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아빠의 자동차 소리는 아니었다.
더스티는 정문을 향해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골목 끝까지 차를 몰고 온다면 그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손 코티지를 방문하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스톤웰 공원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렇게 밤늦은 시간에는 어느 쪽에도 해당사항이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쩐지 그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자동차는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은 채였다.
더스티는 골목에서 꽤 아래에 떨어진 곳에 있어 이곳에서는 차량의 정체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예전부터 자주 아빠와 차를 타고 공원과 집을 오갔던 터라 조만간 자동차가 공원 정문 위로 불빛을 비추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불빛도 비치지 않았고 자동차라고 생각한 것 또한 자동차가 아니었다. 엔진 소리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동차보다 더 큰 것이었다. 더스티는 불안스레 정문 쪽으로 시선을 던졌고 바로 그때 엔진 소리가 멈추었다.
또다시 침묵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더스티는 나무들이 서 있는 장소를 향해 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골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아무튼 소년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눈 위에 펼쳐진 발자국을 따라가면서 더스티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지금 점점 약해져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자기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겁이 났고, 뒤에는 또 무엇이 놓여 있는지 몰라 두려웠다.
또다시 조쉬 오빠 생각이 났다. 조쉬 오빠였다면 그대로 밀고 나갔을 것이다. 조쉬 오빠라면 그랬을 거라고 믿었다.
더스티는 애초 계획대로 줄곧 달렸다. 한참을 달린 후 앞을 보았을 때 더스티 앞에 나무들이 서 있었다. 숲 한가운데 나 있는 길이 눈에 묻히긴 했지만 오른쪽에는 큰 단풍나무가 왼쪽에는 마로니에가 서 있는 것으로, 그 사이의 길을 금세 알아볼 수 있었다. 발자국은 눈에 덮여 형체조차 사라진 길을 따라 숲속을 향해 죽 이어졌다. 더스티는 다시 한 번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았다.
정문에는 여전히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는데, 더스티가 정문을 바라보는 바로 그때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바닥까지 몸을 낮춘 무언가가, 담장 사이 틈새로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더스티는 서둘러 숲 속으로 달렸다. 지금으로선 무얼 판단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 와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 더스티는 내처 달릴 수밖에 없었고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더스티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눈 위에 박힌 발자국을 응시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이 점점 차가워졌고 바람은 거세지고 있었다. 언뜻언뜻 보이던 나뭇가지들이 캄캄한 밤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소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차피 이곳에서 소년을 발견하리라 기대하지도 않았다. 더스티의 짐작이 틀림없다면 소년은 이 숲의 반대편에, 아마도 눈 속에 큰대자로 누워 있을 것이다.
더스티는 계속 달렸다. 이곳의 지면은 더 미끄러웠다. 나무 위의 눈은 제법 녹아 내렸지만, 바닥의 눈은 앞으로 죽 이어진 발자국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여전히 깊이 쌓여 있었다. 더스티는 서둘러 달렸다. 더스티의 머릿속은 소년과 조쉬 오빠, 그리고 자신의 뒤를 쫓는 사람들 생각으로 가득 찼다. 더스티는 숲 한가운데 나무를 베어낸 삼림개척지에 다다라 낡은 분수 옆에 멈추어 섰다.
지금은 분수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오지 않았다. 분수 위로 눈이 소복이 덮여 있었다. 더스티는 돌로 조각된 못생긴 아기 천사를 슬쩍 내려다본 다음 그 옆에 놓인 빈 와인병을 쳐다봤다. 그 옆에, 그러니까 바로 옆에 역시 비어 있는 작은 약병 한 통도 눈에 띄었다. 분수 위 숲 쪽으로 발자국이 죽 이어져 있었다. 더스티는 이 발자국을 따라 길을 재촉했고, 바로 그때 한밤중의 정적을 깨고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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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2.

차가운 공기가 달려가는 더스티의 얼굴을 세차게 때렸다. 더스티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온몸이 떨려왔지만, 어떻게든 소년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에 하나 소년이 과도한 양의 약을 털어 넣은 거라면(더스티는 그가 그랬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그가 위험에 처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고, 혹시라도 이미 위험한 지경에 처했다면 어려움을 무릅쓰고서라도 그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쉬 오빠라면 그랬을 것이다. 오빠라면 어떠한 위험이 닥치든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더스티는 언제나 조쉬 오빠의 그런 점에 감탄했으며, 이제 조쉬 오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낼 기회가 온 만큼 오빠를 위해 오빠와 똑같이 용기를 발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문득 더스티는 아까 창문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생각해냈다.
