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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금통장의 낭만적인 규칙[2]

 

동아서점은 설악문화센터와 함께 내가 속초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다. 이 서점은 주인이 쓴 글만큼이나 소박하고 따뜻하다. 서점에 가면 간혹 아들이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책장마다 붙어 있는 책 소개글을 직접 쓰는 것이다. 캘리그라피라고도 할 수 없는 동글동글하고 따뜻한 글씨체가 정겹다. 서점에 들르는 사람들이 이 좋은 책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아주었으면 하는, 순수한 바람이 담뿍 묻어나는 글씨다.

 

이런 서점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는 것이 고맙다. 이런 서점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리의 서점이 그 거리에 얼마나 따뜻하고 멋진 색채를 더해주는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 서점이 사라지면 이 거리가 얼마나 삭막해질지에 대해서도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서점에 들를 때면 사진을 찍는 대신 책을 산다. 다행히 이 서점은 애써 책을 사야만 하는 곳은 아니다. 이 서점에 들어가면, 반드시 책을 사고 싶어진다. 

  

무엇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좋은 책들만 골라놓았기 때문인지, 책 진열이 산뜻하기 때문인지, 책장마다 붙어 있는 다정한 손글씨 때문인지, 머리가 하얗게 센나이 든 아버지와 아들이 어색하게 카운터에 함께 앉아 있기 때문인지, 노란 불빛 때문인지, 쾌적한 분위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언제나 동아서점에서 나를 위한 한 권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한 권, 그렇게 두 권의 책을 산다. 내 돈을 내고 내가 책을 사는데도 고맙다는 기분이 절로 든다.

 

작년 2월에 태백과 정선으로 여행을 갔다가 하이원리조트의 곤돌라에 올라 스키를 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년 2월에 스키나 보드를 타러 가면 좋겠다. 당장 집에 가서 매달 5만 원씩 넣는 1년짜리 적금통장을 만들어야지!”

 

그랬더니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정말 슬프다. 우리 너무 가난한 것 같잖아.”

 

그럴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로 가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적금통장이란 건 짠순이의 생활 전략이라기보다는, 희망이나 계획이나 즐거운 공상의 현실적인 형태 같은 것이다. 나처럼 비계획적이고 씀씀이가 헤픈 여자에게는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된 것 같은 기쁨을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적금통장은 내게 말한다.

1년 후에도 죽지 않았다면, 미치거나 망하거나 복구 불가능할 정도의 상실을 겪지 않았다면, 별일이 없다면, 별일 없이 사는 복을 누렸다면, 너는 1년 후에 코딱지만큼의 이자를 붙여서 이 돈을 다시 찾을 수 있다. 그동안 한 달에 한 번씩, 열두 번의 자동이체는 네가 미처 알아차리지도 못할 새에 진행될 것이고, 1년 후에 너는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돈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저 행운이 아니라 네가 1년을 성실히 잘 버텼다는 뜻이다. 너는 1년 동안 죽지도 미치지도 망하지도 않았다. 네 통장에는 열두 번의 이체를 감당할 만큼의 잔액이 충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건 거기에 대한 상이다. 잘 버텼다.

 

적금통장의 규칙은 그것이다. 낭만적인, 은행원이 내 계좌를 조회하다가 실소를 터뜨릴 만큼 낭만적인 제목을 정한다(모바일, 인터넷뱅킹으로 쉽게 정할 수 있다). 매달 자동이체되는 액수는 적을수록 좋다. 10만 원이 넘지 않아야 통장에 대해서 잊게 된다. 5만 원 정도가 적절하다. 만기일에 정해진 액수를 찾게 되면 약간의 이자는 보너스로 통장에 남겨두고, 나머지는 탕진한다. 절대로 아까워하며 다시 통장에 넣어서는 안 된다. 목적에 부합하게 탕진하라. 정해진 액수 안에서는 방종하라. 죄책감 따위는 느낄 것 없이 마구 써라. 인생은 짧다.

 

그리고 적금통장은 1년마다 내 인생을 갱신해준다.

1년이 지났다. 만기가 된 적금통장에서 두둑한 액수의 돈이 입금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스키를 타러 가지는 않았다. 추위를 즐길 만큼 따뜻한 집에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좋아하는 속초에 가서 하고 싶은 것들을 잔뜩 하고 신나게 돈을 썼다.

 

그 여행에서 나는 결혼하고 난 후 처음으로 큰아버지 댁에 들렀다. 큰아버지 댁은 티끌 하나 없이 깔끔했다. 당연하다. 함경도 사람들은 부지런하니까. 어릴 때 사촌들과 함께 훔쳐본 가족 앨범 속 베트남 파병 시절의 젊은 큰아버지 얼굴은 톰 크루즈를 닮았다. 이제 70대인 큰아버지는 평생 배를 타느라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피부는 검붉게 변색되고 머리는 듬성듬성 빠졌는데도 아직 옛 인상이 남아 있다. 팽팽한 얼굴이다. 함경도의 얼굴이다. 인생 따위에는 지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나에게도 그 얼굴이 있다.

 

큰아버지 댁 현관 위에는 나무판에 두꺼운 글씨체로 새긴 가훈이 붙어 있었다. ‘도전’. 나는 큰아버지 몰래 그 무시무시한 글자를 가리키며 남편과 키득거렸다. ‘도전’이라니, 진정한 함경도 스타일이다.

 

생각해보면 함경도 사람들에게는 인생이 도전이었을 것이다. 춥고 척박한 땅.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살아남아 일가를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도 도전이고, 도중에 아이들이 죽거나 죽을 뻔했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았던 것도 도전이고, 낯선 남쪽 동네의 모래톱에 움막을 지은 것도 도전이고, 굶어죽지 않기 위해 다시 또 배를 타고 매일 새벽 바다로 나선 것도 도전이다. 매일 배를 타고서도 죽지 않은 것도 도전이고, 아이들을 더 낳고, 그 아이들을 굶겨 죽이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도 도전이다.

