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통장의 낭만적인 규칙[2]

 

동아서점은 설악문화센터와 함께 내가 속초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이 서점은 주인이 쓴 글만큼이나 소박하고 따뜻하다. 서점에 가면 간혹 아들이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책장마다 붙어 있는 책 소개글을 직접 쓰는 것이다. 캘리그라피라고도 할 수 없는 동글동글하고 따뜻한 글씨체가 정겹다. 서점에 들르는 사람들이 이 좋은 책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아주었으면 하는, 순수한 바람이 담뿍 묻어나는 글씨다.

 

이런 서점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는 것이 고맙다. 이런 서점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리의 서점이 그 거리에 얼마나 따뜻하고 멋진 색채를 더해주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서점이 사라지면 이 거리가 얼마나 삭막해질지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서점에 들를 때면 사진을 찍는 대신 책을 산다. 다행히 이 서점은 애써 책을 사야만 하는 곳은 아니다. 이 서점에 들어가면, 반드시 책을 사고 싶어진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좋은 책들만 골라놓았기 때문인지, 책 진열이 산뜻하기 때문인지, 책장마다 붙어 있는 다정한 손글씨 때문인지, 머리가 하얗게 센나이 든 아버지와 아들이 어색하게 카운터에 함께 앉아 있기 때문인지, 노란 불빛 때문인지, 쾌적한 분위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동아서점에서 나를 위한 한 권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한 권, 그렇게 두 권의 책을 산다. 내 돈을 내고 내가 책을 사는데도 고맙다는 기분이 절로 든다.

 

작년 2월에 태백과 정선으로 여행을 갔다가 하이원리조트의 곤돌라에 올라 스키를 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년 2월에 스키나 보드를 타러 가면 좋겠다. 당장 집에 가서 매달 5만 원씩 넣는 1년짜리 적금통장을 만들어야지!”

 

그랬더니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슬프다. 우리 너무 가난한 것 같잖아.”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로 가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적금통장이란 건 짠순이의 생활 전략이라기보다는, 희망이나 계획이나 즐거운 공상의 현실적인 형태 같은 것이다. 나처럼 비계획적이고 씀씀이가 헤픈 여자에게는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된 것 같은 기쁨을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적금통장은 내게 말한다.

1년 후에도 죽지 않았다면, 미치거나 망하거나 복구 불가능할 정도의 상실을 겪지 않았다면, 별일이 없다면, 별일 없이 사는 복을 누렸다면, 너는 1년 후에 코딱지만큼의 이자를 붙여서 이 돈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열두 번의 자동이체는 네가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할 새에 진행될 것이고, 1년 후에 너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돈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행운이 아니라 네가 1년을 성실히 잘 버텼다는 뜻이다. 너는 1년 동안 죽지도 미치지도 망하지도 않았다. 네 통장에는 열두 번의 이체를 감당할 만큼의 잔액이 충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건 거기에 대한 상이다. 잘 버텼다.

 

적금통장의 규칙은 그것이다. 낭만적인, 은행원이 내 계좌를 조회하다가 실소를 터뜨릴 만큼 낭만적인 제목을 정한다(모바일, 인터넷뱅킹으로 쉽게 정할 수 있다). 매달 자동이체되는 액수는 적을수록 좋다. 10만 원이 넘지 않아야 통장에 대해서 잊게 된다. 5만 원 정도가 적절하다. 만기일에 정해진 액수를 찾게 되면 약간의 이자는 보너스로 통장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탕진한다. 절대로 아까워하며 다시 통장에 넣어서는 안 된다. 목적에 부합하게 탕진하라. 정해진 액수 안에서는 방종하라. 죄책감 따위는 느낄 것 없이 마구 써라. 인생은 짧다.

 

그리고 적금통장은 1년마다 내 인생을 갱신해준다.

1년이 지났다. 만기가 된 적금통장에서 두둑한 액수의 돈이 입금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스키를 타러 가지는 않았다. 추위를 즐길 만큼 따뜻한 집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좋아하는 속초에 가서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하고 신나게 돈을 썼다.

 

그 여행에서 나는 결혼하고 난 후 처음으로 큰아버지 댁에 들렀다. 큰아버지 댁은 티끌 하나 없이 깔끔했다. 당연하다. 함경도 사람들은 부지런하니까. 어릴 때 사촌들과 함께 훔쳐본 가족 앨범 속 베트남 파병 시절의 젊은 큰아버지 얼굴은 톰 크루즈를 닮았다. 이제 70대인 큰아버지는 평생 배를 타느라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피부는 검붉게 변색되고 머리는 듬성듬성 빠졌는데도 아직 옛 인상이 남아 있다. 팽팽한 얼굴이다. 함경도의 얼굴이다. 인생 따위에는 지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나에게도 그 얼굴이 있다.

 

큰아버지 댁 현관 위에는 나무판에 두꺼운 글씨체로 새긴 가훈이 붙어 있었다. ‘도전’. 나는 큰아버지 몰래 그 무시무시한 글자를 가리키며 남편과 키득거렸다. ‘도전’이라니, 진정한 함경도 스타일이다.