더스티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골목의 눈은 아무도 발자국을 남긴 적이 없는 처녀설이 아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의 발자국이 스톤웰 공원 정문을 향해 길게 뻗어 있었던 것이다. 더스티는 오른쪽을 돌아보고, 이 발자국이 골목 저쪽 끝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눈이 내린 후로 누군가 벡데일에서 이쪽으로 걸어왔던 것이다.
물론 이 발자국이 소년의 흔적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더스티는 소년이 근처에 있다고 확신했으며, 이런 한밤중 인적이 드문 마을 한구석에 소년 말고 다른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다. 더스티는 눈 위에 또 하나의 발자국을 남기면서 공원을 향해 나 있는 골목길을 따라 달려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달리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이제 그만 멈추라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 경찰에 신고하고 아빠에게 전화를 걸라고 외치는 아빠의 음성이 들렸다.
하지만 더스티는 이런 생각들을 몰아냈다. 이 일은 조쉬 오빠에 관한 일이었다. 어쨌든 아직 경찰에 알릴 일은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집안일이니까. 아빠는 지금 이 마을에 없기 때문에 설사 아빠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건다 하더라도 더스티가 소년에게 도착하기 전에 아빠가 먼저 소년이 있는 곳에 도착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이 일은 순전히 더스티의 몫이었고, 어쩌면 혼자서 처리하는 편이 최선의 방법일지도 몰랐다. 소년이 목숨을 구할 생각이 없다고 아무리 고집을 부린다 해도 어쨌든 그 역시 위험한 상황을 맞이하길 바라지는 않을 터였다.
예상대로 스톤웰 공원의 정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더스티는 혹시 소년이 정문을 타고 넘어갔거나 공원 담장 사이 틈새로 들어가지는 않았는지 알아보려고 발밑을 둘러보았다.
으레 그렇듯 담장 사이에는 약간의 틈새가 벌어져 있었다. 더스티는 언제나처럼 그 틈새를 간신히 뚫고 들어가 발자국을 따라 달렸다. 발자국은 공원 안쪽, 자그마한 나무가 서 있는 방향으로 굽어진 비탈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주위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지만, 고요한 이곳 분위기가 더스티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다.
뭔가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분은 단지 주변의 정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든 이유는 바로 빛 때문이었다. 아마도 이 빛은 어둠과 눈이 한데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일 테지만, 마치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이 감도는 차가운 빛이 허공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저 아래에 서 있는 나무들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반짝반짝 빛났고, 레이븐 언덕 꼭대기에서 한참 멀리 떨어진 곳까지 어둠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더스티는 어서 일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소년을 제외하면 이곳에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는 게 틀림없었다. 마약중독자든 뜨내기든, 이런 날씨에 공원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때 더스티는 골목 안에서 자동차 엔진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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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네가 있는 곳이 어디니?”
“상관하지 마.”
“왜 말 하려 하지 않는 거야?”
“그럼 네가 앰뷸런스를 부를 테고,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와서 내 생명을 구하려들 테니까.”
더스티는 몸서리를 쳤다. 이건 도움을 구하려는 외침이 아니었다. 작별인사였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
더스티가 추궁했다.
“알려고 하지 마.”
“제발 말해줘.”
“난 죽고 싶어. 죽어야 해.”
“도대체 왜?”
“고통이 너무 심해. 이 고통이 어서 사라져주기만을 바랄 뿐이야.”
더스티는 재빨리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소년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아낼 만한 무슨 단서를 찾아야 했다. 그가 나무에 대해 말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근처에 나무가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다 소년이 벡데일 지역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말한 적이 없었다. 전국 어느 구석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심지어 외국에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문득 수화기 저편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뭐랄까, 무거운 물체가 경첩 위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 술집 간판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철문이 열리는 소리 같기도 한 금속성의 삐걱거리는 소리였다. 더스티는 귀를 기울였다. 어쩐지 많이 들어본 소리였고, 그것도 최근에 들어본 적이 있는 소리였다. 이제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신이 생겼다.
소리가 멈췄다. 더스티는 다시 소리가 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귀를 기울이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소년은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한번만 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대신 마치 혼잣말을 하는 듯 아련하고 초연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소년의 말은 아무런 단서도 주지 못한 채 더스티를 온통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미안해, 꼬마 더스티. 잘 있어, 꼬마 더스티.”
