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물」과 「캥거루의 조상이」에는 ‘팔자 고치기‘와 ‘인류의 개조‘라는 두가지 핵심적인 생각이 담겨 있다. 이 두 가지는 재생산을 하거나 하지않음을 통해 사회적 배척과 퇴행을 ‘치유‘하려는 것이다. 장애를 가진 어머니는 예쁜 자녀를 낳아서 자신의 운명을 고치려고, 즉 자신의 외모와 관련된 장애에 대한 사회적인 거부를 완화하려고 한다. 태어난 아기의 성별, 인종, 장애 여부와 같은 특성에 따라 어머니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이 재생산유전 드라마의 핵심 주제다. 비장애 아이를 재생산함으로써 달성된 치유는 어떤 의미에서는 연계 치유courtesy cure이다. 이는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맺는 연관성을 통해 장애인 본인이 어떻게 인식되는지가 달라지는 경우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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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낳은 뒤 키우고 싶지 않으면 국가에서 대신 키워주고, 아이를 키우고 싶으면 국가에서 키우는 아이들을 면접을 통해 입양할 수 있다. 입양될 기회를 얻지 못하면 그냥 사회에 나가야 하고 그건 낙인이 된다.

아이를 낳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남의 아이를 키운다는 것도 이상하다. 국가기관NC(nation's children)센터에서 부모가 될 사람들과 아동을 연결해주고 부모는 아동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게 특이한 점인데 언뜻 애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정말 애들쪽에 유리한 방식인걸까.

부모는 선택할 수 없다. 과학이 발달하면 자식을 선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마이클 샌델교수의 책에서는 유전질환의 위험을 없애고 뛰어난 운동신경을 가진 자식이나 예술적 능력이 뛰어난 자식을 맞춤형으로 낳을 수도 있다고 한다. 생명윤리때문에 실행하지 못하고 있을 뿐.

이런 쪽으로 생각을 많이 하나보다. 베르베르의 책에서도 태어나고 싶은 가정을 선택할 수 있다.

책에서는 인터뷰를 통해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 본인이 원하는 미래를 만들어줄거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선택을 한다.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선택.

주인공은 다른 선택을 한다.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보고자 한다. 살다보면 선택지에는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의 부모님을 선택했을까.

우리 애들은 나를 엄마로 선택해줄까.

생각이 참 많아지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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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주택에 사는 불편함이라 해야하나, 원치 않는 소란함에 기분이 언짢아질 때가 있다.

아랫집 아주머니의 랩하는 듯한 고성을 듣고 있으면 사람이 같이 산다는 것은 뭘까, 왜 매일 가족과 전쟁하듯 살아가는 걸까 등등 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조용하던 아랫집이 소란스러워지는 건 누군가 들어왔는지 현관 문 닫는 소리가 난 직후이다.

하루종일 세상살이에 시달리다가 집 문을 여는 순간 평화가 아닌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면, 매일 저 문을 여는 기분은 어떨까.

대화가 오고 가는 순간 소리를 지르는 아주머니의 사정이 어떤지 나는 모른다.

매일 같은 주제로 악을 쓴다 해도, 또 매일 다른 주제로 악을 쓴다 해도 난감한 일이다.

듣고자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소리로 짐작하건대 일단 아주머니는 대화가 오고, 가는 순간 소리를 높인다.

가끔씩은 물건을 집어던지는지 뭔가 바닥에 떨어지거나 깨지는 소리도 난다.

아주머니가 악을 쓸 때마다 오래 전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짜르트의 장모가 막 잔소리를 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오페라 '마술피리'중 밤의 여왕의 아리아로 연결되는 바로 그 부분.

연상작용이 그렇다는 거지 사실은 정말 괴롭다.

퇴근하고 피곤한 몸을 좀 뉘여볼까 하는 순간에 시작되는 공포의 랩타임은 보통 10분 넘게 계속되는데 이게 경비실에 알릴만한 상황인가 하면 꼭 그런것도 아니어서 망설이다 보면 누군가가 집을 뛰쳐나가는지 거칠게 문 닫는 소리와 함께 진정되는 것이다.

나도 가족과 불화를 겪을 때가 있고, 가끔은 목소리 높여 싸움도 한다.

하지만 그 시간이 가족의 귀가 직후는 아니다.

 '세월호' 이후 아침에 나갔던 가족이 저녁에 문을 열고 들어온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거다.

"다녀올께" 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간 가족이 다시는 그 문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을때 남은 가족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학교에서, 일터에서 돌아온 가족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는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랫집 아주머니도 깨닫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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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8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이 들어와 사는 것이다.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하는 이치이다.-10

 사람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사람을 숙주로 삼아 살아야만 사랑을 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은 어쩌면 사실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사람을 이전과는 다른 세계로 이끌고 다른 사람을 만든다.

