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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는 소설 창비교육 테마 소설 시리즈
강영숙 외 지음, 이혜연 외 엮음 / 창비교육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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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기 내내 학생들과 문학 작품을 함께 읽으며, 문학이 뭔가, 문학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주 고민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왜, 문학 작품을 읽으라고 하는 거지? 라는 생각. 학생들과 읽을 작품을 고르다 보니, 단편 소설을 자주 읽게 됐고, 그래서 선생님들이 선별해주신 책을 많이 읽어보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땀 흘리는 소설, 가슴 뛰는 소설(나는 자꾸 이 소설집을 사랑하는 소설이라고 부른다) 이후로 나온 기억하는 소설을 읽었다. 앞에 나온 두 권의 책을 읽을 땐, 하... 하는 안타까움이며 복잡한 심경이며 뭔가 아련하고 몽글몽글한 감정이 피어올랐다면, 이 책은, 한 편을 읽고 그 다음 편으로 바로 넘어갈 수 없는 먹먹함이 있었다. 그래서 읽는 데 좀 시간이 걸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문구가 자주 회자되는데, 누가 말했느냐가 아니라, 자꾸 회자된다는 게 중요하게 느껴진다. 요즘은 이 문장을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너무 잦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큰일이 아니어도, 우리는 너무 자주 그리고 금세 잊어버린다.

얼마 전 철거 작업 중이던 건물이 붕괴되어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는 기사를 봤다. 그러면서 이 책을 읽고 있었으니, 저절로 두어 가지의 사건이 동시에 떠올랐다. 참혹한 정치적 현실로 말미암은 일, 그리고 거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혹은 그냥 단지 쇼핑을 나갔을 뿐인데 어이없게 당했던 일... 모두 누군가에게 삶이었던 순간이 그렇게 건물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다. 백화점 붕괴와 관련된 임상순 작가의 작품은 이 책에서 처음 접해서, 그리고 충격적이어서 놀랐다. 아, 이게 진짜 이렇게 치워져(!) 버린 거였나? 싶은 마음. 당황스러움. 어떤 사건에 대한 다른 시각.

몇 주 전에 김소진 작가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읽을 때에도 느꼈던, '어, 이건 우리가 알고 있던(혹은 생각하던) 게 아니잖아..?' 같은 생각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도 떠올랐다.

구제역으로 인한 살아있는 동물 매장. 뉴스로만 접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현장의 이야기를 다룬 '구덩이'. 교사의 입장에서(특히 특성화고에서 내 반 학생을 취업시켜 본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의 숨'은 그냥 넘기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우리는 왜 자꾸 잊을까, 그래서 또 비슷한 일을 반복하게 만드는 걸까? 기억하기 싫어서,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자꾸 잊는 동물이니까? 여전히 어떤 일들은 미제로 남아있고 해결의 기미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차 잊혀져 가는 것 같다. 모든 일을 기억할 순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의 어떤 것을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 아닌가? 라는 생각이 여덟 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내내 들었다. 또한, 나는 무엇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었나... -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말할 주제도 못된다 -

여덟 편의 작품 중 이미 읽은 작품은 최은영 작가의 '미카엘라'와 최진영 작가의 '어느 날(feat. 돌멩이) 이렇게 두 작품 뿐이었고, 나머지 작품들은 처음 읽는 것이었다. 이 작품집을 엮은 선생님들은 어떻게 이렇게 글을 모으셨는지, 이 글들을 모으며 얼마나 마음이 먹먹하고 힘들었을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이 글들을 통해 우리가 무언가를 계속 기억하고 기억하려 노력하면 좋겠다. 문학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기억'하는 게 아닐까? 우리는 그 기억을 위해 학생들과 문학을 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쓰레기장에 버리면, 흙으로 덮어 버릴 거 아니야. 그러면 잊어버린다. 사람은 간사한 동물이라 잊어버린다고. 봐라, 또 무너진다. 분명히 또 무너진다고." - P104

망각했으므로 세월이 가도 무엇 하나 구하지 못했구나.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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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마음 시툰 : 안녕, 해태 1 청소년 마음 시툰 : 안녕, 해태 1
싱고(신미나) 지음 / 창비교육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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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를 하면서, 사실은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국어'라는 교과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시'다. 나의 무지 덕분에 한 번에 다가오는 시가 많지 않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더 분석적으로 읽는 경향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더 읽기 싫어지는 악순환.

