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12
제임스 M. 로빈슨 지음, 소기천 옮김 / 살림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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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교랑 교회가 왜 분리되어 지멋대로 떠도는지 이 책을 보면 안다. 어려운 말로 떠드는 넘들을 신학교에 모아둔 것일까 아니면 신학교란 이름 아래 있게되면 괜히 어려운 말로 허세 떨게 되는걸까? 전문가란 넘들이 책을 어렵게 쓰는 이유는 대충 이렇다. 1. 자신도 뭘 떠드는지 잘 모르지만 일단 있어보일려고 2. 자기가 겨우 이해한걸 남들에게 친절히 가르쳐 주기 싫어서 3. 아무나 쉽게 이해하도록 하면 싸게 보일까봐 4. 이해한 넘들은 꼭 어려운 질문하니까 

     그니까 이 총서 씨리즈는 좀 어렵다. 2~3번 읽어서야 겨우 어렴풋이 감이 온다. 이건 순전히 내 이해력의 한계지만 이따위 책을 쓴넘들이나 팔아먹은 넘들 책임도 있는거니까 완전 잘못 이해한거면 너만 불쌍한거지 뭐.

     신학을 한다는 넘들이 고작 결론을 내린건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과 실존주의의 물결에 휩쓸렸던 무리들- 영어권은 유럽의 난해한 이야기를 잘 이해를 못한건지 무시한건지 외면한건지 어쨋든 복음주의란걸 들고 나온다. 2차 대전후 히틀러를 피해서 미국으로 온 유식한 유럽넘들을 잘 사는 미국넘들이 약간 우습게 본건 아닐까?) 우리가 상식으로 생각하는 역사적 실존 인물로서의 예수랑 신학적 예수랑은 일치점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게 다 그 양식비평이니 하면서 복음서를 이리 쪼개보고 저리 쪼개보고 하다가 결국 복음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책 같은 객관적 증거나 신빙성이 떨어진단다. 복음서 저자는 나름대로의 신학관과 철학관으로 그냥 쭈우욱 예수에 대해 써내려 갔다는 거다. 우리들에게 주는 예수의 의미란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관점으로 써내려 갔다는 거다. 이걸 소위 "케리그마"의 예수라고 하는것 같다. 

그니까 여기 쿵 하늘에서 떨어진 우리가 믿어야할 성경책이 있다. -->고전주의  

음 그건 아닌것 같아. 좀더 우리의 머리로 파 혜쳐서 성경책이 진짜 하나님 말씀인지 알아보자 -->계몽주의 

파혜쳐 보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흔히 있으리라 생각하던 역사적 예수란 없고 신학적 서술만 (이게 케리그마란 단어와 가까운듯) 있다. 그걸 이해하는 내가 중요한거다 - 이게 한 19세기쯤? 자유주의

그래도 기존 개념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은 복음서의 재해석을 통해서, 새로운 고증학적 자료들을 통해서 가능하다 - 순진한 자유주의건 복음주의건 이게 다 순진한 생각이란게 저자의 생각이다.

   케리그마를 통해 나타난 예수의 역사성에의 접근은 케리그마의 관점에서 접근해야지 기존의 역사-고증학적 접근으론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 이것이 새로운 역사적 예수로서 이해 가능하다고 저자는 보는듯 하다.  이제보니 실존주의에 영향받은 신전통주의 일뿐이자너? 

     저자의 입장은 인간안으로의 신의 내재성과 무지한 인간의 개선을 추구하는 자유주의 입장과 구별된다. (읽을 수록 완전 실존주의 철학을 기반으로 한 신전통주의자)  신앙은 역사를 초월하는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종말론적 위기를 "지금" 만나서 실존적인 결단을 할때 의미를 갖는다는 입장인듯. 하지만 계시에 나타난 역사성 (구속사)과 경험되는 일반역사가 그렇게 쉽게 구분 가능한것인지 모르겠다. 케리그마에 나타난 역사성의 해석을 케리그마적 관점으로 이해 하는것과 전통주의 관점에서 이해 하는것의 구분이 그렇게 쉬운지 의문이다. 어쨋든 저자의 입장은 불트만이 주장했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의 분리를 "현대적 의미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로 화해를 시도 한듯 하다. 복음주의 입장에선 여전히 비 신앙적 태도라 하겠다. 

