르는 기준은 간단했다. 가볍고 얇고 잘 구겨지지 않고 빨았을 때 금방 마르는 것. 거기에 머리는 산발을 하거나(생각해 보니 머리를 빗지 않은 지 20년은 된 것 같다.) 질끈 동여매거나 밀짚모자를 쓰거나 반다나, 또는 헤어밴드로 대충 가리고 다녔다.
게다가 나는 언제나 슈트케이스보다는 배낭을 선호한다. 나는 성큼성큼 걷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성큼성큼 걷는 여자에게는 슈트케이스가 어울리지 않는다. 슈트케이스는 ‘나는 내 인생을 끌고 다니고 있어. 개처럼 질질’의 느낌으로 끌고 다녀야 한다. 나는 내 인생을 끌고 다니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어깨에 이고 다니는 쪽이다. 성큼성큼.
다만 내 여행용 배낭은 턱없이 작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 호텔에서 열리는 유럽의 한 등산용품 브랜드 런칭 행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나도 한때는 그런 데 초대도 받고 그랬다.) 오로지 호텔 밥을 먹고 싶어 간 것인데, 그날의 메뉴는 감사하게도 스테이크였다. 하지만 스테이크보다는 납작하고 얇게 썬 노란색 버터가 얌전히 올려져 있던 작은 접시가 더 기억에 남는다. 버터는 적당하게 물러져 있었고 나이프로 떠서 빵 위에 펴 발라 먹기에 최적의 상태였다. 버터의 맛은 참으로 호사스러웠다. 나는 빵 부스러기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접시를 싹싹 비웠다.
곧 추첨 행사가 있었다. 입구에서 건넨 명함을 추첨해 선물을 주는 행사였다. 나는 그런 데 관심이 없었다. 나는 원래 추첨이란 추첨에는 다 떨어지는 타입이다. 요행을 바래서는 안 되는 인생이다. 추첨장에서 나는 늘 남들이 펄쩍 펄쩍 뛰며 기뻐하는 모습이나 지켜보다가 똥 씹은 얼굴로 집으로 향하는 인생이었다. 노력 없이 얻은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나도 이런 내 운명에 체념했다. 그래서 나는 복권도 사지 않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사본 적 없고 사볼 생각도 해본 적 없다. 복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보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보는 것 같다. 언젠가 친구가 “복권이나 당첨됐으면 좋겠다”고 하기에 “자존심이 있지, 난 복권 같은 건 안 사”라고 단호하고 매정하게 말한 적도 있다. 실은 자존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게 당첨 운이란 것이 있었다면 나도 매주 복권을 사댔을 것이다.
그런데 스테이크를 먹었으니 이미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는 마음에 반쯤 넋을 놓고 여유롭게 배를 두드리고 있던 내 이름이 불렸다! 내가 당첨이 된 것이다! 나처럼 당첨 운이 없는 여자가 말이다!
운이나 복이란 건 누구에게나 같은 양으로 주어지는 걸까, 아니면 불공평하게 주어지는 걸까?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주어지는 걸까? 만일 누구에게나 같은 양으로 주어지는 거라면 어떤 이들에게는 그 운과 복이 특정한 시기에 몰리기도 하고, 너무 일찍 찾아오기도 하고, 너무 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 운과 복을 제대로 누리지도못한 채 떠나기도 한다. 한 푼 한 푼 모아 방바닥 밑에 묻어둔 전 재산을 결국 쓰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노랑이 영감처럼.
운과 복을 인생의 이 시기와 저 시기에 잘 배분해서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재정 플랜이라도 짜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내 운과 복들이 봄에 내리는 비처럼 인생의 모든 시기를 촉촉히 적시게 하고 싶다. 너무 쉽지도, 너무 어렵지도 않은 인생을 살고 싶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고 해서 그럴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그 행사장에서 나는 당첨 선물로 작은 등산용 배낭을 받았다. 내 돈 주고는 절대 안 살 배낭이었다. 하지만 튼튼한 배낭이라 여행 다닐 때 메고 다니기 좋다. 긴 여행에는 맞지 않지만 일주일 안쪽의 짧은 여행이나 짐이 가벼운 더운 나라를 여행할 때는 그럭저럭 쓸 만하다. 여분의 신발까지 넣으면 가방이 터질 것 같아 신발은 주머니에 넣어서 가방 앞쪽에 끈으로 고정해 달아둔다. 그렇게 하면 그럭저럭 배낭여행자의 느낌이 난다. 그 배낭은 그 해 내게 주어진 운과 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