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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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이후 우리나라의 소설은 세월호를 빼놓고는 사건을 서술할 수 없다. 무력한 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아픔과 분노를 느꼈고, (어쩌면 그로 인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다. 가끔 이 상황을 생각하면, 어떤 일의 바닥까지 내려가 보아야 그 일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는 건 아닌가 할 때가 있다. 그 이전에 어떤 ‘조짐’이 있었을텐데 말이다.

황정은 작가의 이 연작소설집은 ‘d’와 ‘아무 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라는 2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dd를 잃은 후의 ‘d’, 완결작품이 없는 소설가 ‘나’가 각각 주인공이며, 2015년 4월 16일을 기점으로 교차된다.

나는 첫번째 작품보다 두번째 작품이 더 좋았다. 첫번째 작품이 ‘부재와 공간’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두번째 작품은 ‘어른과 상식 그리고 그에 대해 말할 수 없음’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두번째 작품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나’의 의식의 흐름에 너무나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랬지?

왜 내가 창피해야 했지?

어른 입장.

그건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사람이 그냥 자라면 어느 순간 어른인가?

내가 어른이야?

누가 내게 그 기회를 줬어? p.238


김소리는 수년 동안 자신에게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는 어땠을까? 그도 그렇게 했을까? 그에게도 그 질문이 있었을까? 바르고 옳게 행동했다는 생각에 그런 질문조차 없지는 않았을까? 그는 김소리에게 부끄러움을 가지라고 말했지만 당시에 김소리가 가진 것은 수치심이었고 경멸감이었지. 그는 김소리에게 어른을 요구했지만 그 자신도 김소리에게는 어른이었으면서, 그는 김소리의 아무것에도, 김소리의 어른 됨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비난만 하고 갔어. 그의 어른 됨은 김소리를 관찰하고 김소리를 판단하고 사후에 다가와 비난할 때에만 유용하게 작동했는데, 어른 됨이 그런 것이라면 너무 편리하고 야비하지 않나. p.240


‘어른’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 그러면 된다 안된다를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인가? 어른인 나는 딸보다 오래 살았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해야한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잔소리를 듣는 딸은 가끔 싫은 표정을 보이지만 그래도 묵묵히 듣는 편이다. 그러다 문득 나에게 잔소리 하시는 우리 부모님을 보며, ‘내 딸이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것일까?’ 생각하기도 한다. 나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인데, 나와 엄마는 다른 사람이니 나를 그냥 좀 내버려두셨으면 하는 마음 말이다. 문득 나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잔소리만 하고, 판단만 하고 딸의 혹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어른 됨에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은 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의 아버지는 ‘힘없음을 혐오’하고 ‘약함을 혐오’한다. 김소리의 상견례에서 바깥사돈이 언제 한 번 찾아보겠다고 하자 그 자리에선 아무 말도 못하고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자신을 무시한다고 분노한다. ‘아들 가진 유세’라는 것이다. 신부쪽이기 때문에 무조건 무시당한다는 느낌은 누가 만드는 걸까? ‘자존감’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나’의 아버지는 약자 중의 약자로 자신을 판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혐오한다. 왜냐하면 ‘나’의 아버지는 힘이 없고 그것은 혐오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대의 어른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당했던 경험으로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큰 것같다. 과거의 경험이 두려움으로 남은 것은 <d>에서의 김귀자 할머니도 비슷하다. 

특히 또다른 '나'의 아버지 이야기는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다.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게 왜 나라에서 해결해줘야 하는 문제냐’는 아버지의 말씀에 그 이후로 다시는 세월호를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본 적 없는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서 우리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세계... 그들의 세대. 그들의 무력함.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힘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는 것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 혹은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자식의 입장에서는 완전무결한 어른이라고 생각한 부모의 모습이 깨어지는 경험이다. 차압 딱지가 붙을 것임을 알았던 ‘나’의 아버지는 두 딸만 남겨둔 채 출근하는 척 공중전화 박스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딸들 앞에서 그 일을 안쓰러운 자신의 과거로 회상하곤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딸들의 절망감이란! 그 일을 직접 경험한 딸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는 자신만의 과거 회상. 나는 두 딸인 ‘나’와 김소리에게 감정이입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생각하게 만든 부분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평범성’으로 번역된 banality는 김학이 선생이 지적했던 것처럼 ‘평범성’보다는 ‘상투성’에 가까운 발언인 듯하다.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악의 어떤 측면은 평범성이라기보다는 상투성에 그 기원이 있을 것이다. p.219


