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은 그가 인간의 집단적 자아에손을 대는 순간 악해진다. 그러고 나면 그는 도착자가되며, 이는 플라톤도 동일하다. 위대한 성인은 오직 개인으로서만, 다시 말해 우리 본성의 한 측면일 경우에만 가능하며,
우리 내면의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어찌할 수 없이 집단적이다.
그 집단적 자아는 완전한 권력관계 속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감을 가지거나, 혹은 반대로 권력을 파괴하려는 저항이만든 비참함 속에 살다가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 P35

기독교의 숨은 측면으로서 아포칼립스는 거의 2,000년 동안을 이어져 왔고, 그것의 과업은 거의 달성되었다. 즉 아포칼립스는 권력을 경외하지 않는 것이다. 그 책은 권력자를 살해하고, 약자인 자신들이 그 권력을 쟁취하길 원한다.
유다는 예수의 가르침에 부정과 술수가 내재해 있기에 예수를 배신하고 그를 당국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심지어제자들과의 관계에서조차 순전한 개인으로 자신을 위치시켰다. 그는 제자들과 진정으로 섞이지 않았으며, 그들과 더불어진정으로 일하거나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혼자였다.
그는 제자들을 극도로 혼란스럽게 했고, 그들 중 일부에게는실망감을 주었다. 예수는 물리적 힘을 가진 그들의 권력자가되길 거부했다. 유다 같은 이들 안에 웅크리고 있던 권력에의충성심은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충성심 역시한 번의 키스와 함께 배신을 실행했다. 마찬가지로 계시록도신약 성경에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복음서에 죽음의 키스를해야 했기에. - P36

모든 위대한 왕은 모든 사람을 그만의 작은 영역에서작은 지배자로 만들고, 그의 상상을 지배와 영예로 채우면서그의 영혼을 만족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인간에게자신이 울타리에 갇힌 수컷처럼 실은 얼마나 비천한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이것은 그를 우울하게 하고, 그를 비천하게 만들어버린다. 아아,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되는것이다. 남자이자 영예로운 자아로 살았던 이들은 실의에,
나아가 거의 비참에 빠진 채로 오랫동안 우울해하며 지금에이르렀다. 이는 사악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면 사람들이 직접나서서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하게 하라. - P41

민중의 의지가 약자로이루어진 다중이 가진 취약성의 총합이 될 때, 그때가 바로그곳에서 도망쳐야 할 때이다.
그때가 바로 오늘이다. 사회는 공포에 사로잡혀 자신들을가능한 모든 상상적 악으로부터 보호하려 애쓰는, 자신들의 바로 그 공포에 의해 악을 낳는 약한 개인들의 무리로 이루어져있다.
이것이 끝없고도 비열한 ‘너는하지 말라‘에 종속된 오늘날의 기독교 공동체이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가 현실에서작동해온 방식이다. - P43

계시록은 이 모든 일의 전조였다. 무엇보다 그것은 일부심리학자들이 좌절된 ‘우월성‘ 추구와 그 결과 발생하는 열등콤플렉스의 계시록이라고 부를 만한 책이다. 명상의 평온함,
이타적 봉사가 주는 기쁨, 야망에서의 해방, 앎의 쾌감과 같은기독교의 긍정적 측면을 우리는 아포칼립스에서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다. 명상과 이타적 봉사가 홀로 선 순수한 개인을위한 것인 반면, 좌절된 집단적 자아에 의해 기록된 아포칼립스는 인간 본성의 비개인적 측면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 P44

계시록은 고대 도시를 발굴하기 위해깊이 더 깊이 파고들 때 나오는 문명의 층처럼 여러 층들로이루어진 한 권의 책이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것은 이교도기층인데, 아마 에게문명의 고대 저술들 중 하나로 일종의 이교도 신비주의에 관한 책일 것이다. 그 책을 유대교종말론자들이 다시 썼고, 그 내용이 확장되었다가, 마지막에유대-기독교 종말론자인 요한이 이를 다시 고쳐 썼으며,
요한 사후에 이 책을 기독교 저작으로 만들려 했던 기독교도편집자들에 의해 삭제되고 교정되고 다듬어지고 추가되었던 것이다. - P69