사랑하면 용감해지거나 너그러워지거나 치사해진다-11

 이 소설은 사랑의 숙주가 된 네 남자의 이야기이다. 형배의 아버지는 형배가 중학생일 때 새로운 여자를 만나 가족을 떠난다. 아들에게 언젠가는 자기를 이해할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하지만 아들은 사랑을 잃고 우울증에 빠져 버린 어머니를 보면서 사랑의 고통을 알게 되고, 사랑을 멀리하게 된다.

그런데 형배는 왜 사랑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두려움은 위험에 대한 감각적 반응이다. 위험이 닥칠 것을 예감할 때 사람은 염려하고 기피하는 마음을 갖는다. 그렇다면 사랑에 붙들리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일이 위험한 일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81

 아버지가 왜 어머니를 떠났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만나는 여자들 넋을 빼놓던 잘생긴(281)’ 사람이었던가 보다. 그래서 한 여자에게 머물러 있을 수 없었던 것일까. 어머니는 남편에 대한 배신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알콜중독과 우울증으로 고생했다. 그랬던 어머니가 우연히 남편이 병들어 요양원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곁으로 간다. 어머니는 그 이유를 내가 처음 사랑하고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281)’이라고 한다. 사랑은 위대한 것인가?

 

 작가는 남자의 사랑과 여자의 사랑을 다르게 정의하는 것 같다. 여자는 용서하고, 받아들이며, 인내하고, 포용한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사람은 선희인데 작가는 그녀를 성모마리아처럼 묘사한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눈칫밥 먹으면서 서럽게 자란 영석을 마치 어머니처럼 돌본다. 둘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하나? 연민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불어 밝혀야 하는 것은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다. 어둠이 그녀의 눈빛을 가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숨김없이 드러낸, 그러나 어둠이 가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숨김없이 드러나지 않은 그 감정은 연민이었다.-190

 영석은 일방적으로 기대고, 보채고, 끊임없이 요구한다. 선희는 그를 어머니처럼 품는다. 어린애처럼 가슴에만 매달리는 남자를 마치 젖먹이는 어머니처럼 쓰다듬어 주는가 하면, 질투에 눈이 멀어 함부로 대해도 견딘다. 영석은 어린애가 아니다. 선희보다 10년을 더 살았고 자기 일을 성실하게 해나가는 어른이다. 하지만 그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결핍에 시달리는 덩치 큰 어린애며 그 결핍을 애인에게서 채우려고 한다. 나 같으면 이해하기 힘든 남자의 행동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품으려는 선희의 태도는 소설 어디에서도 설명되어 있지 않다. 마치 여자는 애인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강요하는 것 같다.

그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예컨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그는 너그럽고 능숙한 남자 연인이 아니라 서툴고 심술궂고 어머니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갈구하는 이기적인 아이가 되었다. 애무를 할 때도 예외가 아니어서 그녀는 가끔 자기 품을 거칠게 파고드는 어린아이를, 어머니가 그렇듯, 너그럽고 능숙하게 다독이며 헛웃음을 웃곤 했다.-155

그녀는 잘 버텼다. 그녀는 그를 이해하려고 했고, 실제로 누구보다 잘 이해했으므로 그의 괴롭힘을 견뎠다. 특히 그날 밤 흥분해서 소리 지르다가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를 경험한 후 더 조심하고 배려했다. 안쓰러워하며 아이 달래듯 달랬다.-251

 형배도 영석도 상처를 가지고 있고,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하지 못한다. 그런데 왜 선희는 형배가 아닌 영석을 선택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형배가 자신의 사랑 고백을 거절해서? 선희가 원할 때 받아주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어렵게 마음을 정리한 사람에게 갑작스러운 사랑 고백을 받았다고 넙죽 그 마음을 받는다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형배가 선희를 다시 만난 후 새삼 그녀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하루 종일 그녀 생각으로 힘들어질 정도가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이 부분에서 형배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처음 형배가 선희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거절한 이유를 부모의 파경 때문이라고 한 것이다.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 상처를 좋은 쪽으로 극복해내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자신의 상처로 다른 사람을 괴롭힐 권리는 없다. 그 때 너를 거절했던 이유가 네가 싫거나 어떤 부분이 맘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부모로부터 비롯된 사랑에 대한 고통, 불신 때문이었다, 라고 설명하는게 좀 우습지 않은가. 어쨌거나 선희는 영석을 선택했고 그 이유는 영석의 상처 받을까 두려움에 벌벌 떠는 약함에 끌렸다는 것인데 사랑이 시혜인 듯, 일방적인 베품을 찬양하는 듯 한 내용 또한 이해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 누군가의 약함이다. 약한 것들은 무엇인가를, 어떻게든 할 것을, 가만히 있지 말 것을 요청한다. 약함으로부터 가만히 있지 말고 무엇인가를, 어떻게든 하라는 강요를 받을 때, 그 강요를 받은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약함은 유인한다.-191

 이 소설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캐릭터는 준호다. 준호는 연애 상대를 자주 바꾸고 동시에 여러 여자와 사귀기도 하는데 그의 주장은 궤변 같으면서도 일면 솔깃해지는 부분이 있다. 특히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만이 이상적인 것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라 주장하는 부분에는 그럴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했다.