   그럼 현대적 의미의 역사는 기존의 역사란 어떻게 다른가? 제목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지만 혹시 보다 정확한 제목은 "새로운 정의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 

   그 구체적 방법론이 나오나 했는데 없다. 역시 인문계 애들은 입으로만 먹고 살려는 경향이... 재주도 좋다. 그리고 내 부족한 머리로 더 헷갈린다. 도대체 비케리그마적 요소를 다시 현대적 역사개념으로 해석 하자는 것인지 케리그마안의 예수를 현대적 역사개념으로 해석하자는 것인지 그게 그 소린지... 즉 케리그마란 관점 밖의 예수란 저자에게 거의 무의미 하므로 비케리그마적 요소와 역사적 자료라고 알려진 부분들 (그게 도대체 어떤 부분인지 명백히 않보여준다. 못 보여주나?) 에 대한 케리그마와의 연관성을 다시 현대적 역사개념으로 접근해서 "새로운 역사적 예수"를 이야기 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니까 결국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운 탐구란 새로운 역사적 예수 탐구방법을 말하고 있는듯 하다. 이게 뭔소린지...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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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불트만, 리츨, 하르낙, 바르트, 폴 틸리히, 하이데거의 관계를 그려보고 여기다 헤겔, 슐라이마허, 에밀브루너, 라인홀드 니버까지 넣어 보면 현대신학을 대충.  

칸트의 이원론: 하나님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헤겔과 슐라이마허의 변증법적 신학: 이원론의 변증법적 화해 

헤겔: 인간의 정신-사유 (유한 너머 무한으로 운동하는 변증법적 이해)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이다로 화해시도 -더 이상 신학이 아니네?

슐라이마허-인간의 직관과 절대의존의 감정이 신존재를 나타낸다로 화해시도.-자유주의 신학 

리츨-칸트의 이원론으로의 회귀?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따로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과학으로 부터 신학을 지키려 했던건 아닐까? 자연신학의 잘못을 다른 차원에서 반복한듯. -완전 자유주의 신학 

하르낙-기독교는 헬라화 되는 과정으로 사도바울에 의해 예수의 가르침이 예수에 대한 종교로, 성자 하나님으로 신격화 하는 성육신 교리로 변형되었다고 주장,  복음은 각 시대마다 역사형식은 달랐지만, 영원한 진리를 담고 있다고 보았다 -케리그마적 예수와 역사적 예수의 분리 시작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야스퍼스)- 기독교적 실존주의-주관적 계시 이해와 그리스도를 향한 실존적 믿음에 의한 전적 타자를 향한 초월 주장 

바르트- 전적 타자로 부터 오는 계시 강조: 신앙의 주관성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성을 강조. 하지만 기존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계시를 통한 실존적 믿음의 결단만을 강조하는것은 역시 자유주의로 부터 신학을 지키려고 너무 나갔다. 

불트만-양식비평, 비신화화, 실존주의, 존재규정.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의 분리-리츨이네?

     여기서 자유주의 신학이 극단적인 인간 중심의 신학(?) 이라고 해도 "내가 없으면 신도 없다"란 개념은 설득력이 있는듯. 물론 내가 없어져도 신이 존재 하겠지만 내가 없는데 그걸 어떻게 알겠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란 생각은 결국 다 인본주의. 실존주의. 자유주의등 으로 부터 어떤 경로로 든지 영향받았다 하겠다. 어쨋든 저자의 입장은 불트만이 주장했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의 분리를 "현대적 의미의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적 예수로 화해를 시도 한듯 하다. 복음주의 입장에선 여전히 비 신앙적 태도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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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사이드
존 리 행콕 감독, 산드라 블록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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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ind side  : 사각, 약점, <럭비> [상대 팀]을 블라인드 사이드로부터 공격하다. 

그러고보니 제목이 멋진데...  

-줄거리: 한 완벽한 백인가정이 흑인학생 하나를 입양해서 미식축구 스타로 키웠다.

  진짜 사진보다 일단 영화에선 백인가정이 주인공  

-거짓말 같은 사실: 십대 딸과 어린 아들을 둔 부유한(매우) 백인가정 (Tuohy's) 이 흑인 청소년 (Michael Oher) 을 입양해서 한 집에 산다.  

-영화화 될 수 있었던 금상첨화 같은 사실: 이 흑인넘이 뛰어난 미식축구선수가 된다.  

-이해가 잘 안되는 것: 입양한 동기 

-이해가 잘 안된다는 뇬넘들에게 산드라 블럭이 해주 는 말: Shame on you!  

 물론 "넌 찌질거려라 난 상 탔다"라고 보는 넘들도 있겠다.