더스티의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예전에 들었던 말과 똑같은 말을 듣게 되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더스티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들었던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바로 지금처럼 있는 힘껏 전화기를 부여잡고 있던 그날 일이 떠올랐다. 킬버리 무어 황무지 위로 해가 떠오르는 걸 바라보며 침실 창문가에 서 있던 그때가 떠올랐다. 하루가 저물어 가면 그에 따라 삶도 같이 저물어가는 것만 같던 그날의 기분이 떠올랐다. 더스티의 귓가에 들려오던 몇 마디 말, 오빠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말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났다.
“잘 있어, 꼬마 더스티.”
소년이 말했다.
“조쉬 오빠!”
더스티가 소리쳤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전화가 끊기기 전, 더스티의 귀에 들려온 소리는 금속이 덜그럭거리는 아까의 그 이상한 소리가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소리와 함께 한 가지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 스톤웰 공원… 나무들… 어린이 놀이터… 그네! 바로 어제만 해도 아빠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다가 그곳의 그네 위에 앉아 있었다. 심지어 그 위에 올라타기도 했는데, 조금 전 바로 그 소리가 들린 것이다. 더스티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소년은 기껏해야 2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게 분명했다.
더스티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현관을 향해 달려가 외투를 입고 부츠를 신었다. 그런 다음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전원을 켠 후, 메모지에 아빠 앞으로 간단히 메모를 남겼다.
‘잠깐 나가. 휴대전화 켜놨어. 금방 돌아올 거야. 더스티.’
더스티는 아빠가 메모를 읽기 전에 돌아올 수 있길 바랐다. 아빠가 메모를 보게 되면 이만저만 걱정하는 게 아닐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지금으로서는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다. 소년을 찾아야 했다. 그것도 빨리. 더스티는 집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닫은 다음 컴컴한 골목길을 전력을 다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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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이끼 2009-12-27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와 숲, 그리고 소년, 소녀.........
팀보울러 특유의 환상과 아픔, 사랑과 죽음이 함께하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그 유혹에 또다시 빠져든것만 같네요^^
 

 

제4회

 

하지만 소년은 더스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지금 수화기를 내려놓고 약병을 열기 위해 끙끙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약병 뚜껑을 비틀면서 혼자 구시렁구시렁 욕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마침내 만족스러운 투로 툴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말 들려?”
더스티가 말했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더스티는 뭔가 생각해내려 애썼다. 그리고 이제, 소년이 과음을 한 바람에 이렇게 전화를 걸고 있는 와중에 알약을 좀 더 삼키고 있는 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또한 그가 조쉬에 대해 뭔가 알고 있으리라는 확신도 들었다. 그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이 소년의 생명을 구해야 했고, 그러려면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했다. 잘하면 그가 말해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이건 진짜로 자살을 기도한 것이 아니라 도와달라는 외침인지도 몰랐다.
“내 말 들리냐고?”
더스티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더스티는 전화기를 들고 창가로 다가가 커튼 사이로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눈에 덮여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방금 전 내린 눈까지 더해 눈은 18센티미터 정도 쌓여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여 있었고, 아무래도 아직 아무도 눈을 밟은 사람이 없는 듯 거리는 발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더스티는 오른쪽을 흘긋 보았다. 인적이 끊긴 골목이 캄캄한 어둠 속으로 쭉 뻗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아빠가 벡데일에서 돌아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마찬가지로 인적이 끊긴 골목을 바라보았다. 골목은 집 바깥쪽 넓은 모퉁이 구역을 지나 그곳에서부터 다시 좁아지기 시작해 마침내 스톤웰 공원 입구에서 끝이 난다. 그곳 역시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고, 온통 순백의 눈과 고요한 정적, 그리고 텅 빈 공허만이 덩그렇게 남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소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데이지?”
“나를 데이지라고 부르지 마.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알겠어? 이제부터 내 말 잘 들어….”
“아니, 네가 내 말을 들어줘야겠어.”
소년의 목소리는 아까와 달라져 있었다. 조금 졸린 듯했지만 어쩐지 훨씬 더 강압적인 것 같았다.
“내 말 잘 들어… 난 시간이 별로 없고… 몇 가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너를… 너를 겁먹게 만들었다면 미안해.”
“나를 겁먹게 하지는 않았어.”
“아니야, 그랬어.”
소년의 숨소리는 아까보다 더 가빠진 것 같았다.
“내가 널 겁먹게 했어. 그랬다는 거 나도 알아. 그리고 지금도… 지금도 여전히 너한테 겁을 주고 있다는 거 알고 있어.”
더스티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았다.
“미안해.”
소년이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정말 미안해… 네가 누구든 간에 말이야….”
“내 이름은 더스티야.”
더스티는 소년과 이야기하는 게 싫었다. 소년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스티는 위험을 감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 소년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려면 그와 통화를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멋진 이름이네.” 