 

함경도 사람들은 억세고 거칠게 보인다. 한마디로 볼드체의 인간 유형이다. 그러나 또 억세고 거칠게 보이는 사람들이 대개 그러듯이 정이 많고 눈물도 많다. 나도 그렇다. 함경도의 핏줄이 내 몸의 4분의 3을 흐르고 있다. 나는 나의 함경도 핏줄이 마음에 든다. 나의 조상들이 그러했듯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다. 굳이 ‘도전’을 가훈으로 새기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언제나 씩씩하게 살고 싶다.

 

나머지 4분의 1은 외할머니의 강릉 핏줄이다. 고고하고 도도한 강릉 핏줄. 나의 내향적이고 예민한 성격은 분명 외할머니에게서 온 것이다. 책을 좋아했다는 외할머니. 동네 멋쟁이였다는 외할머니. 90세가 다 될 때까지 매일 일기를 쓰고 재봉틀로 옷을 지어 입던 외할머니.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던 외할머니. 그 핏줄에는 어떤 우아함이 있지만, 우아함은 때로 오만함과 비겁함을 동반한다. 나는 늘 나의 4분의 1과 싸운다. 달아나고 싶은 마음, 고개를 돌려버리고 싶은 마음, 고고한 체하고 싶은 마음, 더러운 빨래는 남에게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

함경도 사람이나 강릉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언젠가 아빠가 20대 초반에 쓴 일기를 발견해 읽어본 적이 있다. 그때의 아빠는 속초를 떠나 진해에서 해군 하사관으로 복무 중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육군에 지원했지만 호기심이 많던 아빠는 해군이 되기로 결심했다. 일기에는 군함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쓴 치기 어린 시 한 편도 있고, 좋아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도 있었다. 대전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대구에도 있었다. 그 시절의 아빠는 전국 팔도에 좋아하는 여자들을 숨겨둔 모양이었다. 결국 자신을 쫓아 진해까지 내려온 고향 여자와 결혼을 했지만.

 

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영어를 독학하던 아빠가 한영사전이 필요해 집에 편지를 썼더니 할머니가 전신환으로 약간의 돈을 부쳐주었다는 이야기였다. 아빠는 집안 형편이 빤한데 그 돈을 받은 것이 고맙고 미안해 눈물이 났다고 썼다.

열심히 공부해야겠다고도 썼다.

 

한영사전 한 권 살 돈이 없을 정도로 젊은 날의 아빠는 가난했었구나. 못지않게 가난한 집에 사전 살 돈이 필요하다고 편지를 부치는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또 가난한 살림에 아들의 공부를 위해 전신환을 부쳐주던 할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돈으로 산 한영사전은 아빠에게 얼마나 귀했을까. 아빠는 그 사전을 얼마나 마르고 닳도록 보았을까. 어쩌면 그 한 권의 사전이 지금의 아빠를 만들었겠구나. 그 사전 덕분에 우리는 편하게 살 수 있었겠구나.

 

속초는 나에게 두 번째 고향 같은 곳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진해에 다시 가고 싶은 적은 아직까지 없다. 하지만 속초에는 늘 가고 싶다. 사실은 그곳에서 살아도 좋을 것 같다. 그곳에는 바다가 있다. 여기에서는 마음이 답답해질 때면 기껏해야 공원에나 가겠지만 속초에서는 언제든 가볍게 바다에 갈 수 있다. 진해에도 바다는 있지만 속초의 바다와는 다르다. 속초의 바다는 좀 더 박력 있고 거칠다. 파도가 치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어도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속초에는 산도 있고 호수도 있다. 도시를 근엄하게 내려다 보는 울산바위가 있다. 공기는 맑고 도로는 한산하다. 맛있는 냉면도 있고 싱싱한 생선도 있다. 근사한 도서관도, 기분 좋은 서점도 있다. 맛있는 커피를 파는 카페도 있고 질리지 않는 닭강정도 있고 맥도날드도, 심지어 버거킹도 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느긋하다. 그래서 속초에 가고 싶다. 늘 그렇다.

 

언젠가는 함경도에도 가보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내 피의 4분의 3이 휴전선을 건너 떠나온 곳. 그곳에 나의 뿌리가 있다. 그 춥고 척박한 땅 곳곳에 지금의 나를 만든 유전자의 조각들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다.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궁금하다. 나는 지금껏 수많은 국경을 넘었지만, 나의 뿌리가 있는 쪽의 국경은 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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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NMEIHONG 2018-06-26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여행을 저도 다녀왓어요. 하지만 진정한 아내의 삶이지쳐가는 현실주의자에서

QUANMEIHONG 2018-06-26 0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곧 탈락되갈 아이디를 지키면서 진로를다지기를 결심합니다
 

적금통장의 낭만적인 규칙[1]

 

우리는 여행을 많이 다니지 않지만, 최소한 1년에 한두 번은 속초에 간다. 나는 속초를 좋아한다. 남편도 좋아한다. 갈 때마다 좋다. 굳이 다른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제주도에 가본 적도 있는데 왠지 나와는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나는 속초가 더 좋다. 제주도는 둥글둥글, 아기자기한 느낌이지만 속초는 대범하고 씩씩한 느낌이다. 속초 쪽이 내게는 더 편안하다. 나는 둥글둥글하고 아기자기한 사람이 아니다.