 

생각해보면 함경도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도전이었을 것이다. 춥고 척박한 땅.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살아남아 일가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도전이고, 도중에 아이들이 죽거나 죽을 뻔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던 것도 도전이고, 낯선 남쪽 동네의 모래톱에 움막을 지은 것도 도전이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다시 또 배를 타고 매일 새벽 바다로 나선 것도 도전이다. 매일 배를 타고서도 죽지 않은 것도 도전이고, 아이들을 더 낳고, 그 아이들을 굶겨 죽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도 도전이다.

 

함경도 사람들은 억세고 거칠게 보인다. 한마디로 볼드체의 인간 유형이다. 그러나 또 억세고 거칠게 보이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듯이 정이 많고 눈물도 많다. 나도 그렇다. 함경도의 핏줄이 내 몸의 4분의 3을 흐르고 있다. 나는 나의 함경도 핏줄이 마음에 든다. 나의 조상들이 그러했듯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다. 굳이 ‘도전’을 가훈으로 새기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씩씩하게 살고 싶다.

 

나머지 4분의 1은 외할머니의 강릉 핏줄이다. 고고하고 도도한 강릉 핏줄. 나의 내향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분명 외할머니에게서 온 것이다. 책을 좋아했다는 외할머니. 동네 멋쟁이였다는 외할머니. 90세가 다 될 때까지 매일 일기를 쓰고 재봉틀로 옷을 지어 입던 외할머니.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던 외할머니. 그 핏줄에는 어떤 우아함이 있지만, 우아함은 때로 오만함과 비겁함을 동반한다. 나는 늘 나의 4분의 1과 싸운다. 달아나고 싶은 마음,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마음, 고고한 체하고 싶은 마음, 더러운 빨래는 남에게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

함경도 사람이나 강릉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언젠가 아빠가 20대 초반에 쓴 일기를 발견해 읽어본 적이 있다. 그때의 아빠는 속초를 떠나 진해에서 해군 하사관으로 복무 중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육군에 지원했지만 호기심이 많던 아빠는 해군이 되기로 결심했다. 일기에는 군함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쓴 치기 어린 시 한 편도 있고, 좋아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대전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대구에도 있었다. 그 시절의 아빠는 전국 팔도에 좋아하는 여자들을 숨겨둔 모양이었다. 결국 자신을 쫓아 진해까지 내려온 고향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어를 독학하던 아빠가 한영사전이 필요해 집에 편지를 썼더니 할머니가 전신환으로 약간의 돈을 부쳐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빠는 집안 형편이 빤한데 그 돈을 받은 것이 고맙고 미안해 눈물이 났다고 썼다.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도 썼다.

 

한영사전 한 권 살 돈이 없을 정도로 젊은 날의 아빠는 가난했었구나. 못지않게 가난한 집에 사전 살 돈이 필요하다고 편지를 부치는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또 가난한 살림에 아들의 공부를 위해 전신환을 부쳐주던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돈으로 산 한영사전은 아빠에게 얼마나 귀했을까. 아빠는 그 사전을 얼마나 마르고 닳도록 보았을까. 어쩌면 그 한 권의 사전이 지금의 아빠를 만들었겠구나. 그 사전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살 수 있었겠구나.

 

속초는 나에게 두 번째 고향 같은 곳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진해에 다시 가고 싶은 적은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속초에는 늘 가고 싶다. 사실은 그곳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 그곳에는 바다가 있다. 여기에서는 마음이 답답해질 때면 기껏해야 공원에나 가겠지만 속초에서는 언제든 가볍게 바다에 갈 수 있다. 진해에도 바다는 있지만 속초의 바다와는 다르다. 속초의 바다는 좀 더 박력 있고 거칠다. 파도가 치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어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속초에는 산도 있고 호수도 있다. 도시를 근엄하게 내려다 보는 울산바위가 있다. 공기는 맑고 도로는 한산하다. 맛있는 냉면도 있고 싱싱한 생선도 있다. 근사한 도서관도, 기분 좋은 서점도 있다. 맛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도 있고 질리지 않는 닭강정도 있고 맥도날드도, 심지어 버거킹도 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느긋하다. 그래서 속초에 가고 싶다. 늘 그렇다.

 

언젠가는 함경도에도 가보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피의 4분의 3이 휴전선을 건너 떠나온 곳. 그곳에 나의 뿌리가 있다. 그 춥고 척박한 땅 곳곳에 지금의 나를 만든 유전자의 조각들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궁금하다. 나는 지금껏 수많은 국경을 넘었지만, 나의 뿌리가 있는 쪽의 국경은 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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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NMEIHONG 2018-06-26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여행을 저도 다녀왓어요. 하지만 진정한 아내의 삶이지쳐가는 현실주의자에서

QUANMEIHONG 2018-06-26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곧 탈락되갈 아이디를 지키면서 진로를다지기를 결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