그러다 우연히 지지난 해 서울국제도서전 창비출판사 코너에서 '詩누이'라는 책을 보고 얼른 가져와 읽었었다. 단순한 컷처럼 보이지만 시와 잘 어울리는 내용과 그림이 나에게 딱 맞았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비슷하지만 좀더 본격 시에 다가가기에 가까운 책이 또 나왔다고 해서 읽어봤다.

이름하여 '청소년 마음 시툰' - 안녕, 해태


강릉에서 할머니와 살던 잔디는 아빠와 살기 위해 서울로 전학을 왔다. 전학 온 다음 날이 하필이면 소풍가는 날. 혼자 돌아다니던 잔디에게 고양이처럼 생긴 어떤 것(!)이 나타나 '나를 보았으니 앞으로 나를 보살펴야겠다.'고 하며 집까지 따라오게 됐다. 이후 기묘한 동거를 하는데 고양이처럼 생긴 어떤 것은 번번히 천상계의 시험에 떨어지는 해태다. 문학적 소양을 쌓아야 하는 해태 덕분이 우리도 함께 문학적 소양을 쌓는 시+웹툰이다.

책은 컷툰 같은 느낌의 스토리가 있는 만화가 나오고 꼭지의 끝부분에 내용과 비슷한 시 전문이 나와서 함께 읽을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아는 시도 있고, 처음 읽는 시도 있는데 잔디와 해태의 이야기가 시와 잘 어우러져 '아~ 이런 느낌의 시였구나...'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고, '나와는 다른 감상이네' 싶은 시도 있다. 그런데 사실 시도 좋지만 웹툰에 나오는 문장들이 '시 같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처음 마음에 드는 남학생을 보고 '꼭 마음 속에 작은 요정들이 들어와 / 한꺼번에 작은북을 두드려 대는 것 같아.' 라는 문장 같은 것들.

지난 학기에 '상징'과 관련된 성취 기준을 배울 때 정호승 시인의 '고래를 위하여'를 배웠다. 중학생이니 최대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다양한 답변들을 듣고 스스로 상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수업을 구성했었다. 그런데 아쉬웠던 건 시를 배울 때 '청소년들에게 하는 말 같아요.'라는 학생이 있긴 했지만, 이 시가 왜 하필 중1 교과서에 나왔고, 함께 읽고 있는지를 깨닫는 학생이 거의 없다는 거였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이 시 부분을 읽으면서 이 웹툰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더 기억에 남으면서 자기들에게 하는 말처럼 느낄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시집을 읽고 싶어서 서가를 지나다보면 이름을 알고 있는 특정 시인의 책만 고르게 되거나 아예 시선집을 골라 읽어 매번 읽던 시만 읽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집에는 내가 잘 모르는 시도 있어서 읽는 느낌이 좋았다. '청소년' 시집툰이니 아이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은 것들도 많았고... 덕분에 새로운 시인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이들면 시가 좋아진다는데 아직 아닌 걸 보면 나이가 들지 않는 건지... 아직 문학적 감성이 부족한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책들을 읽으며 나도 해태처럼 문학적 소양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리즈 3권 모두 학교 도서관에 신청 도서로 넣어 아이들도 읽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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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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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


흔히 영어덜트 소설이라고 하면 중고등학생을 위한 소설을 떠올리고, 더불어 조금은 유치하거나 그들만의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나도 몇 년전까지는 그랬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좋은 청소년문고를 읽다보면 이렇게 좋은 소설들이 많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리스트에 또 하나의 작품을 추가하게 되었다.