 

속초에는 바다도 있고 산도 있다. 바다는 푸르고 깊고 거칠다. 설악산에는 울산바위가 있다. 볼 때마다 정말 멋지다고 생각한다. 맛있는 것도 많다. 나는 속초에서만 냉면을 먹는다. 여기에서는 진짜 함흥냉면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함경도 피란민 출신이 많기 때문이다. 진짜 함흥냉면은 고추장으로 만든 양념장 대신, 매콤달콤한 회무침을 비벼 먹는다. 그리고 물냉면처럼 차가운 육수도 듬뿍 부어 먹는다. 거기에 입맛에 따라 설탕과 식초와 겨자를 쳐서 먹는다.

 

해산물을 좋아하는 나는 중앙시장에 갈 때마다 이성을 잃는다. 싱싱한 생선과 오징어 같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게다가 무척 싸다. 떡도 감자도 옥수수도 맛있다. 물이 맑아 수돗물을 틀어서 그대로 받아 마시기도 한다. 속초에서는 모든 것이 늘 풍요로운 느낌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순하다. 무뚝뚝하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지만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이 정도면 더할 나위 없다. 지방 사람들은 대개 서울 사람들처럼 조급하지 않고 여유로운데, 속초 사람들 역시 그렇다.

나의 친가와 외가는 속초에 있다. 아빠는 함경도에서 태어났지만 두 살 때인가 할머니 등에 업혀 피란민 수송선을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줄곧 속초의 유명한 피란민 거주지인 청호동 아바이마을에서 살았다. 여름방학에 할아버지 댁에 가면 집에서 수영복을 입고 튜브를 허리에 낀 채로 맨발로 골목길을 지나 바다까지 달려가곤 했다. 발이 델 정도로 뜨거운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그대로 바다에 풍덩. 파도가 세도 아랑곳하지 않고 놀았다. 방파제에서도 놀았다. 테트라포드 사이에 빠지면 무척 위험한데도 신나게 뛰어다녔다. 아래에 슬리퍼가 떨어져 기어 내려가 주워서 다시 올라온 적도 있다.

엄마의 아버지, 그러니까 내 외할아버지는 함경도에 아내와 자식들을 두고 단신으로 휴전선을 건너온 홀아비였다. 외할머니는 강릉에서 나고 자라 시집을 가서 아들 셋을 두었으나 어느 날 남편이 인민군에 징집된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억척스럽고 수완 좋던 외할아버지는 속초에서 사업을 시작해 커다란 트럭 한 대를 굴리고 외할머니와 결혼해 자식도 셋이나 낳고 뒷집에는 첩도 하나 두었다고 한다. 피붙이 하나 없는 남한에서 처음 생긴 피붙이인 우리 엄마를, 외할아버지는 얼마나 예뻐했는지 모른다고 한다.

 

내가 수영을 하던 바로 그 바닷가에서 아빠도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수영을 배웠다. 영랑호수 근처 영랑동에 살던 엄마는 날이 좋으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대로 바닷가로 가서는 교복을 입은 채로 모래 위에 가만히 누워보곤 했다. 모래가 참 따뜻했다고 한다.

 

갓 스물에 엄마는 해군 제복을 입은 아빠를 만났다. 엄마는 아빠가 시내에 사는 검소한 교육자 집안의 아들일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아빠가 인사를 시키겠다며 데려간 곳은 갯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닿을 수 있는, 억센 함경도 사투리가 난무하는 아바이마을 청호동의 가난한 집이었다.

 

나중에 대학에 들어가서야 나는 속초에서 산 적이 있다는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청호동은 문둥병자들이랑 거지들이 살던 동네 아니야?” 속초 사람들에게 청호동은 그런 곳이었다. 고고하던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도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강릉 살 때는 뱃사람은 사람 취급도 안 했다.”

함경도 피란민들은 대개 뱃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해변에 널려 있던 판자나 나뭇조각, 미군부대에서 나온 폐자재들을 얼기설기 이어 붙여 비바람을 피할 움막을 지었다. 그들 중 누구도 피란생활이 이렇게나 오래 지속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피란생활이었다. 전쟁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그들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렸다. 그들의 삶 전체가 전쟁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제 아빠가 자란 청호동 빨간 우체통 옆집은 사라졌다. 시내와 청호동을 잇는 다리가 생기고, 바다였던 곳을 매립해 땅으로 만들고, 그 위에 이마트가 생기고 엑스포 공원이 생기면서 그렇게 됐다. 누구도 그 사실을 아쉬워하지 않는다.

 

큰아버지는 매립지에 땅을 분양받아 집을 지었다. 할아버지는 그 집 현관 앞에 놓인 의자에 식물처럼 앉아 계시다 돌아가셨다. 빨간 우체통 옆집에 살 때 할아버지는 매일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 배를 타고 오징어잡이를 하러 나가셨다. 할아버지가 두세 마디 이상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말수가 적은 대신 눈물이 많아 자식들이 집에 오면 갑자기 울곤 하셨다. 말하는 모습보다 우는 모습이 더 익숙하다.

 

할아버지의 얼굴은 길쭉하고 갸름하고 희고 순한 얼굴이었다. 눈은 살짝 처지고 코도 길고 갸름했다. 함경도 얼굴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낳은 자식들은 모두 할머니를 닮았다. 넓적한 얼굴에 강렬한 인상. 추운 지방 특유의 억척스러운 얼굴. 할머니는 무시무시하고 야박한 사람이었지만 종종 그 넓적한 얼굴에 장난기가 묻어날 때가 있었다. 나는 가끔 거울 속 내 얼굴에서 할머니를 발견한다. 희한하게도 그 많은 피붙이들 중 내 남동생만이 할아버지를 닮았다. 길쭉하고 갸름하고 희고 순한 얼굴. 살아 있는 누군가의 얼굴에 죽은 누군가의 얼굴이 비친다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속초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기에 설악문화센터라는 도서관이 있기 때문이다. 이용자가 그리 많지 않은, 아는 사람만 아는 사설 도서관인데, 집 근처에 있다면 매일 출근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곳이다. 좋은 신간들이 꾸준히 입고되어 눈에 잘 띄게 진열되어 있다. 통유리창 너머로는 설악산과 울산바위가 보인다. 소파는 편안하고 테이블도 널찍하게 배치되어 있다. 구석에 이해할 수 없는 진열대가 하나 있기는 한데(그래서 구석에 있는 것 같다) 직접 가서 그 실체를 확인해보시길. 2층에는 맛있는 커피를 파는, 오디오 시스템이 근사한 카페도 있다. 우리는 속초에 갈 때마다 이 도서관에 들러 몇 시간을 보낸다.

