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밀크
데버라 리비 지음, 권경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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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의 죽은 자들을 애도하고 슬퍼해야 하지만 그들이 우리 삶을 빼앗게 두어선 안됩니다." 364쪽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하며 자신을 진료한 의사들을 모두 좌절시킨 어머니.

병명을 알아내려고 집을 저당잡혀 대출을 받은 돈으로 스페인의 클리닉을 찾아가는 모녀.

딸은 걸을 수 있는데 걸을 수 없는(없다고 주장하는) 어머니를 이해할 수 없다.

클리닉의  의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치료를 시작한다.

그동안의 진료내용을 살펴보고 모녀관계를 정확하게 꿰뚫어본 의사는 어머니와 딸을 분리하려고 여러가지 처방을 한다.

무력하기만 했던 딸은 끊임없이 딸을 자기 영향력 아래 두려고 하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던 와중에 

우연히 엄마가 너무 자연스럽게 걷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딸은 휠체어에 탄 엄마를 도로 한가운데 두고 떠나버린다. 

엄마가 걸을 수 있다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길로 클리닉의 의사를 찾아간 딸이 엄마의 생사를 걱정하며 울 때 의사는 위의 저 말을 해준다.


나의 나 됨은 나와 관계된 사람들, 주변 환경, 상황들이 합쳐진 결과이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가진 문제들이 있다.

산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나간다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런데 자기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내 가족일 때 상황은 복잡해진다.

자기의 삶만 챙기느라고 아내와 딸을 배신하고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아버지.

남편에게 배신당한 상처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어머니.

부모란 뭘까, 또 자식은 뭘까.

남편이 나를 배신했다고 나를 일부러 망가뜨릴 필요가 있는가.

어머니가 병을 핑계로 내 삶을 쥐고 흔들려고 할 때 반항하지 않고 따르는 것이 자식의 도리인가.

누구라도 내 삶을 빼앗게 두어서는 안된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영양실조로 마흔도 못되어 죽은 엄마와 스물도 되기 전 애 낳다가 죽은 언니, 몸을 팔아 언니와 조카들을 도와준 이모의 삶을 보면서 결혼과 출산에 대해 공포를 갖게 된 마리.

아그네스 스메들리의 자전적 소설 『대지의 딸』에서 주인공 마리는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된 아내는 결국 자신의 삶 전체를 남편에게 뺏기게 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안다.


"그러나 마리야, 네가 아주 아주 교육을 많이 받게 되면 부자와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 네 몸을 아낄 필요가 뭐 있니? 너도 언젠가는 늙을 텐데."

"이모! 저는 몸을 아끼고 있는게 아니에요. 아무튼 저는 어떤 남자건, 남자를 위해 몸을 아끼고 있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부자가 된다면 그건 남자 때문이 아니라 내가 번 돈 때문이어야 해요."  227쪽


여자는 어쩔 수 없어, 다른 여자들도 다 그렇게 살잖아? 마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회가 닿는대로 배우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번다.

가난이, 부모가, 남편이 자기의 삶을 맘대로 하지 못하게 한다.

알고 행할 수 있는 용기가 그녀에게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평생 어머니 시중을 드는 사람이었다. 나는 웨이트리스였다. 어머니 시중을 들고 어머니를 기다리는. 무엇을 기다렸던 걸까? 그녀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를? 아니면 그녀가 거짓된 자아 밖으로 나오기를? 그녀가 자신의 우울함을 떨치고 활기찬 삶으로의 티켓을 구입하기를? 내 티켓도 한 장 같이 사기를. 그래, 난 그녀가 날 위한 좌석도 맡아주길 평생 기다려왔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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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거리는 텅 비어 있었다. 울지도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거리를 걷는동안 가로등 불빛만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하늘은 캄캄했다. 나무들이 있었고허드슨 강이 거무스레하게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리버사이드 공원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몸을 뉘었을 때처럼 땅은 차갑고 축축했다. 언덕 위쪽, 리버사이드 거리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집들이 있었다. 평화롭고 사치스럽게 살고잠자는 그들은 낮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곳에 사는 여인들은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내 어머니는 다감하고 감미로운 분이었지. 아버지가 저곳 남자들처럼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더라면……. 부잣집 아들들은 공부하러 가는데, 내남동생들은 허기져서 죽는구나. 내 남동생, 아직 어린 나이에 그토록 비참하게살다 갔구나. 우리는 저기 부유한 사람들 대신 값을 치르고 있는 거야. 우리 내남동생들과 나와 같은 사람들이…………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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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혼 여성의 ‘체면‘은 노예 상태와 열등감을 받아들임으로써 지켜지는 것 같았다. 남자들은 자유롭고 지성적인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도 결혼 전에  남자들이 여자와 맺은 관계를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자들이 젊은 오기로 난봉을 부린 것쯤으로  치부된다. 타락한 남자나 부정한 남자나 몸을 망친 남자란 말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왜 남자들은 여자에 대해서는 그런 말들을 해 왔던가? 나는 그 이유를 발견했다! 여자들은 생계 때문에 남자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여자가 자기 생활비를 벌며 평생 그렇게 산다면 남자처럼 독립적으로 살 수 있다. 바로 그 점이 사람들이 남자를 경멸하지 않는 까닭이었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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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돌보다 - 의무, 사랑, 죽음 그리고 양가감정에 대하여
린 틸먼 지음, 방진이 옮김 / 돌베개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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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목에 책의 내용이 다 들어 있다. 의무, 사랑, 죽음, 양가감정. 늙은 부모를 돌보는 일은 미국과 한국이 별로 다르지 않다. 애쓸수록 죄책감도 늘어나는 아이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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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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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책은 처음인데 알고 보니 내 또래인듯.
중년인 내가 잊었던 과거를 기억해 내는 이야기들.
어떤 계기에 의해서.
관계가 얽히고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이 떠오른다.
꼭 좋았다, 나빴다 그런 종류가 아닌 기억들.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않는 그런 기억들.
그때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괴롭고,힘들고, 어리석었던 그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들었다.
어쩔수도 없지만 굳이 미화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지금 할 수 있는 일, 현재의 나를 바꾸는 일, 그것은 할 수 있겠다.
‘어떻게든‘.

직시하지 않는 자는 과녁을 놓치는 벌을 받는다. - P40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 - P75

아직 희망을 버리기엔 이르다. 나는 서두르지도 앞지르지도 않을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1월 23일의 음력 날짜를 꼬박꼬박확인할 것이다. 운이 좋으면 죽기 전에 한번 더 진정한 왈츠의 날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숲속 식당의 마당에 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숙녀에게 춤을 권하듯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 테고 우리는 마주서서, 인사하고, 빙글 돌아갈 것이다. 공중에서 거미들이 내려와 왈츠의 리듬에 맞춰 은빛거미줄을 주렴처럼 드리울 것이다. 어둠이 내리고 잿빛 삼베 거미줄이 내 위에 수의처럼 덮여도 나는 더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 P241

기억이 나를 타인처럼. 관객처럼 만든 게 아니라 비로소 나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는 걸 아니까.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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