구병모 작가는 이미 ‘위저드 베이커리’라는 작품으로 제 2회 창비 청소년 문학상을 수상한 바가 있고, 이후로도 다양한 작품들을 쓰고 있다. 청소년 대상의 작품만 쓰는 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쓰고 있는데다 작년에 나온 ‘네 이웃의 식탁’도 생각할 것들이 많은 소설이어서 이 작가의 작품은 믿고 볼 수 있겠다는 믿음 같은 것도 있었다. 그러다 지난 해 출연했던 팟캐스트에서 청소년 소설을 하나 준비하고 있다고 해서 조만간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청소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 층의 독자들이 읽을만한 영어덜트 소설이 나온 것 같아 무척 반갑고 기쁘다.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같은) 사람들이 있고, 사막과 고원을 너머 살고 있는 익인이 있다. 평소 순하던(?) 익인들이 갑자기 단체로 들이닥쳐 도시를 공격했고, 이를 방어하던 군사들에게 익인 한 명이 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익인은 기회를 틈타 도시인 중 시행의 배다른 동생을 인질삼아 탈출했고 그 이후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탈출한 익인은 ‘비오’, 배다른 동생은 ‘루’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루’는 이미 도시 안에서도 겉도는 듯한 자신의 처지 때문에 마음 붙일 곳이 없었는데, 비오의 가족이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나아가 익인들의 대표자(지장) 또한 손님으로 인정해주고 있어 이들의 지역에서 익인들의 삶을 함께 하게 된다. 그리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그 일을 통해 한층 커간다.


성장은 단지 청소년기에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정신적 성장은 나이가 몇이 되건 계속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요즘 부쩍 드는 생각이다. 나이가 몇이건 덜 성숙한 사람이 있고, 나이에 비해 훨씬 성숙한 사람이 있다. 서른 살 직장인이 열 일곱살인 학생보다 훨씬 못난 생각을 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되고 TV에 등장하는 공부께나 했고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어린 아이들조차 콧웃음 칠 일을 벌이곤 하는 일도 있다. 사람의 성숙이란 나이보다 경험이고, 그 경험은 꼭 직접 살아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책들을 읽으며, 소설을 통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장을 지켜보며 누구든 생각을 키울 수 있는 게 소설의 묘미이고 성장소설이 가진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주요 인물인 ‘비오’나 ‘루’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있는 ‘가하’나 ‘지요’ 그리고 비오의 엄마인 ‘시와’까지도 우리의 인생에서 한 번은 만날 수 있는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좋았다. 엄마의 입장에서 ‘시와’의 마음을 헤어려본다는 것, 형제의 입장에서 ‘가하’나 ‘지요’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들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청소년 문학이라는 틀이 아니라 좋은 소설이라는 큰 눈으로 이 소설이 많이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날그날의 감정에 충실할 권리가 있고, 그 결과로 인한 짐을 제 것이 아님에도 나눠서 져야 할 때가 있지. 그렇다고 해서 비오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뜻은 아니란다. 우리가 짐을 나누는 것은 서로를 향해 마음을 베푸는 일이야.”


“그러니 그 작은 날개로 어디까지 날겠는지 고민하기보다는...”

이제는 날 수 없는 몸으로 초원조의 부름을 기다리는 엣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지 않겠나.”


사람은 왜 자기와 다른 것이나 알지 못하는 것이나 알지 못하기에 비로소 아름다운 것의 비밀을 캐내려는 본능을 타고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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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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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이후 우리나라의 소설은 세월호를 빼놓고는 사건을 서술할 수 없다. 무력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아픔과 분노를 느꼈고, (어쩌면 그로 인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 가끔 이 상황을 생각하면, 어떤 일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아야 그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건 아닌가 할 때가 있다. 그 이전에 어떤 ‘조짐’이 있었을텐데 말이다.

황정은 작가의 이 연작소설집은 ‘d’와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는 2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dd를 잃은 후의 ‘d’, 완결작품이 없는 소설가 ‘나’가 각각 주인공이며, 2015년 4월 16일을 기점으로 교차된다.

나는 첫번째 작품보다 두번째 작품이 더 좋았다. 첫번째 작품이 ‘부재와 공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두번째 작품은 ‘어른과 상식 그리고 그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두번째 작품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나’의 의식의 흐름에 너무나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랬지?

왜 내가 창피해야 했지?

어른 입장.

그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사람이 그냥 자라면 어느 순간 어른인가?

내가 어른이야?