엘리자 수아 뒤사팽이라는 젊은 프랑스 작가는 『속초에서의 겨울』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소설을 썼다. 프랑스어로는 Hiver à Sokcho. 나는 이 도서관에서 그 책을 발견했다. 노르망디와 속초의 지도를 나란히 둔 채 그녀는 노르망디에서 속초를 떠올리고 속초에서 노르망디를 떠올린다. 속초라는 촌스럽고 억센 지명도 프랑스 여자의 소설에 등장하니 어떤 여운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음절이 모음인 것도 마음에 든다. 입을 동그랗게 오므린 채로 ‘초’라고 뱉을 때는 탄력이 느껴진다. 바닷속 깊숙이 잠수해 ‘초’라고 내뱉은 뒤 내 입을 통해 빠져나온 공기방울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출처-동아서점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bookstoredonga/

 

중앙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동아서점이라는 기분 좋은 서점이 있다. 1956년도에 문을 연 서점이다. 우리 엄마도 이 서점에서 참고서를 샀다고 한다. 지금은 원래의 자리에서 이전해 건물을 새로 지었다. 백발의 아버지와 젊은 아들이 함께 서점을 지키고 있다. 서점 운영이 쉽지 않자 아버지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아들을 속초로 불렀다고 한다. 아들은 고민 끝에 고향으로 내려가 서점을 이어받기로 결심했다.

 

아들인 김영건이 쓴 책 『당신에게 말을 건다』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다. 할아버지가 차린 서점을 손자가 이어받아 꾸려 나간다는 것에 대한 솔직하고 정직한 이야기들이. 서울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다 결국 고향으로 내려가는 착잡한 마음을 이겨내기 위해 아들은 이런 생각들을 한다.


속초엔 바다가 있지. 원할 때면 언제나 산책할 수 있지. 그리운 감자전과 도루묵과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있지. 거리의 소음도 없지. 버스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부대낄 일도 없지.
인구가 팔만 정도인데도 인구 밀도가 매우 조밀한 이 작고 이상한 곳. 바닷가를 따라 마을이 긴 모양으로 늘어서 있어 언제 어디서고 조금만 방향을 틀면 바다를 만날 수 있는 곳. 어느 맑은 날, 시내를 따라 걷다 보면 저 멀리 울산바위가 어떤 거룩한 속삭임처럼 드러나는 곳. 바다와 이어지는 곳에 바다였던 옛 시간의 흔적이 무려 두 곳이나 호수로 남아 있는 곳. 걸어서 어디든 다다를 수 있고, 그곳으로부터 다시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곳. 근래에 스타벅스와 맥도날드가 생긴 곳. 사람들의 말투는 다소 거칠지만 대체로 친절한 곳. 그곳에서 나는 아버지의 서점을 다시 열었다.✽

✽김영건, 『당신에게 말을 건다』(알마,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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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 프로그의 특별한 매력[2]

 

자, 이제부터 본론이다. 졸리 프로그의 세 번째이자 최고의 매력은 식당이다. 꼭 숙박을 하지 않아도 깐짜나부리를 여행하는 많은 여행객들이 졸리 프로그의 식당에 식사를 하러 온다. 이유는, 싸기 때문이다. 말도 못하게 싸다. 스테이크가 고작해야 3천 원에서 4천 원 정도였다. 1999년도의 일이다. 지금은 얼마일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게다가 메뉴가 거의 김밥천국 수준으로 다양하다. 볶음밥이나 볶음국수를 비롯한 태국 요리에서부터 스파게티나 피자, 팬케이크 같은 서양 요리도 웬만하면 다 된다. 온갖 과일 주스도 다 된다. 심지어 모든 요리가 웬만하면 다 맛이 있다. 최고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이 정도면 가격 대비 훌륭하다. 불가사의한 식당이다.

하지만 종업원들은 불친절하다. 손님을 거의 파리 취급한다. 무표정한 얼굴에 귀찮은 태도로 요리를 테이블 위에 던지다시피 한다. 태국 사람들은 대개 친절하고 순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업소의 종업원들은 불친절하다. 친절하기 힘들 것이다. 이 사람들도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에게 세계 각국의 방식으로 당할 만큼 당했을 것이다. 어느 날 밤 식당에 갔더니 어린 이스라엘 남녀들이 술에 잔뜩 취해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되는 천방지축들이었다. 직원들의 태도도 이해가 되었다.

 

친절하건 불친절하건, 나야 음식에 파리만 들어 있지 않으면 된다. 나는 유명한 졸리 프로그의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3천원짜리 스테이크는 도대체 어떤 맛일까. 음, 그건…… 엄청나게 질긴 맛이었다. 운동화 밑창의 고무를 구운 맛이나 비슷했다.(물론 먹어본 적은 없다.) 운동화 밑창의 고무에 소고기 다시다를 뿌리면 이런 맛일 것이다. 아무리 씹어도 삼킬 수가 없는 맛이었다. 그럼에도 소고기가 귀한 나라에서 온 나는 감사히 먹었다. 어릴 때부터 비싸다고 소고기를 안 사주는 가정에서 자란 나는 이게 어디냐고 생각하면서 먹었다. 속으로는 계속 ‘이건 소고기야. 이건 소고기’라고 자기최면을 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스테이크의 정체는 물소 고기였다. 기차를 타고 지나가다가 논에 서 있는 물소를 보았는데 회색 갑옷 같은 피부에 멋진 뿔을 가진 소였다. 그냥 보아도 맛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정확하게 운동화 밑창의 고무 맛이 날 것 같아 보였다.