요한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것도 즉각적인 재림을 확고히믿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희망이 만들어낸 전율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바, 당연히 이교도들의시각에서 볼 때 기독교인을 인류 전체의 적으로 만들었던것은 이 희망의 전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시 오지 않았으니, 우리는 그 부분에대해선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는다. 우리를 흥미롭게 하는것은 이 책에 담긴 기묘한 이교도적 반향, 이교도의 흔적이다.이방의 세상을 실제로 들여다볼 때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교도의 혹은 비유대인의 눈으로 그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는지우리는 깨닫는 것이다. 다윗왕 이후의 시대를 살던 유대인들은 세상을 바라볼 자기만의 눈을 구비하고 있지 않았다.그들은 자신들의 여호와를 향해 눈이 멀 때까지 내면을 응시했고, 그러다가 세상을 볼 때는 자기 이웃들의 눈으로 보았다.예언자들이 환영을 보아야만 했을 때 그들은 아시리아나 칼데아의 환영을 보아야만 했다.자신들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기 위해 그들은 다른 민족의 신들을 빌렸던 것이다. - P71

고대 종교들이생명력, 효능, 힘의 컬트였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안 된다. 오직 히브리인들만이 도덕적이었으나, 그들은 그마저도 소수에 불과했다. 옛 이교도들에게 있어 도덕은 단지사회 예절, 바른 행동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시대에 이르면, 모든 종교와 모든 사상이 생명력, 효능, 힘에대한 오랜 숭배와 탐구에서 죽음, 죽음 보상, 죽음 처벌, 도덕에대한 탐구로 완전히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종교가생명, 여기, 지금의 종교가 아닌, 지연된 운명, 죽음, "네가 선한 경우에 한해" 사후에 받을 보상의 종교로 변했던 것이다. - P78

나는 파트모스의 요한뿐 아니라 성 바울 성 베드로, 성사도 요한 역시나 별과 이교도 컬트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있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들은 어쩌면 현명하게도 그앓을 확실히 억누르는 쪽을 택했다. 파트모스의 요한은 그렇게하지 않았다. 따라서 2세기부터 시작해 찰스 부주교에 이르기까지 그의 기독교 평자들과 편집자들은 요한 대신 [그 앎을]억눌러 온 것이다. 성공하지는 못했다. 신성한 권력을 숭배하는식의 정신은 언제나 상징 속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상징을 통한 직접적 생각 회로는, 왕, 왕비, 병졸이 있는체스 게임이 그렇듯, 권력을 가장 절실히 채워져야 할 결핍으로 보는 인간들의 특징이다. 최하층의 민중은 여전히 권력을 숭배하고,여천
전히 상징을 통해 단순하게 생각하고, 여전히 아포칼립스에 집착하며 신상수훈에 대해서는 완전히 냉담하다. 교회와 국가의 최상층 역시 여찬히 권력의 측면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정 자연스럽게도. - P80

그러나 찰스 부주교 같은 정통파 평자들은 두 마리 토끼를다 잡고 싶어 한다. 그들은 아포칼립스에 담긴 고대 이교도의권력 감각을 원하면서, 나머지 절반은 권력 감각이 거기에들어 있음을 부정하는 데 쓰는 것이다. 그들이 이교도적 요소를인정해야만 한다면, 아마 사제복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냅다 도망칠 것이다. 동시에 아포칼립스는 이들을 위해 차려진진정한 이방의 잔칫상이다. 음식을 집어삼키되 단지 성스러운모양새로 집어삼켜야 하는 것뿐이다. - P80