누가 내게 그 기회를 줬어? p.238


김소리는 수년 동안 자신에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어땠을까? 그도 그렇게 했을까? 그에게도 그 질문이 있었을까? 바르고 옳게 행동했다는 생각에 그런 질문조차 없지는 않았을까? 그는 김소리에게 부끄러움을 가지라고 말했지만 당시에 김소리가 가진 것은 수치심이었고 경멸감이었지. 그는 김소리에게 어른을 요구했지만 그 자신도 김소리에게는 어른이었으면서, 그는 김소리의 아무것에도, 김소리의 어른 됨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비난만 하고 갔어. 그의 어른 됨은 김소리를 관찰하고 김소리를 판단하고 사후에 다가와 비난할 때에만 유용하게 작동했는데, 어른 됨이 그런 것이라면 너무 편리하고 야비하지 않나. p.240


‘어른’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그러면 된다 안된다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인가? 어른인 나는 딸보다 오래 살았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잔소리를 듣는 딸은 가끔 싫은 표정을 보이지만 그래도 묵묵히 듣는 편이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 잔소리 하시는 우리 부모님을 보며, ‘내 딸이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것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나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데, 나와 엄마는 다른 사람이니 나를 그냥 좀 내버려두셨으면 하는 마음 말이다. 문득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잔소리만 하고, 판단만 하고 딸의 혹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른 됨에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은 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의 아버지는 ‘힘없음을 혐오’하고 ‘약함을 혐오’한다. 김소리의 상견례에서 바깥사돈이 언제 한 번 찾아보겠다고 하자 그 자리에선 아무 말도 못하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신을 무시한다고 분노한다. ‘아들 가진 유세’라는 것이다. 신부쪽이기 때문에 무조건 무시당한다는 느낌은 누가 만드는 걸까?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나’의 아버지는 약자 중의 약자로 자신을 판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혐오한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는 힘이 없고 그것은 혐오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대의 어른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했던 경험으로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큰 것같다. 과거의 경험이 두려움으로 남은 것은 <d>에서의 김귀자 할머니도 비슷하다. 

특히 또다른 '나'의 아버지 이야기는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다.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게 왜 나라에서 해결해줘야 하는 문제냐’는 아버지의 말씀에 그 이후로 다시는 세월호를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본 적 없는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세계... 그들의 세대. 그들의 무력함.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힘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 혹은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자식의 입장에서는 완전무결한 어른이라고 생각한 부모의 모습이 깨어지는 경험이다. 차압 딱지가 붙을 것임을 알았던 ‘나’의 아버지는 두 딸만 남겨둔 채 출근하는 척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딸들 앞에서 그 일을 안쓰러운 자신의 과거로 회상하곤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딸들의 절망감이란! 그 일을 직접 경험한 딸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는 자신만의 과거 회상. 나는 두 딸인 ‘나’와 김소리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생각하게 만든 부분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평범성’으로 번역된 banality는 김학이 선생이 지적했던 것처럼 ‘평범성’보다는 ‘상투성’에 가까운 발언인 듯하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악의 어떤 측면은 평범성이라기보다는 상투성에 그 기원이 있을 것이다. p.219


이것과 저것을 연상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연상이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이고, 거기서 ‘상식’은 무슨 일을 할까. 선한 것과 천사와 아기는 ‘핑크’ 속에서, 어떻게 서로 작용하고 있는 걸까. p.246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뭘가? 그것은 생각일까? 사람들이 자기 상식을 말할 때 많은 경우 그것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으니 그것은 생각일까. 아니야 common sense 니까 세계에 대한 감이잖아. 그것은 그러할 것이라는 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해제를 쓴 정화열 선생은 상식을 ‘사유의 양식’이라고 칭하며 그것을 ‘감각에 바탕을 둔 사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상식, 또는 공통감이란 아무래도 ‘생각’인 모양이고, 다시 그를 인용하자면 서수경에게 적용되었다는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본래의 상식, 즉 사유의 한 양식이라기보다는 그 사유의 무능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가 상식을 말할 때 어떤 생각을 말하는 상태라기보다는 바로 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시 생각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다가,라고 말하는 순간에 실은 얼마나 자주 생각을......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상식이지,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배제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와 나의 상식이 다를 수 있으며 내가 주장하는 상식으로 네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조차 하질 않잖아. 그럴 때의 상식이란 감도 생각도 아니고...... 그저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고 저 이야기는 저렇게 끝나는 것이라는 관습적 판단일 뿐 아닐까. p.264~266


부분이다. 