졸리 프로그의 게스트하우스는 저렴하고 낡고 지저분하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humble’ 하다. 겸손하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나는 그곳의 주인이 아니니까 겸손할 필요도 없다) 실제로 그렇다. 물론 분위기는 좋다. 2층짜리 목조 가옥이다. 방은 꽤 넓다. 화장실도 딸려 있다. 문을 열면 바로 그 예쁜 잔디 정원이 보인다. 정원사 아저씨가 매일 같이 잔디에 물을 주고 나무를 관리한다. 1층은 포치를 쓸 수 있고, 2층에도 발코니가 있다. 포치에는 빨래도 널 수 있고 나무로 만든 테이블도 놓여 있다. 포치에 앉아 있으면 콰이 강의 시원하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온다. 대나무 대 위에 빨래를 널어 말린다. 한 시간이면 기분 좋게 말라 있다. 밤에는 테이블에 앉아서 불을 켠 채로 책을 읽기도 했다.

 

하지만 방 안은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어두컴컴하다. 한낮에도 어둡다. 눅눅하기도 하다. 더운 나라라 일부러 집 안에는 해가 들지 않도록 지었을 것이다. 침대는 한가운데가 푹 꺼져 있어서 자다가 가운데로 몰리면 헤어 나올 수 없는 구덩이나 수렁에 빠진 기분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기어 나와야 할 정도다. 아마도 몇 십 개국에서 온 수백 명의 사람들이 이 침대 위에 누웠을 것이다. 잠만 자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는 살아서 상종도 하기 싫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이스라엘 젊은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나쁜 사람들, 어쩌면 살인범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숙소의 침대라는 것은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위에 누웠겠지만, 바로 전날 밤만 해도 어떤 커플이 뜨거운 밤을 보낸 흔적이 남아 있겠지만, 그 흔적을 완벽히 감춰야 한다. 그것이 숙소의 침대의 의무이다. 언제나 새로 도착한 여행자가 제일 먼저 누워 보는 침대인 척해야 한다. 졸리 프로그의 침대는 바로 그 점에서 낙제다. 밤새 가운데 구덩이에 빠지지 않도록 기를 쓰고 양쪽 가장자리에 달라붙어야 했으니까.

 

화장실은 방보다 더 끔찍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어둡고 긴 공간에 변기 하나와 샤워기 하나가 달랑 달려 있던 기억이 난다. 방충망도 없이 창문이 그대로 뚫려 있는 데다 강가라 그런지 벌레가 엄청나게 많았다. 도마뱀이야 귀여운 수준이고, 커다란 메뚜기 비슷한 벌레들도 자주 출몰했다. 최대한 빨리 샤워를 마쳐야만 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것은 소음이었다. 밤에 자다가 누가 우리 방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소리에 기절할 것처럼 놀라서 벌떡 일어났는데, 알고 보니 2층을 쓰는 사람들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였다. 그 사람들의 발소리는 물론이고 목소리까지 바로 옆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층간소음이 한국의 아파트는 비교할 수준조차 못됐다. 숙소에 묵는 내내 잠을 설쳤다.

 

졸리 프로그는 예쁜, 귀여운, 멋진 개구리라는 뜻이다. 누가 이런 이름을 붙여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센스가 좋은 것 같다. 나중에 나도 혹시라도 식당 같은 것을 열게 된다면 꼭 동물 이름을 넣고 싶다. 나는 고래를 좋아하니까 고래 식당일지도 모른다.(대왕오징어에 꾸준히 사로잡혀 있는 아들은 몇 년째 짬이 날 때마다 인터넷으로 대왕오징어 사진을 검색하는데, 아마 그 아이가 식당을 차린다면 당연히 대왕오징어 식당일 것이다.)

 

때로 인생의 구덩이나 수렁에 빠진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누군가 우리 방에 침입한 것 같은 소리에 겁에 질린 채로 침대 가운데에 빠지지 않도록 기를 쓰고 가장자리로 달라붙어야 했던 악몽 같던 졸리 프로그의 밤들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러나 졸리 플로그에는 누구에게나 공짜이던 콰이 강의 따뜻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예쁜 잔디 정원 위에서 뒹굴던 낮들도 있었다. 식당에는 운동화의 고무 밑창을 씹는 것처럼 질겼던 물소 고기 스테이크와 불친절한 직원도 있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죽어 나갔던 철도도 있었고 그들이 잠든 소박하고 아름다운 묘지도 있었다. 그 철도 위를 달리던 기차에는 목에 카메라를 건 채로 감탄사를 내뱉던 순진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모든 것들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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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리 프로그의 특별한 매력[1]

 

태국 중부 지방의 작은 도시 깐짜나부리에는 졸리 프로그Jolly Frog라는 귀여운 이름의 식당이 있다. 실은 식당 겸 게스트 하우스다. 나는 동물 이름이 들어간 가게를 좋아한다. 코끼리 식당이나 두꺼비집, 거북당, 개미집 같은 간판을 단 가게가 보이면 언제나 한번 들어가 보고 싶다.