-사실: 2003년 테네시 주 고등학교 미식축구 division 에선 이미 꽤 알려진 선수인듯. 정식 입양은 2004년에 이루어 졌다. 물론 정식입양 전부터 가족같이 살게 되었겠지. 사실 Tuohy네 같이 잘 사는 넘들이 뭘 더 얻기 위해 입양했다는건 억지추측인듯 하다. 인종차별주의적인 가정에서 자라난 한 부유한 백인 아줌마의 양심에 대한 보상심리였을까?  

-충격적인 사실: 난 어느새 동화를 보고 비웃는 오염된 어른이 되었구나. 나 자신부터 헐리우드 딴따라들이 그리는 스포츠, 섹스, 스크린에 넘 익숙해 져 있었구나. 동화같은 사실은 음모니 조작이니 하며 무시한다. 자극적이고 비도덕적일 수 있는 상황은 금방 사실로 탈바꿈 한다. 이땅에는 정말 순수하게 불쌍한 이웃을 돕고 싶어하고 도움을 서로 주고 받으며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미국 중부 백인들의 부자동네에 가면 말이다. 미디어에서 볼수 있는 반 인륜적이고 자극적인 사건들 만큼이나 아름답고 순수한 이야기들이 있구나. 미국 중부 백인들의 부자동네에 가면 말이다. 세상은 믿을수 없는 넘들 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넘들도 있을 수 있겠구나. 미국 중부 백인들의 부자동네에 가면 말이다. 물론 "아동심리"를 얼핏 "야동심리"로 보는 400마리 goat를 타고 다니는 넘도 있다. 미국 서부의 동양인들 도시에 가면 말이다. (뭔 상처가 있는지 여기에 알레르기 과잉반응을 보이는 넘들도 있다.)

 동화속 동화읽기

-Tuohy가 사는 부자동네에서 몇시간만 가면 흑인 슬럼가. 그곳에 대한 어떤 관심도 없다가 갑자기 자기 동네에 나타난 추위에 떠는 배고픈 덩치큰 흑인아이를 보자 바로 도와준다. 왜냐면 그동안 불쌍한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책으로 TV로 영화로 보던 그런 계층의 인간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놀라지 않는다. 그동안 미디어로 많이 외계인을 봐왔듯 바로 도움의 손길을 줄 뿐이다. 왜냐면 세상에는 그냥 비사회주의적인 착한 사마리아인도 있으니까. 성공주의 신학에 물든 미국 중산층 어저꾸 저쩌구 하기엔 왠지 18불짜리 샐러드와 두대의 BMW, 48개의 프랜차이스 앞에서 초라해 지는 나를 느끼게 하는 영화지만 말이다.

 검기를 압도하는 크기

-그니까 천암함 사건이나 타블로 사건이나 스스로를 Blind side에 밀어 넣지말자. 그 동화가 사실이라면 말이다.  

 콩으로 메주를 쑨데자너 

-그니까 나사렛 예수와 케리그마의 예수의 연속성에 따라 누가 Blind side에 있는게 결정된다는 거자너. 이건 또 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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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
이블린 폭스 켈러 지음, 이한음 옮김 / 지호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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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과 양육"에 비해 좀더 자세히 유전자공학을 설명한것 같은데 재미가 없다. 

유전자가 뭔지도 아리송 해 졌다는 실상의 재 확인인데 재미가 없다. 

뭔가 옛날 생물 교과서 같은 흑백의 불명확한 그림들로 헷갈리는데다가 재미 마저 없다. 

"헷갈리는데다가"는 띄어쓰기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리뷰쓰기 마저 재미없다.  

책 표지며 생김새도 재미가 없다. 

재미 알라딘에서 샀는데도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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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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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란 무엇인가? 옳은 것을 행하는 것인가 옳은것 자체인가? 옳다는 것은 누구에게 옳다는 것인가? 옳다고 느끼는 것일까 이성적으로 수긍이 가는것일까 아니면 정해진 법이나 사람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순응인가? 등등의 껌종이 생각은 누구나 하는법. 역시 인기있는 넘은 무슨말을 하든지 쉽게 설명한다. 가식적이거나 학식있는 척 하지 않는다. 주제전달에 충실하다. 열정과 순수함이 느껴지면 변태일까? 어쨋든 그래서 열띤 토론도 가능.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질문할 좋은 주제들이다.

행복, 자유, 미덕
많은 사람이 최대로 행복하기 위해선 개인의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다.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이에 반해서 개인의 권리를 무엇보다 가장 중요시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유주의). 그런데 개인의 권리 추구야 말로 결국에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한 길이라는 주장은 공리주의인지 자유주의인지? 밀의 공리주의적 자유주의는 공리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는 타협점을 찾았고 칸트의 의무론적 공리주의는 인간의 순수이성에 기초해서 공리를 찾는것이라고 인터넷에 써있네? 공리하면 역시 붉은 수수밭. 그니까 동성애는 차별해서는 안되는 비정상 그룹이라고 저자도 말하는게 제자도?