이것과 저것을 연상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연상이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이고, 거기서 ‘상식’은 무슨 일을 할까. 선한 것과 천사와 아기는 ‘핑크’ 속에서, 어떻게 서로 작용하고 있는 걸까. p.246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뭘가? 그것은 생각일까? 사람들이 자기 상식을 말할 때 많은 경우 그것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으니 그것은 생각일까. 아니야 common sense 니까 세계에 대한 감이잖아. 그것은 그러할 것이라는 감.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해제를 쓴 정화열 선생은 상식을 ‘사유의 양식’이라고 칭하며 그것을 ‘감각에 바탕을 둔 사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는데 그에 따르면 상식, 또는 공통감이란 아무래도 ‘생각’인 모양이고, 다시 그를 인용하자면 서수경에게 적용되었다는 ‘상식적으로’에서 상식은 본래의 상식, 즉 사유의 한 양식이라기보다는 그 사유의 무능에 가깝지 않을까. 우리가 상식을 말할 때 어떤 생각을 말하는 상태라기보다는 바로 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역시 생각은 아닌 듯하다...... 우리가 상식적으로다가,라고 말하는 순간에 실은 얼마나 자주 생각을...... 사리분별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지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상식, 그것은 사유라기보다는 굳은 믿음에 가깝고 몸에 밴 습관에 가깝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건 상식이지,라고 말할 때 우리가 배제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너와 나의 상식이 다를 수 있으며 내가 주장하는 상식으로 네가 고통을 당할 수도 있다는 가정조차 하질 않잖아. 그럴 때의 상식이란 감도 생각도 아니고...... 그저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것이고 저 이야기는 저렇게 끝나는 것이라는 관습적 판단일 뿐 아닐까. p.264~266


부분이다. 

예전에 ‘윤리학과 교육’이라는 책을 보면서 ‘상식’이라는 게 과연 영원불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상식은 100년 전, 50년 전, 30년 전이 다른데, 그냥 자연스럽게 주변에서 그렇게 하니까 좋은게 좋은 식으로 넘어가는, 흘러가 버리는 상식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걸 생각없이 ‘나도 그렇게 생각해’ 혹은 '상식이지' 라고 해버려도 되는가? 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또한 얼마전에 보았던 '알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서 잠깐 아이히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어서 일부러 화면을 캡쳐해두기도 했다. 아이들과 '생각없음'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상식'에 대해 나의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놓았으니 '상식'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다. 

황정은 작가가 오랜만에 낸 책이라 무척 기대하고 읽었는데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책을 읽으며 올해 좋은 책들을 만나게 됨에 참 감사하고 기뻤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게 되는 소설이 정말 좋은 소설이라면 이 작품은 정말 손에 꼽을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몇몇 참고 버전의 책들도 읽어보고 싶다. 우선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부터


틀을 쥔 인간은 툴의 방식으로 말하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찌된 영문인지, 툴을 쥐지 못한 인간 역시 툴의 방식으로... p.189~190

탈출의 경험이 내게 없기 때문일까? 내가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 서수경은 1997년에 네가 김포 포도밭에서 나오지 않았느냐고, 그것이 탈출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것이 탈출일까? 나는 오랫동안 도망이라고 생각했다. 1997년 여름에 나는 경기도 김포 모처의 포도밭에서 도망쳤다, 라고.

나는 포도밭에서, 탈출했을까 도망했을까.

그 둘은 구별되는 것일까. p.196

어쨌거나 어머니가 모성을 말하고 아버지가 금기를 말하는 이야기는 싫다. 그런 이야기를 도취된 채로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어른도 싫다. 정진원은 그것보다는 좋은 이야기를 읽고 자랐으면 좋겠어. 왜냐하면 독서의 경험이란 앞선 삶의 문장을, 즉 앞선 세대의 삶 형태들을 양손으로 받아드는 경험이기도 하니까.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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