프랑스가 배경인 책들을 읽다보면 동물 이름을 붙인 가게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이름은 개미fourmi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 근처를 돌아다닐 때 La Fourmi인지 Les Fourmis인지 하는 이름의 술집 간판을 발견하고는 남몰래 반가워했다. 퇴근 후 한잔 걸치기 위해 들른 듯한 동네 사람들로 가득한 술집이었다. 클럽을 찾으러 다니던 중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후회가 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달팽이도 먹고 토끼도 먹고 비둘기도 먹고 개구리도 먹고 사슴도 먹고 아무튼 웬만한 것은 다 먹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식재료에 대한 원초적인 상상력이 풍부한 느낌이다. 야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관대하다고 해야 하나, 게걸스럽다고 해야 하나. 먹을 것을 파는 가게에 동물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런 느낌이다. 소박하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야성적인 느낌.

 

한국의 오래된 식당 중에는 희망을 담은 이름이 많은 것 같다. 대성이라든지, 부흥이라든지, 만복이라든지. 그런 이름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고향의 이름을 간판에 새긴 집들이 더 마음에 든다. 타지에 와서 고생하며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뭉클해진다. 나도 타지에 와서 고생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이 내 친구 부모님이 운영하는 식당의 이름은 통영식당인데, 친구의 가족은 전라남도 진도에서 왔다. 통영과는 아무 연고가 없다. 심지어 통영에 한 번이라도 가본 적은 있으신지 의심스럽다. 단지 통영산 굴로 굴밥과 굴보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하지만 음식은 정말 맛있다. 전라도의 손맛은 역시 놀랍다. 가격도 싸다. 동인천에 갈 일이 있으신 분들은 방문해보시길.


졸리 프로그의 이름은 왜 졸리 프로그인지 모르겠는데, 당시(1999년)만 해도 깐짜나부리의 꽤 ‘핫’한 장소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콰이 강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콰이 강은 <콰이 강의 다리>라는 옛날 영화 속의 그 강을 말한다. 본 적은 없지만 꽤 유명한 영화라서 제목은 나도 알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 지역을 점령한 일본군은 군수물자 운반을 위한 철도 건설 작업에 태국인들은 물론이고 포로로 잡힌 연합군 병사들까지 노역으로 동원했다. 주로 영국과 호주, 네덜란드 병사들이었다고 한다.

 

곡괭이와 삽만 들고 맨손으로 밀림을 헤치고 절벽을 깎아내 건설한 철도라 그 과정에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415km 길이의 철로를 14개월 만에 만들어냈다고 한다. 곡괭이질과 삽질이라고는 5평짜리 텃밭에서밖에는 해본 적이 없는 나는 그게 어느 정도의 속도인지는 잘 가늠이 되지 않지만, 아무튼 엄청난 속도였다. 고된 노동뿐만 아니라 열악한 수용소 생활과 구타, 고문 등으로 죽은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영화는 연합군이 이 철도와 콰이 강 위의 다리를 폭파한다는 내용이다.


깐짜나부리의 인기 투어코스는 열차를 타고 이때 건설된 ‘죽음의 철도’ 위를 달리는 것이다. 기차를 타고 시골길을 한참 달리다 보면 고작해야 기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폭이 좁은 철로가 나타나는데, 양 옆으로 벽처럼 높이 늘어선 절벽은 모두 당시의 포로들이 맨손으로 깎아낸 것이다. 이곳은 ‘헬 파이어 패스Hell fire pass’라고 불린다. 밤낮 없이 철로를 건설하느라 켜놓은 횃불이 멀리서 보면 지옥불처럼 보였기 때문이란다.

 

무시무시하다. 반세기 전에 이 철도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고 생각하면 더 무시무시하고, 그럼에도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 관광객들을 보면 더더욱 무시무시하다.


깐짜나부리에는 이때 죽은 연합군의 묘지가 있다. 기차를 타고 지나치면서 보았는데 나무 십자가가 무덤마다 꽂힌 작고 아름다운 묘지였다. 이 사람들은 죽어서 이런 데 묻힐 줄 알았을까. 고향에서는 이름조차 들어본 일 없었을 뜨거운 나라의 시골 마을 묘지에.


역사란 결국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포로들 중에는 정말로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착한 사람도, 좋은 사람도, 낯선 나라에서 포로로 잡혀 벌레만도 못한 취급을 받다가 죽지 않아도 좋았을, 살아 있었더라면 인류의 번영과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했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런 데서 고생하다 죽어도 싸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하늘이 이런 사람을 버릴 리 없을 것이라 남들도 믿고 그 자신도 내심 믿었을 사람도 죽었을 것이다. 사악한 목적을 위해서 별 의미도 없는 일을 하다가 어이없이 죽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일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죽어 마땅한 사람들은 버젓이 살아 있고, 죽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 정말 무서운 일이다.


다시 귀여운 졸리 프로그 이야기로 돌아가자. 졸리 프로그의 첫 번째 매력은 바로 콰이 강이다. 강물은 한국의 강물처럼 맑지 않은데 거의 흙탕물에 가깝다.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강 주변으로는 열대의 숲이 무성하다. 그러나 한국의 강이 차갑고 날카롭고 단호한 느낌을 풍긴다면, 콰이 강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풍만한 느낌이다. 태국의 산이 한국의 산과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한국의 산은 경외감이 들 정도로 웅장한 데 반해, 태국의 산은 둥글둥글하고 아기자기하다. 동그란 얼굴에 늘 웃음이 걸려 있는 이빨 빠진 할아버지 같다.