칸트의 순수이성
가언명제가 아닌 정언명제만이 우리가 지켜야할 명제이며 자연법이 아닌 우리가 정한 선택과 결정을 지키는 것이 정의라고 하는데… 그러한 명제와 논리의 당위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유전자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자유로운 명제가 가능한 이유는?

권리와 자격
이 책과 매트리들리의 본성과 양육을 읽는다면 개인의 자격됨을 주장하는 건 무지 쪽 팔린 일이지.

결론
크리스챤은 하나님에서 정의를 찾는다. 그건 미덕에서 정의의 기준을 삼는것과 비슷. 하지만 진멸법 (가나안 족속은 양 새끼 까지 모두 죽이라는)을 생각하면 그냥 미덕과는 글쎄… 신앙이란 무엇일까?란 질문이 정의란 무엇일까 보다 크리스챤에겐 얼핏 먼저 인듯 싶지만 결국 그게 그것. “하나님을 믿는게 결국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다. 하나님을 믿을때 비로서 개인의 자격회복과 권리충족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만이 참된 미덕이다. 그래서 난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누가 주장한다면? 당장 인간의 생각보다는 하나님이 먼저라고 한다. 그리고 “난 그딴거 몰라요. 주님이 날 사랑하니까요”라고 하면 참 은혜로우면서 진부하지? 게다가 정의를 말하는데 바로 사랑 타령으로 넘어가는게 힘없는 권세없는 기독교다. 왜 하나님을 우선시 하는지 궁금해지시는 분들께 매트리들리식 해답을 드린다면. 사랑과 정의는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통한 정의 실천과 정의를 통한 사랑이 이루어져야 참된 기독교다란 말장난이 가능할듯. 그니까 정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순종할 수 밖에. 점점 껌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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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의 기독교 윤리 우리시대의 신학총서 3
윌리엄 슈바이커 지음, 문시영 옮김 / 살림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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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는 도덕을 이야기 할때 신의 존재를 당연시 한다. 존재증명에 연연하지 않고 논리를 시작하는 현명함을 보인다. 저자에게 있어서 존재론은 비존재론과 논리상 같은 의미를 가지므로 그 증명에 시간을 뺏기지 않고 각 이론이 실제 삶에 미치는 영향을 논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실재이며 도덕이란 인간이 만든 허상이라는 도덕 비실재론은 환원주의에 갖힌 세계이다. 이 물질세계, 자연세계만이 존재하는 전부라는 가정하에 그 허상으로 보이는 비실재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힘이라는 환원주의 해석이 팽배한 이 시대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이다. 

     짜임새 있는 책의 구성이다. 1부는 포스트모던 시대현상을 2부는 이에 반하는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도덕실재론의 입장을 그리고 3부는 1부와 2부를 아우르는 현상과 그 해석에 관한 기독교적 입장을 통하여 삶의 통전성을 이루고자 한다. 그러면서 또한 각 부의 장들 역시 첫장은 현상을 두번째장은 설명을 세번째장은 앞의 두장을 묶어서 결론을 내는 구성으로 되어있다. 구성은 좋지만 말이 너무 어려운듯. 특히 통전성...
     저자에게 있어서 도덕비실재론이란 결국 허무주의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자기모순적이며 궁극적으로 삶의 통전성에 실패할 수 밖에 없다. 비실재를 실재로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힘, 자연의 힘이라는 입장과 하나님 이라는 입장사이에는 화해의 여지가 없다. 해석에 따른 도덕적 책임과 삶에의 적용에 따라 두 입장의 가치는 달라진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재한 힘의 논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실재의 범위를 자연주의에 국한시킬 근거는 없다. 우리는 초자연성, 하나님의 타자성, 도덕적 실재를 인정 할 수 있다. 아니 인정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이다.    

     본성과 양육에서 인간을 유전자와 환경의 산물에 국한시키는 관점은 흡사 도덕 비실재론과 비슷한것 같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존재할 틈이 없다. 뇌에만 존재하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한한 인간에게 무한한 하나님이 접촉하실때 그것이 진정한 영원성에로의 통로인지 아니면 갇힌 세계에서 그냥 벽에 그려져 있는 문인지는 부딪히며 열려고 해봐야 알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이 삶의 통전성을 향한 길이다. 그리고 그 부딪힘은 어떤 사람에게는 한 순간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게 평생 계속되는 부딪힘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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