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적이다. 누군가 고통받는 장면에 사진기를 들이대는 행위는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고 해도 추악하다. 모욕은, 고통받는 사람만 치르는 것일까. 찰칵대는, 그리하여 그 고통을 ‘볼만한 것, 아니 볼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만들려는 사진사에게도 그 순간은 모욕적이다. 스스로비웃게 된다. 힐난하게 된다. 자책의 늪에 빠진다.
누군가 ‘찍히는 모욕‘을 견딘다. 누군가 ‘찍는 모욕‘을견딘다. 비로소 누군가의 눈에 사진이 배달된다. 누군가는 (찍히기를/찍기를, 알려지기를/알리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모욕 따위 생각할 겨를마저 없었을지 모른다. 그 땅에 살기 위하여. 한데 그런 절박함이 모욕을 없던 일로 만들어주는가. 모욕은 즉각적인 것만은 아니다.
더한 치욕은 시간차를 두고 찾아온다. 두고두고.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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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란 언제나 처음이다. 하지만 누적된 처음이다.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본다는 건, 원치 않을지라도 미래를 짐작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밀양이라는 현재는 대추리라는 과거가 예언한 미래였다. 이대로 밀양이 과거가 될때, 우리가 마주할 미래는 무엇일까. 저곳의 파괴는, 이곳의 파괴로 돌아온다. - P114

‘보는 것‘이 곧 일인 내게, ‘볼거리‘가 많다는 것은 어쩌면 축복이리라.
나의 ‘보는 일‘은 목격일 수도, 응시일 수도, 관찰일 수도, 방관일 수도 있는데, 펼쳐진 장면의 성격에 따라 나의 ‘보는 태도‘
와 ‘보는 방법‘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시각이란, 그저 보는 것만은 아니다. 시각이 인간의 감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사고의 근간이 되는 정보가 시각을 통해운반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점점 더 시각 정보에 의존하는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그저 바라볼 뿐이라 말할 때도 있지만,
그것마저도 사실은 그저 바라볼 뿐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타자라는 풍경을 바라본다. 타자는 나를 비추는 오묘한 거울을 가진 자다. 그러니 그저 바라볼 뿐인 행위란, 실로 불가능할수밖에나는 본다. 
어떤 풍경은 보고 싶어서 보고, 어떤 풍경은 보기싫지만 본다. 대체로 눈을 감지는 않는다. 눈을 뜨는 것이야말로 너의 일이라 타이르면서. - P88

그 한 문장이 며칠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쁜 끝은없어도 착한 끝은 있다. 그 말씀을 읽는 방법이 여럿일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착함의 좋은 끝‘을 말하였으나,나는  ‘착함의 한계‘를 생각했다. 사람의 착함엔 한계가있다. 사람의 나쁨엔 한계가 없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건 결국 나쁜 짓이 아닐까.
악마라 불러도 좋을 자들을 볼 때마다, 저것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사진으로 수집해온 건 그런‘사람의 짓거리‘였다. 정말이지, 나쁜 짓들은 볼거리를제공한다.
때론 착함을 본다. 힘겨워진다. 저 사람은, 사람이 싫어서 저러는구나. 사람됨을 거절하는구나. 곧 넘어지겠지, 결국 무너지겠지. 착함이란 바스러지기 쉬운 거니까.그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아파 까무룩 잠이 든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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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의 귀환‘은 역사철학의 고민이기도 했다. 죽은 자는 왜귀환하는가. 산 자들이 그들의 장례를 제대로 치르지 않았기때문이다. 전두환의 돈을 숨겨주고 그를 기리는 기념 공원을만드는 사회, 지역 발전을 위해 항쟁의 기억을 지우려는 사회,
여전히 빨갱이 폭도를 들먹이는 사회에서 빛고을 영령은 제대로 배웅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귀환한다. 기억 투쟁의이름으로, 인정 투쟁의 이름으로.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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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격 - 필연의 죽음을 맞이하는 존엄한 방법들에 관하여
케이티 엥겔하트 지음, 소슬기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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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을 때까지 살 수 없는 경우를 줄이기 위해 의학이 발달해왔다고 생각했다.

의사의 역할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라고.

이 책을 읽고 난 지금, 잘 모르겠다.

병이 나을 희망이 없고, 심신의 고통이 너무 심하고, 내가 내 몸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을 때 목숨을 더 이어가기를 포기한다는 것에 대해서.

치매 환자를 매일 보면서 내가 치매에 걸렸을 때를 생각하면 결정은 더 쉬웠다.

저런 상황을 맞기 전에 삶을 끝내야겠다. 나를 위해서 또 가족을 위해서.

그런데 오히려 이 책을 읽으면서 그게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삶도 죽음도 선택할 자유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치료나 돌봄을 받을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상황을 일시에 끝내버릴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책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미국처럼 보편적인 의료에 접근할 권리를 보장하지 못하는 국가에서는 조력자살(의사조력사, 안락사, 존엄사...)을 허락해서는 안된다고.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필요할 때 필요한 의료적 처치나 돌봄을 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는 사람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결국 타의에 의해 죽음에 내몰리게 된다는 것이다.

살고 싶지 않을 때 죽음을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죽는 방법을 안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죽는 것까지도 뭔가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죽는 것에도 품위와 존엄을 위해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며, 아무나 그 죽음의 방식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 씁쓸하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인간의 오만함이 아닌가 싶다.

읽는 중간 중간 한숨이 나고 답답했으며 생각할 것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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퀼은 자기 능력에 의사의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타협할 줄 알았다. ‘심각한 통증‘을 ‘괜찮은‘ 정도로 억누를 순 있었지만,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가능한 한 ‘덜 나쁜‘ 죽음을 꾀할 수는 있지만, 좋은 죽음을 약속할 수는 없었다. 퀼은 자신이 통증은완화시킬 수 있어도, 앞으로 겪을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완화하거나 치유에 대한 기대를 줄일 수는 없었다. 퀼은 다이앤의 요청을충분히 숙고한 끝에 ‘자신이 고민하는 중인 경계에 대해 불안감을느끼며‘ 수면제를 처방해주었다.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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