“네 이름은 뭐야?”
“아무렇게나 불러.”
“너도 이름이 있을 거 아니야.”
“아주 많은 이름이 있지.”
“그럼 그 가운데 하나를 말해줘. 그 이름으로 부를게.”
“이름 따위 들먹이기에는 이젠 너무 늦었어.”
더스티를 오싹하게 만드는 소년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느낌이 배어 있었다.
“더스티?”
“응?”
“전화 끊지 않고 받아줘서 고마워.”
“조쉬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줘.”
“조쉬라는 애가 누군지 몰라.”
“넌 알잖아. 네가 알고 있다는 거 알아.”
소년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쉬가 어디에 있지?”
소년이 입을 열었지만 더스티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이 나무들 말이야….”
소년이 웅얼거리며 말했다.
“정말 아름답다.”
“조쉬에 대해 말하라니까. 부탁이야, 조쉬에 대해 말해줘.”
“정말 아름다워.”
소년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져가고 있었다.
“나무 근처에서 죽게 되어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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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난 데이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
더스티가 천천히 말했다.
“그렇다고 말하지 않았어.”
소년이 말했다.
“하지만 그 비슷한 이름이긴 하잖아, 안 그래?”
더스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럼… 말괄량이라는 이름은 어때?”
소년이 말했다.
“그렇게 불러도 괜찮겠니? 네가 좀 기분 나빠할지 모르지만, 어쩐지 네가 선머슴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
더스티는 너무 놀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이젠 장난이 아니었다. 더스티를 말괄량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딱 한 사람뿐이었다. 말괄량이는 그녀를 부르는 그만의 애칭이었으며, 짐작으로 알아맞히기에는 꽤나 특이한 애칭이었다. 이 소년은 더스티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조쉬는 어디에 있지?”
더스티가 차갑게 물었다.
“조쉬라는 애가 누군지 난 몰라.”
“조쉬가 어디에 있냐고. 어서 말해.”
“조쉬라는 애가 누군지 모른다니까.”
“조금 전에 네 입으로 조쉬라는 이름을 말했잖아.”
“그냥 지어서 불러본 거야. 너희 집 전화번호를 아무렇게나 눌러본 것처럼. 데이지라는 이름도 마찬가지고.”
“그럼 말괄량이도 그냥 불러본 거란 말이지?”
“응.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도 너를 그렇게 부르니?”
더스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더스티의 마음속에는 이제 온갖 의혹들이 물밀듯 밀려들고 있었다. 이 소년은 자신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스티는 최대한 알아낼 수 있는 대로 알아내야 했다.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그 얼굴에 대해서. 못 본 지 2년이 지났지만 매일, 아니 어느 땐 매시간, 그리고 어느 땐, 아마도 숨 쉬는 매 순간마다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그 얼굴에 대해서.
“조쉬는 어디에 있지?”
더스티가 다시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 조쉬라는 애가 누군지 모른다고.”
“넌 알아.”
“몰라.”
“하지만 네가 방금 말한 이름은….”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따위는 관심 없어.”
소년은 이제 좀 성질이 난 것 같았다.
“난 내가 하는 말을 통제할 수 없어, 알아듣겠어?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할 뿐이야. 무슨 근거로 그런 말들을 하는지 나조차 모른단 말이야.”
더스티는 마음을 진정시켜보려 애썼다. 지금은 신중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소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게 좋겠지만, 지나치게 다그치다간 저쪽에서 전화를 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필 왜 그런 이름들을 선택했는지 말해봐.”
더스티가 말했다.
하지만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커녕, 수화기 저편에서는 소년이 구역질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더스티의 마음이 온통 혼란스러워졌다. 만일 이것이 연극이라면 꽤나 설득력 있는 연기였다. 토하는 소리는 상당히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 같더니, 갑자기 뚝 멈추었다.
“너 괜찮니?”
더스티가 말했다.
아무런 대꾸가 없더니 또다시 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더스티는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어지간히 마셨나보구나. 대체 뭘 마신 거니?”
“싸구려 포도주.”
대답이 들려왔다.
“엄청나게 맛이 없었어.”
그때 더스티의 귀에 뭔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야?”
더스티가 말했다.
“뭐가?”
“지금 이 소리.”
“이거?”
이번에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알약 병.”
소년이 대답했다.
“아까 토할 때 조금 전에 먹은 약까지 전부 게워낸 것 같아. 그래서 약을 좀 더 먹으려고. 이놈에 약병을 제대로 열 수 있다면 말이지.”
“있잖아….”
더스티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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