예전에 ‘윤리학과 교육’이라는 책을 보면서 ‘상식’이라는 게 과연 영원불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상식은 100년 전, 50년 전, 30년 전이 다른데, 그냥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그렇게 하니까 좋은게 좋은 식으로 넘어가는, 흘러가 버리는 상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걸 생각없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혹은 '상식이지' 라고 해버려도 되는가? 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또한 얼마전에 보았던 '알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서 잠깐 아이히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서 일부러 화면을 캡쳐해두기도 했다. 아이들과 '생각없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상식'에 대해 나의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놓았으니 '상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다. 

황정은 작가가 오랜만에 낸 책이라 무척 기대하고 읽었는데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책을 읽으며 올해 좋은 책들을 만나게 됨에 참 감사하고 기뻤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되는 소설이 정말 좋은 소설이라면 이 작품은 정말 손에 꼽을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몇몇 참고 버전의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우선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부터


틀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툴을 쥐지 못한 인간 역시 툴의 방식으로... p.189~190

탈출의 경험이 내게 없기 때문일까? 내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 서수경은 1997년에 네가 김포 포도밭에서 나오지 않았느냐고, 그것이 탈출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것이 탈출일까? 나는 오랫동안 도망이라고 생각했다. 1997년 여름에 나는 경기도 김포 모처의 포도밭에서 도망쳤다, 라고.

나는 포도밭에서, 탈출했을까 도망했을까.

그 둘은 구별되는 것일까. p.196

어쨌거나 어머니가 모성을 말하고 아버지가 금기를 말하는 이야기는 싫다. 그런 이야기를 도취된 채로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어른도 싫다. 정진원은 그것보다는 좋은 이야기를 읽고 자랐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독서의 경험이란 앞선 삶의 문장을, 즉 앞선 세대의 삶 형태들을 양손으로 받아드는 경험이기도 하니까.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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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 소설의 첫 만남 2
성석제 지음, 교은 그림 / 창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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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 - 성석제

중고등학생 대상 소설들을 의무적(?)으로 읽는 편이다. 아이들이 추천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많고, 상황에 따라 내가 책을 추천해야 하는 상황도 생기기 때문이다. 신간 도서도 자주 읽는 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미 여러 단편 작품들을 모아 놓은 소설집에 수록되어 있었고, 국어 선생님들 사이에도 인기가 있는 편이다. 그러다 신간 도서 목록을 보고 이 단편 소설만 따로 책으로 나온 것을 알게 되었고, 설명을 통해 출판사의 신선한 시도라 생각해 읽어보았다.

내용은 '유명 화가의 초등학교 때 이야기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까.
소제목 0과 1이 반복되고 그에 각각의 서술자가 있다. 서술자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끝나 있는 작품이다. 사건은 소설의 거의 3/4 지점 쯤에 등장하고 소설의 끝부분은 독자가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다. 주인공들의 선택, 재능, 주변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할 부분 등 단편 소설이지만 학생들과도 이야기할 거리가 꽤나 많다.
그보다 이 책 자체는 그 자체로도 아이들에게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보인다. 우선 두께가 얇다는 게 꽤 매력적이다. 그림이 없으면 우선 싫다고 하는 아이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고, 그림이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같다. 글자의 크기가 작지 않은 것도 보기에 편했다. 무슨 책을 읽어야 할 지 잘 모르겠다고 하는 학생들에게 쥐어주기 좋은 크기이기도 하다.

아이들 사이에도 독서력은 꽤 차이가 크게 나는 편이다. 중학생임에도 성인용 도서를 잘 읽어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여전히 초등학교 중학년 수준의 동화책도 어려워하는 아이들도 꽤 있다. 이 두 부류의 아이들을 잘 연결시킬 수 있는 작품으로 둘 다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형태로 나온 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도서관에 시리즈 몇 권을 비치해두면 좋을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시리즈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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