졸리 프로그의 두 번째 매력은 첫 번째 매력과 연관이 있는데, 숙소 건물을 둘러싸고 잘 가꿔진 잔디 정원이 있다는 것이다. 정원 한가운데는 커다란 코코넛 나무가 있어 한낮의 뜨거운 햇살을 가려준다. 그리고 바로 앞의 콰이 강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말도 못하게 시원한 강바람이다. 잔디밭에는 데크체어가 놓여 있어 하루 종일 누워 있어도 좋다. 실제로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여행객들을 많이 보았다.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고는 당황했다. 우리는 언제나 유명 관광지를 찍고 순회하는 식의 여행을 여행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길 어떻게 왔는데!’ ‘본전을 뽑아야 하는데!’라는 한국인의 본능이 채찍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딜 가나 긴장해 있고 어깨에 힘이 빡 들어가 있다. 본전을 뽑아야 하니까. 3천 원짜리 콩나물국밥집에서도, 7천 원짜리 목욕탕에서도, 백화점에서도, 술집에서도, 비행기를 타도, 산에 가도, 바다에 가도 본전부터 뽑아야 한다. 본전을 뽑고 나면 뜨끈한 국밥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운 것처럼 만족감이 밀려온다. 그래야 발 뻗고 잘 수가 있다.


그런데 다른 여행객들은, 특히 서양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늘 누워 있었다. 전생에 나무늘보였나 싶을 정도로 누워만 있었다. 해변에서도 누워 있고 잔디밭에서도 누워 있고 배 위에서도, 기차 위에서도 누워 있었다. 나도 서양인들의 흉내를 내어 누워 보았다. 10분 정도는 좋았는데 10분이 지나자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누워 있는 이들을 게으름뱅이라 부른다. 게으름뱅이는 경제 발전의 적이다. 일어나서 뭐라도 해야 한다. 나도 잘 눕지 않는 성격이다. 잘 때를 빼고는 하루 중 누워 있을 때가 거의 없다. 결혼 전에는 그래도 종종 누워 있었다. 할 일이 없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 몸이 지상에 붙어 있다는 안정감을 느끼고 싶을 때, 직립하고 있다는 것이, 겨우 발바닥 두 개만 땅에 붙어 있다는 것이 불안할 때 나는 누웠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 낳고 나니 하루 종일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 할 일이 끝이 없다. 해도 해도 티가 안 나는 생활의 일들. 잠잘 때야 겨우 몸을 뉘일 수 있다. 이제 겨우 누울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


하지만 여행을 할 때 나는 거의 누워 있다. 어딜 잘 가지도 않고 뭘 잘 하지도 않는다. 그저 적당한 장소를 찾아 눕거나 널브러져 있다. 누워서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한다. 한번 누우면 잘 일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게 내가 여행에서 배운 전부인지도 모른다. 누울 줄 아는 것. 누워 있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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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장판을 켜고 온 것이 분명하다[2]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식까지 정확히 2주일이 남았다. 우리는 태국으로 가는 항공권을 끊었다. 도착지인 방콕에서 묵을 숙소와 다음 목적지인 피피 섬의 숙소만 미리 예약해 두었다. 둘 다 수영장이 딸린, 저렴하지만 괜찮은 숙소다.(물론 내 기준에서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하루 종일 함께 있기. 할 수 있다면 매일 수영하기. 아이들의 물놀이용품만으로도 캐리어가 터질 것 같았다.


아침 비행기를 타야 했기에 해도 뜨기 전에 일어나서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런데 집을 나서면서부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권을 두고 왔나? 가방을 뒤졌더니 네 개의 여권이 빠짐없이 들어 있다. 여권에 발이 달려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지 않도록 가방 깊숙이 밀어 넣었다. 마스터카드도 지갑 속에 있다. 환전은 어차피 인터넷뱅킹으로 해두었으니 공항에서 찾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불안감은 가시지 않는다.


“뭔가 빠진 것 같아.”
“뭐가?”

 

남편이 물었다.


“불안한데……”
“휴대폰?”
“챙겼어.”
“노트북?”
“챙겼지.”
“그럼 됐네 뭐.”


그러나 불안감은 여전하다.


“아니야. 뭔가 잊은 게 있어.”
“카메라?”
“여기 있는데?”
“그럼 뭐야?”
“불을 켜고 왔나?”
“불은 내가 껐어.”
“보일러는?”
“보일러도 외출로 돌려뒀지.”
“확실해?”
“확실해.”
“가스는?”

“잠갔어.”


남편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하지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분명히 무언가를 두고 왔다. 무언가를 잊었다. 분명하다. 무언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그리고 섬광 같은 깨달음.


“전기장판!”
“뭐?”
“전기장판 껐어?”


내 물음에 남편이 애매한 표정을 짓는다.


“당신이 끄지 않았나?”
“잘 모르겠는데.”
“아냐. 당신이 껐어.”
“아닐지도 몰라.”
“아까 끄는 것 봤어.”

“언제?”
“본 것 같은데……”


남편이 말끝을 흐린다. 나는 그를 믿지 못한다. 두 번이나 실직을 당한 남자를 믿지 못한다. 아니, 사실 나는 세상 누구도 믿지 못한다.


“안 껐어. 안 끈 게 분명해.”

“아니야. 껐어. 껐을 거야.”


남편도 오기가 생기는 모양이다.


“증거 있어?”
“껐다니까!”
“증거를 대.”
“그럼 다시 돌아가든가!”


남편이 화를 냈다. 나는 갑자기 수그러든다.


“아니야. 껐을 거야.”