똑같은 사람이 한 명도 없으므로,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고유하고 특별하므로 모든 사람을 고유하고 특별하게 대해야 한다. 유일한 사람으로 대해야 한다. 사람의 매력은 한 줄로 순서를 매겨 세울 수 없고, 비교 불가능하다. 사람(의 매력)이 다르므로 연애도 다르다.-72~73

 그의 주장은 한 여자를 만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독실한 개신교도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 강력한 라이벌(그녀가 믿는 신)을 만나게 된 그는 그녀와 신체적인 접촉을 하기 위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사랑의 결과가 결혼이 아니라,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라는 그녀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사랑이라는 것이 상대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용납하는 것이라면 불안정하고 변하기 쉬운 감정에 어떤 의지를 부여하는 것이 결혼제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다 영원하지는 않고, 결혼 또한 의지로만 지탱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애정관은 너무 순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당장 그녀와 결혼할 것 같았던 준호가 다른 매력( 맑고 청량한 목소리)을 가진 여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일부만, 예컨대 마음에 드는 부분만 사랑할 수는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106

감정이나 감각이 아니라 그보다 강제적인 어떤 것, 이를테면 의지에 기반해야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의지에 입각하지 않는 사랑은 일관성 유지가 힘들다. 결혼 제도는 장치로서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107

 작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보다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알아야 하고,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어떤 결핍을 채우는 것이 아닌 충만함을 더하는 것이다. 결핍을 가진 사람은 온전히 사랑하기 힘들다.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상대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폭력이다. 그것을 내가 이해하고 용납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선희가 영석에게 모성을 발휘한다고 했는데 그 표현 또한 불편했다. 어머니란 그렇게 모든 것을 내놓고 희생만 해야 하는 존재인가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또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이만 줄인다.

사랑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 사랑하느라 바쁜 사람은 사랑이 무엇인지, 그것의 근거나 방식이 어떠한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살지 않는 자가 삶이 무엇인지 묻는다. 참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삶을 하고사랑을 하는 것이다.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이다.-285

 책을 덮으면서 처음에는 어이없고 뻔뻔하다고 생각했던 준호의 사랑이 어쩌면 사랑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의 귀여운(?) 궤변을 마지막으로 읽으며 글을 마친다.

한 사람과의 길고 지루한 사랑이 고상하고 훌륭하고 인간적인 것으로 장려되고, 그렇지 않은 사랑은 저열하고 추잡하고 비인간적인 것처럼 선전되는 것은, 아무리 사회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은 그마저도 효용성이 의심스럽거니와, 무엇보다 사랑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불순하고, 인간의 감정과 본성에도 맞지 않는 모순당착이다.-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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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고 재택치료 중이다.
가족 감염을 막으려면 소독 등등 신경써야 할 일이 많을텐데 본인이 환자니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정에서 주부, 엄마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프면 누가 간병을 할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내 동료는 누구의 돌봄을 받고 있을까.

 

매 주 금요일 EBS '명의'를 즐겨 본다.
다양한 질병과 치료법, 예방법에 대한 사례를 보다 보면 식사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100%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부분 남편이 투병을 하면 아내는 식이요법에 신경을 쓴다.
아내가 먹으면 정말 건강해질 것 같은 음식들을 차려놓으면 남편은 먹고 같이 운동을 간다든지 한다.
거의 변함이 없는 장면이다.
그런데 아내(여자)가 투병을 할 때 위와 같은 식사를 아내의 도움 없이 차려주는 남편을 거의 못 봤다.
대부분 여자는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조리하며 식탁에서 혼자 먹는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주부는 아파도 가족에게 미안하게 되는 것이다.
할 일을 못하고 가족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니까.
아픈건 미안한 게 아닌데.

 

'명의'에서는 거의 보지 못한 모습이지만 투병중인 아내의 식사를 챙기며 그걸 모아 책을 낸 사람이 있다.
남편이 차려준 밥만 먹겠다고 선언한 아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또 아내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늘 최선을 다해 요리를 했던 남편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남편에게 음식 만들기는 단순히 아내의 일을 돕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수고로)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생존기술인 셈이다.

 

동료가 가족들의 도움으로 별 다른 후유증없이 복귀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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