성경은 너무나 찬란하게도 이교도성으로 충만해 있으며 거기에 성경의 보다 큰흥미로움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일단 그 점을 인정하고 나면기독교는 자신을 덮고 있던 껍질에서 빠져나와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더 아포칼립스를 보면서 수평적으로뿐 아니라 수직적으로 그 구조를 감지하려고 해보자. 이 책을 더많이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는 이 책이 메시아적 신비인 동시에시간을 통과해가며 잘렸음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은 한 사람의작품이 아니며, 심지어 한 세기의 작품도 아니다. 이에 대해서우리는 확신한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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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것이다. 헤아려지자마자, 속살이 알려지고 그 의미가고정되거나 확정되자마자 책은 죽은 것이 된다. 우리를 뒤흔들, 나아가 우리를 다르게 뒤흔들 힘을 가지고 있는 동안만,우리가 그 책을 읽을 때마다 그것이 다르게 느껴지는 동안만책은 살아 있는 것이다. 한 번의 독서로 다 파악되는 얄팍한책들의 홍수로 말미암아 현대의 지성은 모든 책이 다 똑같다고, 한 번 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현대의 지성은 다시 한번 서서히 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책의 진정한 기쁨은 그것을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는 데,
또 다른 의미, 의미의 또 다른 차원과 마주치면서 읽을 때마다그 책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데 있다. 늘 그렇듯 이는가치의 문제다.  - P10

성경은 그 의미를 자의적으로 고정시킴으로써 우리, 혹은우리 중 일부를 위해 일시적으로 도살된 책이다. 우리는 표면적인 의미든 대중적인 의미든 성경을 너무도 완벽하게 알고있기 때문에 그것은 죽은 상태이며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떤것도 주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이 거의 본능이되어버린 오랜 습관을 매개로 해서 이제는 혐오스러워진 어떤총체적 감정 상태를 우리에게 부과한다는 점이다. 우리는성경이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부과할 수밖에 없는 그 예배와주일학교 감성을 증오한다. 우리는 그 모든 저열함-그것은 실제로 저열하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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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소에 갔다가 직원이 있는 계산대가 하나로 줄고 셀프계산대가 세개로 늘어났다는 걸 알게되었다. 

줄 서지 않아도 되어 셀프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기계가 설명하는 걸 잘 못알아들어 좀 헤맸다.

그 사이 계산대에 있던 직원이 헤매고 있는 나에게 와서 묻지도 않고 막 일을 처리해준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도와줘야 할 상황도 아니었고, 내가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계속 나에게 말로 지시를 하더니 내가 이해하지 못하니까 대신 막 해주는 거다. 

본인은 도움을 주었으니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원치도 않은 일을 해주면서 불친절한 말투와 태도는 뭔가.

왠지 내 돈 쓰면서 야단 맞고 바보된 기분.

도움을 받고서도 전혀 고맙지 않고 불쾌한 생각이 들었다.

나의 선의가 상대에게도 선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된다.

제일 대화하기 힘든 상대가 나는 좋은 뜻으로 말했다, 행동했다 라는 태도를 고수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잘못을 이야기해줘도 전혀 깨닫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나처럼 셀프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치고 가던 사람이 직원이 서 있는 계산대를 보며 "일자리가 줄었네" 했다.

그건가?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고 있는 공간에서 사람의 쓸모를 강조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사람의 쓸모를 과장하다보면 나처럼 차라리 기계를 대하는 것이 더 맘이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수도 있다.

점점 더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게 되고 불친절한 도움이라도 받고 싶지만 받을 수 없게 된다면 어떨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기계가 하는 소리를 잘 못알아듣겠다.

귀에 들려오는 소리와 머리가 인지하는 소리가 다르다. 환장!

정희진의 말처럼 끼리끼리 살면 괜찮을까?


나는 〈나라야마 부시코〉(1983년)처럼 진화생물학의 원리대로 살 것이다. 나 같은 '대세의 낙오자, 저항자, 불편하게 사는 자'끼리 모여 우리끼리 잘 살면 된다.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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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사례들은 성역할 규범(norm)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바꾸는지 잘 보여준다. (결혼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복잡하다. 언제나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이없어서가 아니라, 생각을 너무 많이 해야 하기 때문에 ‘생각을해야 한다‘. 여성을 위한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언어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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