우리의 싸움은 늘 이런 패턴이다. 내가 히스테리를 부린다. 남편이 불안해하며 그런 나를 진정시키려 애쓴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지금 히스테리를 부리고 싶어서 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편의 무마는 거의 추임새, 백댄스, 장구소리, 휘발유에 가깝다. 나의 히스테리는 점점 고조된다. 급기야 남편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 그제야 나는 물바가지라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을 차린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전기장판을 켜놓고 외출한 적이 없다. 그런데 하필 2주 동안 집을 비우는 오늘, 외국으로 떠나는 오늘, 전기장판이 나를 괴롭힌다. 껐는지 안 껐는지 아무리 더듬어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칠 것 같다. 이미 고속도로를 탔는데 다시 돌아가자니 진짜로 미친 것 같아 보일까 걱정이 된다. 손톱만큼 남은 내 이성은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나를 붙잡는다. 하지만 나의 감성은 폭주기관차라도 탄 듯하다. 전기장판이 과열된다. 이불이 타다가 불이 붙는다. 불은 싸구려 장판과 벽지와 커튼을 태우고 집을 집어삼킨다. 우리는 이제 집도 절도 없는 신세가 될 것이다. 실직도 했는데.


두 아이를 데리고 태국으로 간다. 이건 3박 4일 정도의 홍콩 여행과는 급이 다른 것이다. 불안하다. 불안하고 또 불안하다. 나는 태국이 어디보다 안전한 나라이면서 또 어떤 면에서는 불안한 나라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딜 가나 흥정은 기본이다. 나는 흥정이 싫다. 사기를 당한 적도 있다.(보석사기!) 전에 아들과 함께 여행하던 유럽 여자의 실종 전단이 카오산로드의 경찰서 앞에 붙어 있던 걸 봤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일정도, 숙소도, 제대로 정해두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그저 이 여행에 대한 내 불안감을 해소할 창구가 필요한 것이다. 그걸 애꿎은 전기장판에 투사한 것일 뿐이다.

 

공항에 가서 티켓을 발권하고 짐을 부치고 출입국 심사를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서야 불안감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전기장판은 꺼져 있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낙관적인 전망을 갖자.


다행히 아이들은 인천에서 방콕까지의 꽤 긴 비행시간을 잘 견뎌냈다. 예전에 홍콩행 비행기에서 갓 돌이 지난 아들이 귀가 아팠던지 내내 악을 쓰며 울어 승객 모두가 이를 갈게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잠도 잘 자고 기내식도 잘 먹고 모니터로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면서 잘 갔다.


방콕의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변신이라도 하듯 화장실로 달려가 여름옷으로 갈아입었다. 한국을 떠날 때는 오리털 코트를 입어야 했는데 여기서는 소매가 없는 옷을 입고 슬리퍼를 신어도 된다. 겨울을 벗어버리고 여름을 입는 것이다. 추위에 두꺼운 옷을 잔뜩 껴입고 어깨를 움츠린 채로 종종걸음을 칠 때의 우리와, 더위에 늘어져서 세월아 네월아 슬리퍼를 질질 끌으며 걷는 우리는 같지만 다른 사람들일 것이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삼복더위에는 실연을 해도 그럭저럭 잊어버리고 살게 돼. 더워 죽겠는데 울고 불며 곱씹을 여력이 어딨어.”

 

그렇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운 나라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잘 나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울고불고 곱씹고 치를 떨고 저주하고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도 날씨가 받쳐줘야 가능한 것이다. 춥고 스산하기로 유명한 나라 출신 작가들의, 세상 근심을 다 끌어안은 얼굴을 떠올려 보시라.


뜨거운 열기로 가득한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약간 긴장했지만 의외로 간단했다. 숙소가 있는 거리의 이름인 ‘프라 아팃’을 말하고 고속도로 톨게이트 비용을 포함한 적정 금액을 흥정하자, 택시는 문제없이 우리를 프라 아팃으로 데려다 주었다. 많은 것들이 눈에 익다. 나는 이 거리를 잘 안다. 익숙한 골목들, 익숙한 가게들, 익숙한 건물들, 익숙한 분위기와 냄새.


일단 숙소에 짐을 풀고 챙겨오지 않은 딸의 수영복을 사러 나섰다. 계단을 내려오며 남편이 즐거운 듯 소리친다.


“아, 외국에 도착한 첫 날 맡는 이 낯선 냄새! 정말 좋아.”


내 남편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남자다. 나는 이 낯선 냄새가 싫다. 낯선 공기와 낯선 소리와 낯선 냄새가 나를 불안하고 울적하게 만든다. 이 순간 나는 달아나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가 여길 왜 온 거지. 구역질이 날 것 같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어 마흔이 가까운 나이고, 남편도 있고, 애도 둘이나 낳았고(말했다시피 둘 다 자연분만으로!), 2종 수동 운전면허도 있는데, 심지어 여기까지 이 모두를 끌고 온 건 나인데, 그런데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정말 바보 같다.


수영복을 사서 돌아와 가족들은 모두 수영장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런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나는 수영장 옆 식당의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수영하는 가족들을 지켜보았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이 후덥지근한 공기와 숯불과 생선젓국과 매연과 팍치와 파인애플이 뒤섞인 달짝지근한 냄새와 낯선 언어들과 새소리들이 ‘이질적인 것’에서 ‘이국적인 것’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자는 두렵지만, 후자는 견딜만하다. 그리고 내게는 전자에서 후자까지 가는 거리가 인천에서 방콕까지의 거리만큼이나 멀다.


그나저나 내가 수영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방콕에 도착하자마자 생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 나의 불안과 히스테리와 울적함은 모두, 호르몬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을 시작하고 이틀 후에 볼 일이 있어 엄마가 안양의 우리 집에 들렀다. 나는 태국 남부의 소도시, 끄라비의 바다 앞에 서서 엄마가 보낸 문자를 받았다.


‘전기장판 꺼져 있음.’


그 소식을 듣고 나니 바다가 2% 더 아름다워 보였다.

 

이 여행과 여행 중인 우리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행운아이고, 지금의 시련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집도 불타지 않았다.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있다. 그러고 보면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어쩌면 그게 여행의 가장 멋진 점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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